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기계다. 입력이 있으면 출력이 있다.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하게 반응한다. 인간은 단순히 했던 짓을 반복할 뿐이다.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는 이전에도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것을 할 수 있고 또 그것을 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의지, 신념, 야망, 탐욕, 희망 따위는 그냥 하는 말에 불과하다. 인간은 행동에 말을 맞추는 존재다. 인지부조화다. 이솝우화의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와 같다. 야망, 신념, 희망, 탐욕, 의지 따위는 장식용 레토릭에 다름 아니다. 일단 저질러놓고 그렇게 변명하는 것이다. 태극기 할배들이 노상 애국타령을 하지만 사실 그들은 저지르고 싶은 것이다. 촛불집회 여파에 우연히 기회를 잡았다. 입으로 떠드는 명분은 홍보용이고 단지 집회를 하고 싶은 거다. 세 과시하고 위세 부리고 싶은데 그동안은 안되니까 못한 거고 지금은 되니까 하는 거다. 되는 이유는 해봤기 때문이다. 촛불 보고 기술 배웠다. 계기가 주어지고 능력이 되면 하는 것이고 명분은 적당히 꾸며내면 된다. 언제나 그렇듯이 진실은 불편하고 거짓은 편안하다. 그래서 인지부조화다. 행동이 앞서는데 행동은 기계와 같아 자유의지가 없다. 이렇게 말하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부정되는 셈이다. 성격 탓이나 날씨 탓이나 기분 탓으로 인간의 대응이 때와 장소에 따라 약간의 변덕을 부릴 수 있지만 큰 의미는 없다. 인간은 개미처럼 단순한 동물이다. 의지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게 아니라 호르몬에 따라 기계적으로 반응한다. 그런데 개미도 인간처럼 스트레스받을까? 물론 스트레스는 있다. 그러나 여왕개미의 실종에 스트레스받을 뿐 병정개미는 죽음 앞에서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그래서 싸우다가 죽는 것이다. 여왕개미를 제거하면 대부분의 개미가 스트레스를 받아 일주일을 못 넘기고 죽는다고 한다. 무엇인가? 개미가 자신의 죽음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데 여왕개미의 실종사태는 혼란에 빠져 크게 스트레스받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자유의지가 있는 이유는 인간이 행동을 앞두고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도 없다. 왜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을까? 하나의 행동이 다른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여파가 있기 때문이다. 사건의 다음 단계와 그 다음다음 단계까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스트레스받는 것이며 스트레스를 받은 이유는 그 사건에 연동된 다른 사건까지 내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며 책임과 자유는 같다. 책임이 있으므로 자유가 있다. 아이를 한 대 때리면 재미가 있다. 그래서 한 대를 때린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자라서 손자를 때린다. 아버지에게 매 맞고 자란 아이는 자기 아이에게 매질하는 폭력아빠가 된다. 내가 내 아들을 때렸는데 할아버지 잘못 만난 손자가 벌을 받는다면 이상하다. 그 때문에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아들을 한 대 때려놓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된다. 그런데 손자에게는 사과할 기회가 없다. 그전에 죽는다. 그래서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며 그 때문에 행동에 책임을 지게 되고 따라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 거다. 세상은 물질 알갱이가 아니라 사건의 연결이다. 물질은 낱낱이 독립되어 있지만 사건은 모두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다. 팽팽한 것이 스트레스다.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에 영향을 미친다. 잘못 구매한 제품은 반품하면 되지만 많은 경우 되물릴 수 없다. 한 번 태어나면 그만이다. 이 생은 반품할 테니 다음 생은 미남에 똑똑한 머리로 태어나게 해줘. 그런 거 없다. 삶과 죽음을 반품할 수는 없다. 피부색과 성별과 지능과 외모를 반품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책임이 있는 것이고 책임이 있는 만큼 스트레스가 있는 것이며 의사결정을 앞두고 편안한 거짓과 불편한 진실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만약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범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범죄자는 불운했던 것이다. 단지 나쁜 유전자와 나쁜 환경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이코패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정신병자를 처벌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역시 불운한 탓이다. 반대로 책임지고 스트레스받는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다. 인생은 게임이다. 게임종목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 각별하다. 기계와 같은 것은 게임 시작 후다. 게임이 시작되면 정신없이 패스가 거듭된다. 훈련한 만큼 기량이 나온다. 선택할 수 없다. 실력이 없는 한국 국대가 브라질 팀을 이기는 선택을 할 수는 없다. 무조건 지는 거다. 상황에 등을 떠밀려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그 상황에서 선택했다면 그게 승부조작이다. 게임 안에서는 거의 기계적으로 작동한다. 다만 사전에 게임 종목을 선택할 수 있다. 축구로 안 되면 야구를 하면 된다. 야구로는 국대로 브라질 팀을 이길 수 있다. 버스로 갈 것인지 경운기 타고 갈 것인지 비행기로 갈 것인지를 인간은 선택할 수 있다. 빨대를 꽂을 인생의 에너지원을 바꿀 수 있다. 운명적인 만남의 대상을 바꿀 수 있다. 어느 진영에 가담할지 선택할 수 있다. 결혼하여 가족을 선택할 수 있다. 이혼을 선택해도 된다. 이민을 가서 국적을 바꿀 수도 있다. 피부색을 바꿀 수는 없지만 성형수술은 가능하다. 요즘은 개명신청도 가능하다. 세상은 사건이며 사건은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어떤 사건에 가담할지 각자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스트레스받는다. 많은 노빠들이 암으로 죽었다. 스트레스를 받은 거다. 커다란 에너지를 가졌다면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가 있다. 작은 민주당 게임이 아니라 큰 인류의 게임에 가담하기다. 21세기의 초연결 시대의 새로운 게임에 가담하기다. 책임지면서 훌륭하게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다. 자유의지를 실현하면서도 게임에 이길 수가 있다. 작은 게임에 매몰되므로 괴로운 것이다. 큰 에너지 흐름에 가담하여 종목을 바꾸고 만남을 바꾸고 게임을 바꾸고 전략을 바꿔야 이긴다. |
"작은 게임에 매몰되므로 괴로운 것이다. 큰 에너지 흐름에 가담하여 종목을 바꾸고 만남을 바꾸고 게임을 바꾸고 전략을 바꿔야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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