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예(六藝)라고 하면 중국의 전통 교과목이라 하겠는데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가 있었다고. 네번째 어(御)라는 군주의 마차를 모는 마부이든가 그렇다고, 또 공자가 원래는 마부를 지망했을 뿐 아니라, 활도 좀 쏘고 무술을 제법 했다던데, 당시만 해도 사(士)라는 것은 당연히 무사를 의미했더라고.. 이게 뭐 김용옥 강의에서 나왔던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것다.
하여간 당시의 교육제도에 문과와 무과 따위가 있었을 리 없으니 그냥 군주의 시중을 드는 졸개로서 필수 과목이 예, 악, 사, 어, 서, 수라 하여, 걍 임금이 원하는대로 대청마루 밑에 내려서서 언제든지 부르면 달려갈 태세로 공손히 두 손을 모아 읍하고 서 있으며 예(禮)를 지키고, 또 임금이 심심하다 하면 거문고라도 꺼내와서 악(樂)을 연주해 즐겁게 해 주고, 만약 적이라도 나타나면 사(射)로 물리치고, 한편 수시로 마차를 몰아 어(御)를 행하고, 또 비서 역할로 서(書)를 행하고, 경리 역할로 수(數)도 챙기고 그랬을 터이다.
무슨 교과목 따위가 있었을 거 같지는 않고, 그냥 종합적으로 비서, 졸개, 부하 역할을 해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어(御)와 사(射)였을 것이다. 운전기사 겸 경호원 말이다. 그게 그냥 꼬봉이다. 따까리, 당번병 뭐 이런 거다. 덴장할.
공자가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악기(樂記), 역경(易經), 춘추(春秋)를 지어 역시 육예로 되었으니 운전기사, 경호원 이런건 쪽팔리다고 빼고, 대신 점(역경, 易經)도 좀 봐주고, 족보(춘추, 春秋)도 챙기고 해서 격이 떨어진다 싶은 운전기사, 경호원, 경리 일을 빼고 대신으로 비서, 점쟁이, 계관시인 역할을 강조한 거다.
결론적으로 주나라의 육예든, 공자의 육예든 결국 임금을 모시는데 필요한 교양 정도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건 굉장히 실용적인 거다. 서구의 소크라테스가 시장거리를 헤매이며 제자라도 하나 얻어걸려 보려고 ‘혹시 도에 관심있습니까?’ 하는 격으로, 공연히 지나가는 사람 소매를 붙잡고 ‘혹시 철학에 관심있으시면 나를 따라오심이 어쩔랑가요!?’ 하며 혹 뿌리치고 가면 ‘너는 무지해. 너는 니가 무지하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무지하다고, 무지의 지를 알아야만 한다고!’하여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며 한바탕 쏘아붙여주는 것으로 분풀이를 하였거나 말았거나 하여간 길거리에서 서성대며 산파법의 초식을 구사하곤 하였다 하니 어찌 처량맞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중국은 넓고 임금은 많았다. 그때는 뭐 중원에 크고 작은 나라가 백개쯤 있었으니 개나 소나 다 임금이라 하여 신하살이 하기는 누워 떡먹기보다 쉬웠으니, 그 많은 나라들 중에서 섬길만한 임금을 찾아내지 못한 공자도 성깔은 있었다고 봐야 하는 거다. 그래도 공자는 십여명의 제자를 거두었으니, 하여간 그리스에 나라는 작고 임금은 씨가 말라서 스파르타에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 귀족집 자제 플라톤 하나 고작 얻어걸린 소크라테스 보다는 그래도 형편이 나았던 거다. (플라톤 외에도 매국노 자제로 얼떨리우스 몇이 더 있었겠으나.)
뭐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건 아니고. 하여간 아리스토텔레스가 신학, 수학, 형이상학, 정치학, 윤리학, 수사학, 시학 따위를 분류한 것은 학문 그 자체를 주체적 존재로 보고 접근한 것이다. 즉 인간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학문의 나무가 있으며 그 학문이라는 바퀴벌레가 왕성학 식욕을 가지고 인류의 지식을 먹어치워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그리스 하늘에 검은 구름을 드리웠던 것이다.
중국은 딴판이다. 학문을 주체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고 철저하게 대상화 시켜서 ‘뭐 써먹을 데가 있나?’ 하는 판이니 그들의 관심은 학문을 위해 학문을 하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학자가 아니라 끝내 임금의 비서나 경호원, 심부름꾼 따위의 기능적 관심사였다.
