신의 편에 서야 하는 이유 종교의 교리는 무시해도 되지만 인생에는 규칙이 필요하다. 방향성이 필요하다. 매뉴얼이 필요하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집단의 위기를 감지하고 반응하게 되어 있다. 둔감한 사람도 있고 예민한 사람도 있다. 둔감한 사람은 지구가 온난화된다고 해도 아무 생각이 없지만 예민한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 그런 사람은 지구를 자기 몸의 일부로 느낀다. 지구가 아프면 내가 아픈 것이다. 규칙을 정해놓고 대응하면 고통이 줄어든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명확히 선을 그어야 한다. 일이 잘못되어도 내 잘못이 아니면 내가 괴로워 할 이유가 없다. 많은 경우 가해자가 잘못했는데 피해자가 고통을 느낀다. 도둑이 물건을 훔쳤다면? 범인은 일반인에서 도둑놈으로 신분이 추락한 것이다. 손해본 사람은 범인이다. 범인은 반사회성에 절여지게 되며 다시 복구되지 않는다. 남이 손가락질 안 해도 자기 스스로 손가락질 한다. 고통을 느껴야할 사람은 그 도둑이다. 잃은 몇 푼의 돈은 벌어서 만회하면 된다. 피해자가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집단의 위기 때문이다. 피해를 입어서 괴로운 것이 아니고 가해자가 다른 곳에서 추가로 범죄를 저지를 것이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상처는 스스로 극복하면 된다. 미친 개에게 물렸다고 치면 된다. 개의 잘못이지 내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집단의 위기는 좌시할 수 없다. 범인을 체포해서 처벌을 받게 해야 한다. 문제는 막연히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왜 괴로운지 모른다. 내 잘못이라며 자책하기도 하고 가해자에게 보복을 하려다가 더 많은 피해를 입기도 한다. 그 고통이 집단의 위기를 감지하는 사회적 본능 때문이며 집단에 위험의 존재를 알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집단과 나의 관계설정이 중요한 거다. 집단은 내게 무엇인가? 집단은 누구인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헬조선이야 망하든 말든 남의 일이 아닌가? 강 건너 불구경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이민 가면 되는가? 그냥 죽어버리면 해결되나? 지구가 망하든 말든 내 죽으면 모든 게 끝? 특별히 예민한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편하게 잠들지 못한다. 심리적으로 도피하는 방법도 있다. 나는 세계시민인뎅. 한국의 일은 한국인들이 알아서 하겠징. 하며 심리적인 거리를 두고 밖에서 야유하고 풍자하고 조롱하고 냉소하며 천연덕스럽게 잘 사는 사람도 있다. 특히 일본 지식인 중에 많다. 자신은 일본인이 아니라 세계시민이며 과거에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저지른 범죄는 내 소관이 아니라는 식이다. 맘은 편하다. 비겁자의 심리적인 도피다. 엘리트 지식인 중에 반노들이 이렇다. 정의당 지지자 행세를 하지만 도덕적 우위에 서기 위한 심리적인 회피기동에 불과하다.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고 그러는 것이다. 권력이 있는 노무현을 지지하면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심리적 이방인이 되면 편하다. 선비의 자세로 살아가기는 어렵다. 세상은 누구인가? 나와 무슨 관계인가? 분명히 해야 한다. 진리의 편, 역사의 편, 문명의 편, 진보의 편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촌수를 정해야 한다. 거기서 나의 캐릭터와 기믹이 나와주는 것이다. 캐릭터는 말하자면 자화상을 만드는 것이며 기믹은 자잘한 사회적 기술이다. 나는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사는가? 자신의 초상화를 벽에 걸어둔다고 치자. 그 모습은 선비의 모습인가, 장사치의 모습인가, 장군의 모습인가, 혁명가의 모습인가, 모험가의 모습인가, 예술가의 모습인가, 양아치의 모습인가? 그 모습을 마음 속에 그리는 것이 캐릭터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그 이미지와 맞게 결정해야 결과와 상관없이 이후 마음이 편안하다. 좋은 것을 좋다고 하고 예쁜 것을 예쁘다고 하려면 먼저 발언권을 얻어야 한다. 