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란 무엇인가?
(다른 게시판에 리플로 쓴 글을 내용추가해서 올립니다.)
화두, 공안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 리 없다. 이런 이야기 스님이 들으면 골 나겠지만 그건 스님들의 종교적 입장에 불과하다. 하여간 이곳은 대한민국 0.0001프로의 좀 아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까 까놓고 말하기다.
화두 공안! 그거 백날 붙잡고 있어봐야 아무런 소득이 없다. 대개는 그렇다. 아 뭐 그렇다고 해서 전혀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게 깨달음의 본질이 아니라는 말일 뿐. 아! 빗나간 거다. 과녁이.
원래 진리란 것은 ‘통’하는 것이어서 되면 1초만에 되고, 안 되면 영 안 되는 거다. 1초만에 되면 스님들이 하안거다 동안거다 하여 선방에 몇 달씩 틀어박힐 이유가 없고, 1초 만에 안 되면 더 기대할 필요가 없다. 육조 혜능은 2초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바로 나왔다. 나 또한 화두, 공안에 재미를 붙였던 때가 있었다. 너무 쉽게 깨져서 싱거웠을 뿐. 병안의 새 이야기는 그 중에서 내가 좋아했던 거. 뭐 깨닫겠다는 야심이 있었던게 아니고 상당히 재미있다. 시간 가는줄 모른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내가 스님도 아니었고, 학생이었을 뿐인데 대여섯시간씩 꼼짝않고 있어도 즐겁기만 했다. 터져 나오는 기쁨. 그래서 그랬던 거고. 하긴 나야 공안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도 10여년 동안 줄곧 생각했었지만.
각설하고 본론으로 돌아와서, 결국 달마조사가 강조한 바 선종의 종지가 되는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이 핵심이고, 그 1700 공안이라는 것은 그것을 증거할 요량으로, 여러 잡다한 사례를 수집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본질은 ‘염화미소 이심전심’이고, 이것이 선의 궁극적인 출발점이며, 혜능의 육조단경이 그 구체적인 전개이며, 그 중핵은 심(心)이고, 심은 마음이 아니라 구조론의 심과 날 갖춤이다. 완전성을 의미한다. 대승경전에서 심(心)자가 들어가는 모든 단어를 ‘완전성’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놓으면 한결 의미가 통한다. 그리고 그 완전성이 ‘소통의 완전성’을 의미한다는 사실까지 진도를 나가주면 더욱 좋다.
심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면 90프로 나온 거다. 만가지 오류는 석봉 천자문에 심을 ‘마음심’이라고 써놓은데서 빚어진 거. 그게 착각이다. 마음이 그 마음이 아니다. 정신차리기다.
1700공안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어떤 상황에서, 우연히, 찰나에, 그야말로 한 순간에 문득, 불현듯이 방아쇠가 격발되었다는 것이며, 이는 주어진 상황 안에서의 소통을 의미하고, 그 소통을 담보할 토대로서의 심은 이미 나의 내부에 완전성의 형태로 갖추어져 있었다는 거다. 그러니 구태여 깨달으려 할 필요도 없다. 그냥 방아쇠를 당겨주면 된다.
1) 원리가 있으며 ≫ 원리는 금강경에 다 나옴. 2) 그 원리는 소통의 원리인 것이며 ≫ 염화미소, 이심전심. 3) 소통은 환경 안에서 완전성(心)과 완전성(心)의 감응이며 ≫ 달마조사의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 4) 그 수행법은 마음이 일어나는 경로를 따라 내 안의 완전성을 포착하는 것이며 ≫ 육조 혜능의 육조단경 반야품 (我本元自性淸淨 若識自心見性 皆成佛道) 5) 방아쇠가 격발된 실제의 사례들은 ≫ 1700 공안, 화두
그러나 방아쇠를 조낸 들고 주물럭거리고 있다고 해서 격발될 리가 없다. 총이 없고 과녁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이게 이렇게 된 것이 깨달음은 원리를 깨닫는건데 원리는 금강경에 다 나오니까 뭐 그건 다 해결된 거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어떻게 해야 부처가 되냐고? 아 누가 부처된대? 뭐 이건 종교인들이 고민할 사항이고.
