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에게 일기를 쓰라고 하면 무심코 자기소개를 하게 된다. ‘나는 오늘’로 첫 문장을 시작하여 주로 무언가를 깨뜨리고 반성한다는 내용을 쓴다. 오늘은 화분을 깨고 내일은 접시를 깬다. 오늘은 할머니에게 꾸지람을 듣고 내일은 어머니에게 꾸지람을 듣는다. 다시는 사고를 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마무리한다. 선생님이 일기를 본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뇌에서 이미 상당부분 결정해놓고 있다. 그 부분은 무의식이다. 뇌에서 제멋대로 자리 깔고 식탁을 차려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채지 못한다. 슈퍼 히어로가 있으면 슈퍼 빌런도 있어야 한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다. 타인에게 말을 거는 장치가 된다. 빌런은 히어로의 활동을 정당화시켜주는 존재다. 거기에 대칭구조가 작동하고 있다. 초딩일기의 공식인 잘못과 반성도 대칭을 써서 타인에게 말을 거는 장치다. 일기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닌데도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한다. 왜?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왜 일기를 쓰는가? 계획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다. 과거를 기록하는 것은 미래를 대비하는 장치다. 그 미래의 계획이 없기 때문에 과거를 기록할 이유가 없다. 일기를 쓸 이유가 없는데 억지로 쓰게 하니 거짓말을 쓰는 것이다. 도구가 있어야 한다. 미래의 계획이 있어야 한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다음 전투에 대비하는 장치다. 무엇을 기록할건지 청사진이 펼쳐진다. 도구가 있어야 한다. 도구는 주체와 대상을 통일하는 장치다. 포수는 소총으로 겨냥한다. 도구가 있다. 총을 쥐고 있다. 운전기사는 자동차가 있다. 핸들을 쥐고 있는 것이다. 타겟이 움직이면 총구가 따라서 움직인다. 연동되는 것이다. 자신은 축을 틀어쥐고 표적을 지배할 수가 있다. 핸들을 쥐고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이때 소총 안에서 모두 해결된다. 가늠자와 가늠쇠의 대칭 사이에서 해결된다. 핸들과 도로의 대칭 사이에서 해결된다. 이렇게 대칭구조가 닫힌계 안으로 들어와 야 한다. 메커니즘을 시스템이 덮어씌워야 한다. 그런 구조가 없으면 무의식적인 자기소개 행동을 하게 된다. 대칭이 없으므로 대칭을 만들려고 하는 거다. 상대방의 행동에 따라 내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운명을 상대방의 판단에 맡기는 바보짓이다. 구조론에서 하지 말라고 하는 자기소개, 대상화, 타자화, 대칭행동, 흑백논리, 이원론, 이분법적 사고, 귀납적 사고의 오류는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이미 중딩을 넘었는데도 여전히 초딩일기를 쓴다면 한심하다. 3분만 대화해 보면 그 사람의 수준을 알수 있다. 초딩일기식 어법을 구사하는 사람은 지식인의 대화상대가 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보나마나 일베충일테니 피해야 한다. 지식인 흉내를 내야 지식인이 된다. 지식인은 툴에 맞추어 사고한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말하지 않는다. 큰스님과 동자의 선문답 대결이라고 치자. 동자가 어떤 대답을 하든 큰스님의 할과 방은 사정없이 날아든다. 이때 스님은 제자의 대답을 예측하고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다. 즉 계획을 세우고 덫을 놓고 밑밥을 깔고 미늘을 박아둔 것이다. 어떻게 대답하든 무조건 깨지게 되어 있다. 올가미에 걸려버린 거다. 질문에 답하는 자의 포지션에 서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자신이 질문해야 올가미를 피할 수 있다. 