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영훈이를 데리고 서울 노들역 본동초등학교 근처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만나러 갔습니다.
애가 긴장을 많이 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낯선 사람을 만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자기가 컴퓨터를
월등히 잘하는 것이 아니라서 창피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었지요.
집에서 나온지 2시간 반만에 오리님집에 도착했습니다. 만남을 주선하기 전에
오리님도 애한테 무슨 얘기를 해줘야 할지 걱정된다고 말했지만, 평소
말하기 즐겨하는 제가 적절히 질문과 재질문, 흐름 조정을 할테니 걱정 마시라고 했지요.
영훈이의 관심사는 게임 만들기인데 이 분은 게임제작쪽에 계신분은 아니라 약간 염려는 되었습니
다. 오리님은 교사인 저보다 너무나 편하게 영훈이를 대해줬고, 영훈이도 무려 2시간 20분간 대화동
안에 한 번도 자리를 뜨거나 딴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수업시간에 낙서하기, 중얼중얼대고 딴짓하기가 일상인 영훈이의 의외의 모습에 제가 놀랐습니다.
수학시간에 전체 동물의 1/2=소의 마릿수 1/3=말의 마릿수, 1/6 = 8마리(돼지의 마릿수)를 구하는 문
제를 기상천회하게 분모 3으로 통분하는 녀석. 1/2= 1.5/3, 1/6은 0.5/3으로 통분해서
1.5는 0.5의 세배이므로 8x3=24, 1은 0.5의 두배이므로 8x2=16 이렇게 푸는 녀석이었습니다.
수학을 풀되 교과서 방식이 아니고, 자기 방식대로 풀고, 풀이과정 2-3단계 과정은 그냥 생략하는
녀석이었죠. 물론 자기 식으로 풀다가 망한 적도 몇 번 있었어요. 비례식에서 외항의 곱과 내항의 곱
은 같다는 공식을 안외우고 분수로 되어 있는 비례식의 미지수항을 자기식으로 자연수배로 푸니
풀릴 턱이 없어서 시험때 15분 동안 매달리다가 엉엉 울던 녀석. 그러다가 2시간 후 언제 그랬느
냐는 듯히 해맑게 웃는 영훈이.
영훈이는 자기가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고, 오리님은 그 궁금증을 적절히 풀어주고 게임제작에 관한
책, 앞으로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줬습니다. 자기가 만든 플래시나 간단한 RPG게
임을 보여주고 조언도 들었습니다.
"게임 좀 제작할 줄 아는구나 하는 정도의 기술은 1년이면 배울 수 있단다. 하지만, 게임 제작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다양한 배경지식을 쌓는거란다. 역사, 신화, 박물관의 유물, 만화, 영화, 지리, 위인
전, 자연과학, 무기, 공학에 대한 지식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경험해보는 것이 필요해. 독서도 많이
해야 하고, 상상력을 키울 수 있도록 다양한 이야기도 생각해서 써보고...
"프로그램 제작의 기본은 수학이니까 수학을 열심히 하고, 훌륭한 프로그래머가 쓴 책 들 중에
외국책들이 많으니까 영어도 열심히 해야 해. 그리고 영어가 좀더 향상되고, 네가 궁금한 게 있으면
외국게임회사에 네가 만든 게임을 알릴 수도 있고, 나중에 실력이 향상되서 대학졸업후 그 회사에서
너를 뽑을 수도 있단다"
영훈이는 빨리 멋있게 게임을 제작하고 싶은 마음에, 3D기술같은 컴퓨터 프로그램 활용기술에만 너무
매달려서 게임에 대한 기반이 되는 외연을 소홀히 했던 점을 정확히 짚어주었습니다.
오리님은 영훈이 수준이 중학생 이상이고, 잠재력도 높다고 칭찬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노량진역에서 3000원어치 떡볶이+튀김+순대 세트를 사먹고 지하철타고 수원으로
내려왔습니다. 오며 가며 서있는 동안 영훈이가 피곤할 법도 했는데 전혀 피곤하다는 말을 안하더군
요.
영훈이 어머님 또한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영훈이가 너무 재밌었다고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무수한
얘기를 쏟아냈다고 합니다. 영훈이는 자기가 알아서 중학교는 용인의 기숙 대안중학교에 가겠다고
합니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직접 부모님과 방문도 하고 결정한 겁니다.
오늘 어머님과 전화를 하면서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영훈이는 컴퓨터를 잘 다루니 기술부분을 맡고, 재밌는 얘기를 잘 만들어내는 명은이가 스토리를,
만화를 실감나고 재밌게 그리는 강현이가 그림부분을, 과학, 문화와 역사에 관심이 많은 독서광 홍준
과 하경이가 제작과정에 자문위원으로, 그림과 글쓰기, 토의에 모두 능한 성하가 총감독을 맡게 하
고...
단순 플래시든, 단순 게임이든 자기들이 만들고 싶은 것을 친구들이 함께 협력해서 완성된 한가지
를 만들어서 성취감을 느끼고,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것은 아이들에게 정말 멋진 일이 될 것입니다.
일의 1사이클(동기부여-계획-실행-보상-수정 및 보완)을 경험하지 못하는 문제풀이식 시험은 인간의
능력을 제대로 향상시킬 수 없습니다. 이미 개요가 짜여져있고, 정답이 유도된 틀에 박힌 학습지는
애들에게 도움이 안되죠.
영훈이는 오리님께 명함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교류하기로 한 거죠.