무엇인가? 6예 중에 예(禮), 악(樂)이 앞에 온다. 공자의 시경(詩經), 악기(樂記), 예기(禮記), 역경(易經)도 그렇고. 이게 다 미학이고 예술이라는 거다. 학문을 주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것은 서구였지만, 미(美)를 주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것은 동양이었다. 서구의 미는 철저히 기능적 관심사여서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거다. 다시 말해서 서구의 경우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는 기술로서 학문이 있고 미(美)라는 것은 그 인간이 자연을 통제한 결과물로서 건물을 건축하면 그 마감재 정도 되는 것이었다. 집을 지으려면 먼저 수학자가 땅에 먹줄을 놓고 다음 건축가가 돌을 쪼아 뼈대를 세우고, 미술가는 맨 나중에 와서 뺑끼칠을 놓고 가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의 예, 악은 좀 다르다. 특히 공자의 역경(易經)이라는 것은 점치는 기술이면서, 동시에 처세술이며, 예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예를 지키려면 함부로 나서면 안 되고, 너무 뒤로 빼고 숨어도 안 되며, 타이밍을 잘 맞추어 나서고 물러서야 하는데, 그 타이밍을 정하는 기술을 중용이니 뭐니 하였던 것이고, 그 원리를 4계절의 운행과 별자리의 운행에서 찾았으니, 곧 하늘의 원형이정이 되고 인간에게는 인의예지가 되어 희노애락애오욕을 뒷받침 하는 형태로 전개하여 가는 것이며, 그 안에 다 미가 갖추어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美)라는 것은 졸개가 군주 앞에서 함부로 나대다가 목에 칼이 떨어지는 수가 있으므로 조신하게 행세하되, 너무 뒤로 빼도 안 되고 너무 나대어도 안 되는 것이며, 음양의 이치와 4계절의 이치에 맞게 인의예지를 운행하여 희노애락애오욕을 통제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동양이 추구하는 미(美)의 경지다. 공자가 악(樂)을 연구한 것도 다만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만물의 조화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당시만 해도 악이라는 것은 귀신을 홀리는게 주목적이었으니 특히 제사때(무당의 자식이었던 공자의 직업은 일당받고 남의 집 제사 집전하여 주는 사회자.) 악을 행하여 귀신을 통제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여기에 노자, 장자의 자연주의 사상이 더해지고, 죽림칠현이 시범을 보이고, 남조문화가 꽃을 피우고, 소동파가 다시 전범을 행하였으니 동양에서 미(美)라는 것은 하늘의 법칙과 인간의 법칙을 연동시키는 것이었다. 임금을 하늘에 비유하여 천자라 하였으니 임금이 한번 골이 나면 마른 하늘에 곽제 벼락이 치고, 먹구름이 끼고, 소나기가 퍼붓는 형세라, 한 여름에 서리가 내리는게 예사 일이라, 또한 선비가 악(樂)을 연주하고 예(禮)를 행하여 그 하늘(사실은 임금)의 노기를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즉 미라는 것은 하늘과 통하는 열쇠 같은 것이어서 그 이론은 주역에 있고, 그 매뉴얼은 시경에 있으며, 그 기법은 악기(樂記)에 있고, 그 프로그램은 춘추(春秋)에 있는 것이어서, 실상 모든 학문이 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곧 미(美)는 인간이 하늘과 소통하는 통로 같은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군자는 그 미의 정수를 체화하여 미와 혼연일체가 되어야 하였던 것이니 이를 도학(道學)이라 하여 양반은 걸음을 걸어도 팔자걸음으로 걷고, 소나기가 쏟아져도 종종걸음은 사양하며, 도포자락 휘날리고, 수시로 에헴하고 목에 힘을 주었으니 그것이 다 내 안에 미(美)가 허벌나게 쌓였수다 하고 증거를 대려는 수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하여 안동 양반은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고 앉았어도 결코 버선을 벗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행여나 몸 안에 쟁여둔 미(美)가 바지가랑이 사이로 도망가기라도 할새라 대님으로 꽁꽁 묶어두었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미란 인간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말초적인 수단이 아니라, 멀리 하늘과 통하는 이치이며, 한편으로 귀신을 다루는 이치이며, 한편으로 삶 그 자체의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였던 것이니, 이는 서양이 미를 말초적으로 대상화 시켜 보는 바와 달랐던 것이다. 즉 동양은 미를 주체적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서양이 학문을 주체적으로 보고 동양이 학문을 대상화 시켜 보는 바와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서양이 학문을 주(主)로 하니 미가 종(從)으로 되고, 동양이 미를 주로 하니 학문이 종으로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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