그러려면 역시 도구를 써야 한다. 스님의 도구는 뻔하다. 관점을 비트는 것이다. 문답구조의 포지셔닝에 갇혀 있다는 점을 찌르는 것이다. 질문과 대답이라는 대칭구조를 타파하지 않으면 무조건 깨진다. 이런 식의 무의식적 규칙과 전제조건을 타파해야 깨달음이 된다. 인간은 길들여진 존재다. 벗어나야 한다. 생각을 못하는 이유는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도구가 없으니 상대방을 집적거려서 반응을 끌어내고 자신의 대응을 결정하려고 하므로 잘못된다. 자신의 계획이 앞서야 한다.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든 제압할 수 있어야 한다. 도구가 있어야 가능하고 계획이 있어야 가능하다. 집을 짓듯이 생각을 하나씩 건축해야 한다. 장편소설을 쓴다면 미리 캐릭터를 정해놔야 한다. 퍼즐맞추기를 하듯 플롯을 하나씩 짜맞추는 것이며 캐릭터에 따라 퍼즐의 위치가 정해진다. 질문하는 자의 포지션에 서면 죽을 때까지 질문만 하게 된다. 설명하는 자의 위치에 서야 한다. 작가의 관점에 서야 생각할 수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취미를 붙인 것은 꼬맹이 시절 형에게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들은 옛날 이야기도 수십 가지가 된다. 형은 주로 만화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다가 소재가 바닥나자 그냥 이야기를 지어서 하기 시작했다. 흑두건 시리즈다. 나도 동생에게 들려주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내야 했다. 시골이라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오는 엿장수를 만나야 만화책을 구할 수 있다. 만화를 보고 줄거리를 나 자신에게 이야기해준다. 동생에게 이야기해주기 전에 줄거리를 잊어먹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생각하게 된다. 왜 이 대목에서는 이렇게 되지? 저렇게 하면 안 되나? 양념을 치고 해석을 가하면 풍부해진다. 생각하려면 설계가의 관점을 얻어야 한다. 관객의 포지션에 서면 많은 것이 감추어진다. 자신이 작가라고 생각해야 큰 것이 보인다. 작가는 초반 설정에 성공해야 한다. 이후 스토리는 초반 설정에 연동되기 때문이다. 보통은 주인공을 약골로 설정한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무공을 닦아 강해진다. 이러면 망하는 거다. 슈퍼 히어로는 원래 강하다. 원래 강해야 이야기가 백 배로 풍부해진다. 주인공을 약골로 설정하면 반드시 스승을 만나야 하고 동굴에서 수도해야 하며 복수에 매달리게 되어 이야기가 천편일률적으로 된다. 주인공을 강자로 설정하면 강자의 기술은 백 가지도 넘으므로 일단 무협지 백 편은 먹고 시작한다. 백 배 좋다. 주인공을 약자로 설정하는 관습 역시 대칭행동이다. 상대방에게 말을 걸기 위한 장치다. 독자는 닫힌계 바깥에 어색하게 존재하며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모두가 공감하고 분노할만한 악당짓이 있어야 하며 그러려면 주인공이 약해야 한다. 약해야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강해지는 과정에 일단 만화책 다섯 권 먹는다. 고행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약한 주인공이 강해지는 과정을 생략하자 이야기가 백 배로 풍성해졌다. 약한 주인공이 기인을 만나 강해진다는 이현세식 설정은 작품을 왜소하게 만드는 자해행위다. 주체와 대상을 통일하는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연결고리가 끊어진다. 억지 연결고리를 만들면 복수극으로 설정된다. 그 경우 악당이 더 악랄하게 되어 빌런이 히어로보다 돋보이게 된다. 망한다. 설까치보다 마동탁이 더 매력적이다. 악당은 악해지는 절차가 없다. 그냥 악하다. 그래야 한다. 도구가 있어야 가능하다. 총이 있어야 한다. 주인공이 압도적 힘의 우위에 있으면 이야기로 들어가는 도입부가 생략된다. 마징가 제트라고 치자. 악당 때문에 복수하기 위해 동굴에서 수련하여 마징가제트가 되는게 아니고 그냥 공장에서 만든다. 다양한 공간에 놓아보면 된다. 