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타 보면 안다. 만약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어떤 버스에 타고 있다면 우리는 그 버스의 존재를 알 수 있을까? 모른다. 다만 우리는 그 버스가 방향을 틀거나 멈추거나 혹은 속도를 바꾸면 그제서야 버스가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이때 버스의 변화를 통칭하여 물리학에서는 가속도라고 한다.
버스는 설령 가만히 있더라도 사실은 그게 관성의 법칙이 적용된 것이다. 즉 움직이는 것이다. 이때 움직인다는 말은 일상적인 움직임과는 다른 말이다. 관성의 개념은 움직이지 않는 것도 움직이는 것으로 친다. 왜냐고? 그 버스가 또 다른 버스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버스는 지구다. 지구는 졸라 빨리 움직이는데, 우리는 사실 그 지구가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없다. 근데 이미 움직이고 있다니깐?
다만 인간이 중력은 느낀다. 왜? 중력은 원래 다섯글자다. '중력가속도'. 맞다. 중력은 가속도라서 내 몸뚱이가 무겁게 느껴지는거다. 지구가 움직이는 것은 못느낌에도. 원래 인간은 어떤 것이 일정한 속도로 변화없이 움직인다면 그것을 느낄 수 없다. 왜냐고? 인간은 오로지 변화만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인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존재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는 가속도가 붙어 있다. 왜냐고? 가속도가 아니면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있어도 없는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의 머리가 고정시켰다고 치자. 이 아기는 어떤 사물의 이름도 모른다. 이때 벽에 붙어 있는 액자를 아기는 인식할 수 있을까?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어른이 되면 그것을 인지한다. 액자를 옮겨봤기 때문이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경제가 등속도로 변화하면 느낄 수 없다. 그것은 있어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경제버스에 올라타버리기 때문이다. 그 순간 경제의 속도는 관성으로 치환된다. 사람들은 경제를 파이로 생각한다. 똑같이 나눠먹으면 사람들이 만족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먹고 있어도 그것을 느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이는 그대로잖아.
연애를 해보면 안다고 한다. 처음에는 연인의 손만 잡아도 짜릿하다. 그런데 이내 불만이다. 점점 수위를 높여야 만족한다. 맞다. 경제도 이처럼 수위를 높여야 그것이 있는 줄 안다. 가속도가 붙어야 경제가 '존재'한다. 그런데 무한대로 커질 수는 없는 거냐고? 어. 사실 무한대로는 안된다. 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는 그것이 속한 계의 크기만큼 몸집을 불렸다가 이내 꺼져버린다. 물론 기술적으로 경제의 크기를 지속적으로 늘리는 방법은 있다. 질의 발견이 꼭 물리적으로 밖에서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의 창조적 재발견도 곧 질의 발견이 된다.
그것은 재해석이다. 인간은 개인이 할 수 있는 경제활동 혹은 의사결정의 총량이 점점 증가하는 형태로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다. 밖으로 커지나 안으로 쪼개지나, 원리적으로는 같은 양이다. 상호작용의 총량이 같기 때문이다. 그게 파이를 가속성장시키는 하나의 수단이 된다. 가만히 있어도 안되고, 성장만 해도 안된다. 인간이 이미 성장에 익숙해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속성장이다.
물론 실제로는 이렇게 예쁘게 안 된다. 가속성장하면 지수그래프를 그려야 하는데, 그러면 결국 무한대로 발전한다. 왠지 말이 안되는 거 같다. 그런 일은 겪어본 적이 없으니깐. 왜냐고? 계 때문이라니깐. 그래서 꿀렁 꿀렁 하며 계단식으로 성장하는 거다. 그래서 최적화 그래프는 언제나 계단식이다. 세상이 이렇게 생겼다니깐.
그 잘 산다는 유럽에 가보면 사람들이 경제를 어떻게 느끼는 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소득이 얼마가 되었건 상관하지 않는다. 점점 성장해야 경제가 있구나 한다. 그래야 얼굴에 활력이 돋는다. 북유럽 사람이 행복하다고? 북유럽 가보고 그런 소리 하시라. 그들은 행복하지 않다. 겉으로만 스마일이지 귀로는 데스메탈 음악을 틀고 있다. 그들의 집에 들어가보고, 그들의 자살율이 얼마나 되는지 보고, 그들의 모순을 느끼고 그런 소리 하시라. 북유럽 복지를 배우기만 하면 된다고? 복지를 졸라 잘해서 자살율이 전세계 순위권이냐?
복지는 성장할 수 없을 때 아껴뒀다 잠깐 써먹는 거지, 그게 최선책은 아니다. 그래봤자 내부를 짜내는 방법의 하나가 아닌가? 내부에서는 무슨 수작을 부려도 역풍이 분다. 그래서 외부를 보라는 거다. 능력있는자는 흥을 돋운다. 판을 벌여서 시끄럽게 만든다. 인간은 롤러코스터를 즐긴다. 스릴을 느끼는 거다. 아니, 변화를 느끼는 거다. 그냥 있는 건 있는 게 아니다. 가속해야 존재하는 것이다.
감사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