세상과 나의 촌수를 증명해야 발언권이 주어진다. 내가 외계인이라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좋은 것을 좋아할 이유도 없고 싫은 것을 싫어할 이유도 없다. 어차피 남의 일이다. 팔짱 끼고 구경만 하면 된다. 그러다가 죽어도 된다는 게 문제다. 깊은 허무를 극복할 수 없다. 사건의 연결이 끊긴다. 에너지가 고갈된다. 열정이 식는다. 분노도 없고 기쁨도 없다. 투명해진다. 바래어진다. 희미해진다. 망한다. 무엇이든 착수하려면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절차가 필요한 것이다. 세상과 나의 관계를 증명해야 에너지가 쏟아진다. 열정이 나와준다. 비로소 할 일에 착수할 수 있다. 그리고 발언할 수 있다. 주인이 된 권리가 있다. 기어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 세상의 일에 개입하고 가담하고 상관할 수 있다. 떳떳할 수 있다. 지구야 망하든 말든 크립톤 행성 출신 슈퍼맨이 이방인 주제에 나설 일은 아닌데 말이다. 자기규정이 필요하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둔감한 사람은 대충 살아도 된다. 사이코패스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예술가의 끼가 있는 사람이 작품활동을 하지 않으면 병난다. 술먹다가 죽는다. 마찬가지로 집단의 위기 감지에 특별히 예민한 사람이 세상과의 관계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병난다. 살아갈 수 없다. 많은 노빠들이 암 걸려서 죽은 게 이유가 있다. 무의식적인 책임감에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다. 신의 편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의 신을 말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신은 수염난 할아버지가 아니다. 그런데 말이다. 인간들은 왜 신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을까? 왜 다신교보다 일신교에 더 끌리는 것일까?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나약해서 마음의 의지대상이 필요하므로? 바보라서 목사나 스님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살아있는 권력자에게 힘을 몰아주다가는 일이 잘못되어 두들겨 맞는 수가 있지만 죽은 권력자는 안전하기 때문에? 신이라는 것은 따지면 원래 조상신이고 그게 죽은 권력자다. 내게 해꼬지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죽었으니까. 구조론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의 커다란 사건 속에 들어와 있다. 그 사건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른다. 일관성과 정통성과 계속성을 만들어낸다. 내밀한 족보가 작동하고 있다. 그게 없으면 중구난방 된다. 좋은 것을 좋다고 할 수 없고 싫은 것을 싫다고 할 수 없다. 애초에 크립톤 행성 출신인 당신은 지구의 일에 감놔라 배놔라 하고 나설 계제가 아니다. 지구는 남의 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을 믿는 이유는 죽음의 두려움 때문도, 마음의 의지대상이 필요해서도 아니고, 산 권력자는 귀찮게 하니까 대신 죽은 권력자가 만만해서도 아니다. 세상 모두가 연결되어 하나의 커다란 사건을 이루고 있으며 인간은 사건 속의 존재이며 의사결정은 연결의 중심에서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 별이 남의 별이 아니다. 여행자가 나침반으로 방향을 찾듯이 일관되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려면 모든 사건의 중심을 판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사건은 그 중심을 가리키고 한 방향으로 일제히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과 정치와 자본과 도덕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각개약진 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 하나의 수렴방향으로 간다. 큰 틀에서 보면 모두 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확산방향이 아닌 수렴방향이다. 