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교실붕괴=성적하락은 백퍼센트 확실하다. 민주주의도 하고 교실붕괴도 막고 성적향상도 달성하는 대안학교가 있지만 그런 학교는 애초에 우수한 자원을 선발한다. 일반학생은 백퍼센트 성적하락으로 간다. 그러나 성적은 교육의 목적이 아니므로 학생의 인권과 행복을 위해 민주주의 혁신학교를 하는 거다. 교실붕괴는 교사증원, 예체능 확대로 막아야 하는 것이다. 그냥 민주주의만 하면 다된다는 생각이라면 어린아이의 치기어린 생각이다. 민주주의를 하면 훨씬 더 힘들고 따라오는 부작용도 심하지만 그래도 그 길이 옳기 때문에 많은 것을 감수하고 가는 거다. 그런데 보통은 단순하게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다. 좋은 것은 성적향상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를 하면 성적이 향상된다. 이런게 귀납적 사고다. 억지로 가져다 맞춘다. 심지어 농사를 짓되 씨앗만 뿌리고 전혀 관리하지 않으면 저절로 수확이 늘어난다는 엉뚱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근거는 신토불이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좋은 것은 신토불이여. 유기농 좋잖아. 몸에다 화학물질을 뿌리면 안 되듯이 흙에도 화학비료를 뿌리면 안 되는 것이여. 말은 재미가 있지만 화학비료 효과만큼의 퇴비를 주려면 열 배의 노동력이 든다. 게다가 비료는 원래 천연물질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곡식이 다 인공물이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커다란 씨앗을 맺지 않는다. 누구 좋으라고 그러겠는가? 인공물인 곡식을 자연농법으로 재배한다고? 그게 억지다. 물론 부분적인 성과는 있겠지만 열 배의 힘이 든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여성 코치가 여성 선수를 가르치면 더 많은 금메달을 딸 수 있다고 말하면 기분은 좋을 것이다. 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고 김도 매지 않고 그냥 방치해 놨더니 수확이 두 배로 늘었어요. 이렇게 거짓말을 하면 기분은 좋다. 소박한 감상주의를 버리자. 세계 컨닝대회가 있다. 어떤 선수가 나는 컨닝을 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컨닝대회에서 우승하겠어요 하고 말한다면? 올림픽경기는 원래 컨닝대회다. 꼼수가 난무한다. 러시아는 약물로 컨닝한다. 미국은 돈으로 메달을 산다. 김연아 선수가 미국선수라면? 열 배 백 배의 돈을 벌었을 것이다. 돈으로 메달을 컨닝하는 미국은 정당한가? 병역면제로 메달을 컨닝하는 한국은 정당한가? 쿠베르탱의 아마추어 정신으로 보자면 미국은 올림픽에 참가할 자격이 없다. 병역을 이용하는 한국도 비신사적이다. 쿠베르탱은 신사인가? 쿠베르탱은 불순한 목적을 가진 인종주의자였다. 그리스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킬 목적으로 캠페인을 벌여서 올림픽이 이루어진 것이다. 쿠베르탱의 인종주의는 정당한가? 이슬람을 조지자는게 올림픽 정신이다. 생각하면 쿠베르탱의 아마추어리즘은 철저하게 정치적인 협잡이다. 따지자면 올림픽은 온통 시궁창이다. 다들 똥밭에서 탭댄스를 추고 있는 셈이다. 내 똥밭은 깨끗한 똥밭이여. 이런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스포츠는 사실 인맥이 중요하다. 탕평하면 당연히 망한다. 민주적으로 하면 당연히 망한다. 월드컵 사강은 대선후보 정몽준의 컨닝으로 된 것이다. 히딩크가 잔디밭에 물을 뿌려 논으로 만든것은 사실이다. 깨끗하지 않다. 컨닝의 달인은 빌어먹을 전명규다. 전명규를 버리면 금메달이 줄어드는 것이 확실하다. 그래도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한다. 남자종목과 여자종목 구분을 없애고 통합종목으로 가면 여자선수는 메달 0개에 근접해진다. 페미니스트라면 남녀구분을 없애고 통합대회로 가자고 주장해야 할까? 도덕적 당위로 보면 남자축구 여자축구의 구분을 없애는게 맞다. 도덕적 당위로 판단하는 귀납적 사고를 버려야 한다. 민주주의는 가시밭길이다. 그래도 그리로 가야만 한다. 그것이 인류의 존재목적이다. 민주주의만 하면 저절로 성적이 오르고 금메달 쏟아지고 서울대 합격하고 다 잘될 거라고 믿는다면 배반이다. 민주주의로 성공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도전할 가치가 있다.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것은 선하다. 그러므로 에베레스트에만 가면 따뜻하고 편안하고 비단 꽃길에 카페트가 쫙 깔리는 것일까? 아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목숨을 걸어야 민주주의를 할 수가 있다. 성적하락을 각오해야 양성평등을 이룰 수 있다. 중국은 독재의 편한 길을 선택했다. 중국은 컨닝으로 이기고 있다. 왜 화웨이는 스파이짓을 할까? 화웨이의 정신은 늑대정신이다. 늑대는 사람을 죽인다. 그런 썩은 정신으로 나쁜 짓을 해서 회사를 키웠다. 컨닝하면 성적 오른다. 대신 적을 만든다. 민주주의를 하면 성적이 내려간다. 대신 친구를 만든다. 민주주의도 하고 성적도 올리는 길은 없을까?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도전이다. 엘리트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지도자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타자화하고 대상화하는 버릇을 버려야 한다. 왜 타자화하고 대상화할까?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나와 대상을 통합하는 중간고리가 없으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귀납적 사유에 빠져 대상을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도구를 가져야 한다. 수학자가 연역하는 이유는 수학이라는 도구가 있기 때문이다. 의사가 타자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는 이유는 청진기라는 도구가 있기 때문이다. 냉철해지지 않고 소박한 감상주의에 빠지는 이유는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도구가 없으면 도구를 만들게 된다. 대칭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타자화의 시선이다. 밖에서 어떻게 컨트롤하려고 하면 안 된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안으로 들어가려면 도구가 있어야 한다. 농사를 짓지 않고 방치하면 저절로 농사가 잘된다는 식의 생각은 타자화하는 비뚤어진 시선이다.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전쟁으로 싸우면 당연히 스파르타가 이긴다. 도둑질 시합을 하면 당연히 강도가 이긴다. 내가 상대방에게 잘해주면 상대방도 내게 잘해주겠지 하는 식의 안이한 사유는 나와 남을 분리하는 이분법적 사유, 흑백논리의 사유이고 타자화의 시선, 대상화의 시선이다. 내가 공부한다며 성적을 괴롭히지 않으면 성적도 내게 감사해하며 친절하게 백 점을 주겠지. 이런 생각은 위험하다. 나와 성적을 구분짓지 말라. 내가 밥을 먹지 않으면 저절로 배가 부를 것이다. 내가 운동을 하지 않으면 저절로 근육이 생길 것이다. 내가 공부하지 않으면 저절로 성적이 향상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을 포함시켜 보는 것이 주체의 사고다. 하지마라는 자기소개는 자신을 외부의 관측자로 놓고 분리하여 대상화하는 것이다. 자기를 포함시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여긴다. 자신에게 도구가 있으면 역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도구가 없으면, 자신을 외부의 관측자로 놓으면 이분법적 사고에 빠지게 된다. 그 경우 상대가 나의 선의를 받아들여 잘 될 것으로 여긴다. 음악을 틀어주면 고마워서 배추가 두 배 속도로 자라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