산에서 한 번 싸우고 계곡에서 한 번 싸운다. 들에서 싸우고 바다에서도 싸우고 우주에서도 싸우고 도시에서도 싸운다. 다음 편과 그다음 편을 넘어 3년 후에 쓸 작품까지 가시권이다. 은하철도 777의 철이는 그냥 방문하는 행성 숫자를 늘리면 된다. 은하철도는 그냥 있다. 철이든 테츠로든 메텔이든 수련하지 않는다. 전사의 총은 그냥 주어진다. 남들은 기연이 있는 괴짜 할아범을 만나 동굴에서 마늘 먹고 빡세게 수련하여 익힌 기술을 쓸 때마다 기술이름을 외치는데 그런거 없다. 걍 쏘는 거다. 자신을 약자로 설정할 것인가 강자로 설정할 것인가? 애초에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 주인공이 약자이면 강자가 무슨 기술을 쓸지 떠봐야 하므로 집적대다 상대방의 페이스에 끌려가게 된다. 그러나 구영탄은 자기 계획이 있다. 상대방 마구만의 입장은 무시한다. 아이큐가 250에 만능 스포츠맨으로 설정된 때문이다. 강자는 특별한 도구가 있으므로 도구의 사용방법에 따라 천가지 만가지 스토리를 하룻밤에 쓸 수 있지만 약자는 빈손이므로 상대방을 자극하여 반응을 끌어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천편일률적인 복수극으로 가게 된다. 고르고 13의 주인공 고르고는 그냥 강하다. 관우와 장비는 그냥 강하다. 그래야 진도 나가준다. 정상에서 전모를 보는 시점이 아니면 안 된다. 에너지를 가지고 통제하는 관점이라야 한다.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이야기가 빈곤해지는 것이다. 무사가 총이 없고 운전기사가 차가 없고 기수가 말이 없다.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으니 자기소개를 하게 된다. 상대방의 행위로 부터 자기행동의 근거를 끌어대려는 목적이다. 이런 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가 틀어져 버리면 영원히 헤어나지 못한다. 나와 상대방을 연결하는 고리가 없기 때문에 억지 연결고리를 만들다가 망하는 것이다. 초딩은 잘못과 반성의 형태로 독자인 선생님과 연결고리를 만든다. 그러므로 사유는 제한된다. 선생님의 감시망을 벗어나 다양한 내용을 쓸 수 없다. 계획이 있을 때 초딩일기를 벗어날 수 있다. 총이 있을 때 천편일률적인 복수극을 벗어날 수 있다. 무협지는 총이 없기 때문에 괜히 주인공을 개고생 시키는 거다. 내게 에너지가 있고 통제권이 있다면 그것을 다양한 상황에 놓아보는 방법으로 백편까지 쓸 수 있다. 은하철도라 하면 방문하는 행성 숫자를 늘리면 된다. 알렉산드르 뒤마의 암굴왕에서 몽테 크리스토 백작은 일단 거액을 손에 쥐고 게임을 시작한다. 거액을 갖고 악당들을 혼내주기는 쉽다.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된다. 악당은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 신세다. 갖고 놀다가 처단하면 된다. 여기서 경우의 수가 무한이다. 좋잖아. 일단 주인공에게 천억을 쥐어주자. 요즘은 주인공을 재벌이나 도깨비나 신이라고 설정하던데. 스파게티 웨스턴도 그렇다. 주인공은 압도적으로 강하며 자신의 계획이 있다. 덫을 놓고 함정을 파고 악당을 끌어들여 입맛대로 적당히 요리하고 먹방을 찍어주면 된다. 먼저 주인공 손에 커다란 에너지를 쥐어주고 그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할지 정하면 된다. 근래 흥행하는 영화들의 특징은 큐브나 쏘우처럼 닫힌 공간을 즐겨 배경으로 설정한다는 점이다. 고립된 섬이나 산장이나 닫힌 공간을 도구로 쓴다. 혹은 좀비를 풀어 밖으로 나갈 수 없게 설정하기도 한다. 무사가 칼을 도구로 쓰듯이 주인공은 닫힌 공간을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 그럴 때 연역적인 사유가 시작된다. |
"정상에서 전모를 보는 시점이 아니면 안 된다. 에너지를 가지고 통제"하는 관점이라야 한다."
도구가 있어야 한다. 도구는 주체와 대상을 통일하는 장치다.
생각하려면 설계가의 관점을 얻어야 한다. 관객의 포지션에 서면 많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작가라고 생각해야 큰 것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