개별적 사건은 더 큰 단위의 사건에 의해 의미부여된다. 개인의 사건은 가족이라는 사건 안에서 유의미하고 가족은 사회의 사건 안에서 유의미하고 사회의 사건은 인류의 진보라는 일대사건 안에서만 유의미하다. 당신이 결혼을 했다면 유의미한가? 가족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 자식도 없고 부모도 없고 친척도 없다면 결혼도 없다. 의미없다. 우주 안에 아담과 이브 둘만 산다면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아무 차이가 없다. 당신이 취직을 했다면 그것은 유의미한가? 당신이 성공을 했다면 그것이 유의미한가? 꽃이 예쁘다면 유의미한가? 가을 하늘이 맑고 높다면 그게 어째서? 오늘 유난히 밤안개가 자욱하다면 그래서 어쩌라고? 무슨 상관이람? 거기에 낭만이 있고 기쁨이 있는 것은 더 큰 단위 사건이 진작에 벌어져 있기 때문이다. 더 큰 사건 안에서 각자 정해진 위치와 임무가 있는 것이다. 큰 전쟁이 벌어져 있으므로 오늘의 작은 전투가 유의미하다. 큰 전략이 작동하므로 작은 전술이 유의미하다. 사건이 연결되어 가는 열차의 한 칸으로 내 존재가 있다. 다음 칸과 연결되어야 하기에 지금 당신의 존재가 있다. 한 페이지의 의미는 앞 페이지와 뒷 장을 연결하는데 있다. 내 페이지를 따로 떼어낼 수는 없다. 사건은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며 따로 떼어내는 순간 에너지원을 잃고 말라죽는다. 사건은 바로 붕괴된다.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가서 살 수 없듯이 말이다. 인간의 살아가는 의미는 사건의 부단한 연결에 있다. 그렇다면 삶의 궁극적인 에너지원이 되는 의사결정의 중심을 왜 신이라 불러야 하는가? 내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다른 단어를 생각해 봤는데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신의 이미지는 원래 종교의 교리와 무관하다. 인간의 사회성이 정답이다. 집단의 위기를 감지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에 인간이 종교를 믿고 신을 떠받드는 것이다. 나는 그런 본능이 없는뎅? 나는 집단이 망하든 말든 전혀 신경쓰지 않는뎅? 그렇다면 당신은 사이코패스다. 사이코패스와는 말하지 않는다. 종교가 교리를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원래 그런 본능이 있고 세상이 그 원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종교가 교리를 그리 맞춰낸 것이다. 일신교가 등장한 것은 그래야 집단의 의사결정이 수월하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유태인은 길목에 자리잡아 이집트와 로마와 페르시아에 침략당해 민족이 자주 흩어졌기 때문에 뭉치게 하는 일신교가 필요했다. 로마는 제국을 유지하려니 속주를 관리해야 하는 문제가 생겨서 이들을 묶어줄 장치로 일신교가 필요했고 아랍은 상인들이 장사를 하며 자꾸 돌아다니므로 결속장치로 일신교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회가 발달하고 문명이 고도화 될수록 일신교가 필요해진다. 원래부터 세상이 그런 원리로 돌아가므로 그게 필요해진 것이다. 인간이 정적인 존재라면 신은 없어도 된다. 동적인 존재라면 당신은 전진해야 한다. 전진하려면 길이 필요하다. 길이 있다면 지름길도 있다. 가장 빠른 길이 있다. 그 길을 찾지 않을 수 없다. 만약 길을 찾지 못하면 남들에게 뒤처지게 된다. 삶의 일관성을 담보할 의사결정의 중심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원래 있다. 부산이나 마산이나 목포나 순천에서 서울까지 가는데 가장 빠른 길은 있을까? 당연히 그것은 있다. 허둥대면 못 찾아간다. 앞에 가는 보트가 물살을 뒤로 밀어내기 때문이다. 가만있으면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게 아니고 어느새 대마도나 이어도까지 떠밀려가 있다. 다른 배가 물살을 일으켜 그대를 밀어내기 때문이다. |
"인간이 정적인 존재라면 신은 없어도 된다. 동적인 존재라면 당신은 전진해야 한다. 전진하려면 길이 필요하다. 길이 있다면 지름길도 있다. 가장 빠른 길이 있다. 그 길을 찾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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