간단하다. 금강경에 답이 다 나오는데 뭘 더 말이 많아? 아 부처 되고 싶다고! 아 부처 되시라고. 아 누가 되지 말라고 했남? 아 금강경 읽고 부처되시게. 어서 어서 되시게. 뭐하나 얼렁 부처 안되고? 엥?
이런 곤란한 사항이 생긴데서 이야기가 시작된거 아니겠는가? 하여간 부처되실 분은 금강경을 냠냠 씹어드시고. 이곳은 구조론연구소라 부처되는 곳이 아니니 죽어도 부처되실 분은 여기서 그만 퇴장해 주시고. 깨달음은 뭐가 되고 싶다고 되고 그런 것이 아니다.
문제가 있고, 문제는 해결되어야 하며,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너는 깨달았느냐?'고 물으면 안 되고 '당신은 문제를 해결했느냐?'고 말해야 진실에 가깝다.
여기서 문제를 해결한다 함은 대개 번뇌의 해결을 의미하는데 그건 소승적 태도이고, 구조론의 관점으로 말하면 깨달음의 의미는 더욱 넓다. 신의 완전성과의 소통이다. 말하자면 불교의 깨달음은 고장난 컴퓨터를 고치는 것과 같으며, 구조론의 깨달음은 문제가 있을 때 네트워크에 저장된 지식풀에서 답을 조달함과 같다. 그 네트워크와 통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와이파이를 신청하면 된다.
지난번 글에서 이야기 했듯이 진정한 학자는 진리를 반듯한 제 모습으로 진리되게 하는데 의의를 두는 것이지, 내가 조낸 뭔가 되고 싶다거나 하는게 아니다. 되긴 뭘 돼? 개는 깨달아도 깨달은 개가 될 뿐이다. 소는 깨달아도 깨달은 소가 될 뿐이다. 인간은 죽었다 깨나도 인간 아닌 그 무엇이 될 수 없다. 본래의 완전성을 회복하는 거지 뾰로롱 변신 세일러문 수리수리 얍! 이런건 아니다.
호두를 깨뜨리면 호두알이 나오는 이유는 깨뜨렸기 때문이 아니고 그것이 호두이기 때문이며,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오는 것은 심었기 때문이 아니고 그 곳이 밭이기 때문이다. 화두, 공안에 집착하는 것은 위 1), 2), 3), 4), 5)번으로 써놓은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남이 호두알을 깨뜨려서 호두를 취하니 나는 아무러나 기왓장이나 사금파리라도 하나 깨뜨려볼까 하는 것이며, 남이 밭에다 씨앗을 심어 싹을 취하니 나는 콘크리트나 아스팔트에다가 동전이라도 심어서 돈이 열리는지 볼까 하는 수작이며 그게 다 뻘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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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하나다. 첫째 매우 재미있기 때문이다. 이건 필자의 경험이다. 시간 가는줄 모른다. 똥꼬가 뻑적지근한 쾌감을 얻는다. 근데 안 그런 사람도 있다더라. 둘째 효과가 좋기 때문이다. 이건 간화선을 통하여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실제로 그 숫자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즉 실제로 효과가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에 간화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간화선의 수행법은 육조 혜능의 가르침을 따라 ◎ 마음이 일어나는 경로를 따라 내 안의 완전성을 포착하는 것(我本元自性淸淨 若識自心見性 皆成佛道)◎이라고 내가 써놓기는 했지만 구조론 미학원리의 성≫주≫미≫선≫진 원리에 따라, ‘생각해야 깨닫는다’가 아니고 ‘깨달아야 생각한다’는데 있다.
1700 공안이라는 것이 대부분 스님의 일화인데 그것은 ‘사건’으로 되어 있다. 그 사건에는 액션이 들어간다. 실천이다. 행동이다. 이게 중요한 거다. 구조론이 늘 강조하는 바와 같다. 자전거를 타야 균형이 잡히고, 헤엄을 쳐야 물에 뜬다. 순서가 반대다. 그러므로 그냥 화두를 든다는 것은 일단 물에 뜨고 난 다음에 헤엄치려는 것과 같아서 시간낭비일 뿐이다. 그거 안 된다.
정작 1700가지 깨달음의 사례에서 가만이 앉아 화두를 든 사례는 없다. 1700가지 깨달음은 모두 현장에서, 극적인 마주침에서, 액션에서, 실천에서, 행동에서 찰나에 방아쇠가 당겨져서 얻어졌다. 그 마주침의 찰나에 내 마음이 일어나는 경로가 포착된 거다. 그러므로 화두를 들고 앉아있는 것은 1700공안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공안을 든다면서 공안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행동한대서야 말이나 되는가?