"선생님은 어렵지만, 나는 막내 삼촌이라고 생각해, 프로그래머 동료라고 생각해도 좋고"
"네가 최고의 프로그래머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줄게. 열심히 한 번 잘해봐
나중에 잘되면, 아저씨랑 선생님한테 맛있는 거 사줘야 해~"
수원역에서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영훈이가 제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왜 컴퓨터를 잘 못해요?"
"마자. 나는 영훈이보다 컴퓨터를 잘 못해. 그래도 영훈이를 잘하는 사람이랑 연결시켜 줄 수 있으니
좋잖아. 잘하는 것은 남들이 못따라 올 정도로 잘하면 되고, 못하는 것은 남한테 피해 주지 않을 정도
로만 하면 돼"
사실 아이와 아이가 관심있어 하는 일의 전문가와의 만남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제의 경험은 저의 첫번째 실험이었고, 이제는 수원의 다양한 직업단체군을 조사해서
아이와 해당 일의 전문가를 연계에서 그 직업에 대한 실제적인 이해를 돕고, 그 직업이 정말 아이가
하고 싶어하는 직업인지, 그렇다면 그 직업의 일을 하기 위해선 어떤 과정과 준비가 필요한지 경험할
수 있게 하려고 합니다.
초등교육 함께해요 카페에 올라왔던 어떤 선생님의 글이 아직도 떠오릅니다.
"Y대 사회계열을 다니다 교대에 와서...현장에 오니 교감이 쪼고, 별로 일이 만족스럽지 않다...
대학생 경제 경시대회 입상, 대단히 높은 토익 토플 점수 확보...
행정고시? 로스쿨? 의대? 어떤 선택을 해야 좋겠는지 조언 부탁드려요"
십수개의 리플이 달렸었는데 맨 아래 한가지 리플이 내맘과 똑같았다.
"선생님은 그 능력에 정작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있다,
선생님이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부터 고민해 보시고 결정하시라"
정말 공감가는 말이었습니다.
공부를 잘할수록 자기가 뭘 잘하고 뭘 좋아하는지도 몰라요.
글을 써도 선생님 보기 좋은 글, 발표를 해도 교과서적인 대답, 단지 남보다 성적이 우수하고,
부모님이 칭찬과 외적인 보상을 해주는 것에 만족하는 성적 우수아.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위와 같은 고민을 하는 이직 고려 선생님이 나오는 것이죠.
아이가 진정 자신의 잠재력을 계발 할 수 있도록 옆에서 기회를 제공하고 바람을 넣어주는 것.
그것이 교사가 해야할 중요한 책무이고, 대졸자 학부모와 수십만원짜리 학원이 못했던 것을
해내는 실질적 전문성일 것입니다.
저도 얼마전 문화재전문가가 되고 싶어하는 여고생 한명을 문화재청에 근무하는 분과 연결시켜 준 적이 있지요. 기성세대로서.. 사회에 먼저 나온 사람으로서... 아이들의 자기길 찾기를 거들어 줄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참 즐겁더라구요. 내가 하는일의 보람도 느끼게 되고.....아일랜드에는 transition year 이라고 대학입학전에 자기 진로를 탐색하고 사회체험을 해보는 1년간의 시기가 있다하더라구요. 우리아이들에게도 그런시기가 주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무언가가 좋아하는게 있는 아이들은 다행인거지요.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무엇을 잘하는지도 모르면서 어른이 되고 그냥 남들이 괜찮다 하는 길을 가기위해 모든걸 거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요즘 일때문에 대학생들을 만날일들도 꽤 많은데... 그때마다 그들에게 무슨말을 해줘야할지... .남들이 가보지 않은곳을 가보고.... 그래도 살만하더라.... 이런 삶의 방식도 괜찮더라라고.... 말해줄 수 있었으면 싶은데.... 사실 제가 그렇게 살아온 사람도 아니면서 진지하게 길을 묻는 아이들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기란 참 난감한 일이지요.
어떤 나라에선 아이들이 자신의 잠재력에 눈 뜨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자신이 뭘하고 싶은지 분명히 안다는 것은 더욱 위험한 것입니다. 선배나 부모나 교사나 국가가 감당하지 못할 것과 만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어른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매우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박에 모든 걸 알아버리는 녀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삶을 감춥니다. 보여 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게 되지요.
그러니 더욱 현장을 불시에 덮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꾸미지 않은 실무자를 직접만나는 것이 귀합니요. 그런 만남은 사람을 긴장시킵니다. 자주 오지 않는 어쩌면 지금이 아니면 영영 없을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에 온 신경이 반응을 하는 거지요.
원래 직업이란 것이 권력자들이 착취를 위해 고안해 낸 것이 발달을 거듭한 것인데, 한국은 식민화와 산업화가 동시에 진행된 까닭에 식민지배의 유지의 핵심계층인 관리계층이 비대하게 권력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일부 세계시장과 직접 연결된 직업군이 아닌 다음에는 관리하는 일반사무직군이 자금과 인력과 정보를 독점하고 있습니다. 중딩만 되도 직감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아는 녀석들이 나오지요. 계획은 졸업만 하자 정도로 세우고 막살거나, 열심히 공부해서 "사"자 붙는 직군이나, 5급공무원 준비로 인생을 맞추고 진로 고민은 접습니다.
흔들어야 합니다. 헛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줘야 합니다. 헛 살아아도 인생이 금방 끝난다는 것을 일러줘야 합니다. 스승들의 몫이나 그 몫을 감당하려는 이들은 뵈질 않는 엄혹한 시절입니다.
이상우 선생님께서 현장에서 노력하시고, 그 땀내 베인 분투기가 인터넷이 올려진다는 것이 참 좋습니다. 이런 나라에 살아도 결말이 전혀 다른 꿈을 꿀 수 있게 해 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