깨달음은 마음이 일어나는 경로를 관찰하는 데서 얻어지며, 그 마음은 현장에서의 극적인 마주침에 따른 구체적 액션에서 일어난다. 그 액션은 소통의 액션이다. 소통은 환경과의 극적인 조우다. 환경과의 극적인 조우 없이, 소통의 액션을 취하지 않고, 그냥 장판에 궁뎅이가 눌어붙도록 구들장만 짊어지고 앉아 있어서 깨달을 가능성은 없다.
결론적으로 깨달음은 소통의 깨달음, 완전성의 깨달음이며, 마주침의 현장에서 마음이 일어나는 경로의 깨달음이며, 그 완전성은 자동차를 열심히 조립한다고 되는게 아니고, 그 자동차에 승객을 태워 운행해야 얻어진다. 그러므로 덜 조립된 자동차라도 일단 현장에서 운행해봐야 한다. 즉 현장에서 타인과 소통해봐야 소통이 일어나는 경로가 포착되는 것이다. 우주는 완전한(心) 것과 완전한(心) 것이 만나 더 큰 층위의 완전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며, 그 더 큰 단계의 완전성은 성≫주≫미≫선≫진 의 전개원리에 따라 나와 마주치기 전에 이미 우주적으로 구축되어 있었던 것이며 그것을 깨닫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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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추가해놨소.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들을 것이오.
이글을 읽고나니 흠...명쾌합니다.
내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하는 생각도 들고...글 괜히 썼다는 생각도 들고....하하^^
화두를 하나의 사건으로 시간단위로 재구성해본다면...
화두는 이미 현장에서 마주친 것을 개념지어보니 천칠백 공안에 별로 비껴가는 것이 없기에 그 공안의 하나를 취한다는 생각이 들구요.
현장에서 이미 문제를 마주쳤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나, 그것은 문제인식에 가깝다고 생각되구요.
그 개념지어진 화두를 들고 앉아있는 것은 마음의 경로를 보기 위함인 것 같고,
아! 이거다! 란 마음이 들지 않기에 끝까지 밀어부쳐보는 것이나... 그 과정에서도 다시 환경과의 조우는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현장에서 취해진 화두(문제인식)를 개념지어 구체화하고 다시 극적인 마주침과 조우해야 방아쇠가 당겨진다(문제해결).
<문제인식> 현장- 사건 -마주침- 행동-실천
<문제해결> 개념화 - 구체화 - 나와 환경과의 극적인 만남 - 방아쇠 당겨짐
= 자기스타일 완성
물론 현장에서 바로 극적인 마주침에 의해 깨달은 사람도 있지만은요.
문제인식이> 문제해결보다 선행하고, 사건이 >결과보다 선행한다.
화두참선의 문제는 현장에서 취해진 것이 무엇인가? 즉 그것이 그토록 간절한 것이었는가? 혹은 그것이 마음에 울림을 주는 것인가?
그러한 것을 화두로 취하는냐 취하지 못하느냐, 그러니까 직접 자기안에서 그 무엇이 현장에서 제대로 감흡했는가? 아닌가? 에 따라서 화두타파여부는 결정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변화된 환경도 고려해야 하구요. 이 시대에 맞는 문제인식을 해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구요.
모든 자신들의 문제도 일종의 이런 맥락을 따른다는 것이구요.
진행방향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지 그것에 매달린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구요.
아... 이렇게 통쾌한, 명쾌한 글이 있을 수 있을까?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입니다.
한국에 김동렬님이 있습니다그려!
곧 이 땅에 문화 르네상스가 올 날이 임박했군요.^^
동안거 하안거 그거 참 부러웠다오. 아무일도 안하고 휴식만해도 되는 특혜받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일종의 특권층의 일이니말이요.
위빠사나던 간화선이던 뭐던 다 아주 좋은 휴식이므로 자주기회 같는것이 좋다고 사료되는 1인. 사고칠 시간을 줄인다는데도 큰 의미가 있소.
다만 거서 뭐 찾으려른 사람은 그냥 계곡텐트치고 능선마다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가끔 뱀도 만나고 그런게 훨 좋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