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단 한 명의 스승이 있다면 그 한 사람은 공자다. 공자가 의리를 밝혔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에 허다한 철학자가 있다지만 대개 뜬구름 잡는 소리만 했다. 이러쿵저러쿵 말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이렇게 말대꾸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 세상이 물로 되어 있든 불로 되어 있든 그건 지 사정이지 내 사정이 아니다. 중대한 연결고리 하나가 빠져 있다. 이야기의 완결성이 떨어진다. 납득되지 않는다. 너와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타자성의 문제다. 모든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은 너는 너 나는 나, 너와 나는 남남이고 같은 편이 아니라는데 있다. 설사 같은 편이라 해도 사회의 관습일 뿐 내가 그 관습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같은편이라도 문제다. 같은 편이면 철학이 필요없다. 자녀는 부모를 따르면 되고 제자는 스승을 따르면 되고 국민은 국가를 따르면 된다. 시키는대로 하면 된다. 그 경우 부모의 행위 혹은 스승의 행위나 국가의 행위가 되고 나의 존재는 사라진다. 혹은 희미해진다. 치명적이다. 모든 것은 남이며 내 편이 아니며 내 편이면 더 고약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철학하게 되는 거다. 내 존재를 찾아야 한다. 처음에는 맹목적으로 따른다. 의사결정은 위임한다. 형을 따르고 부모를 따르고 스승을 따르고 국가를 따른다. 그러다가 상처 입고 등 돌리는 지점이 있다. 동생이 태어나면 엄마의 태도는 돌변한다. 성적이 나쁘면 스승의 태도는 돌변한다. 친절하지 않다. 동무들끼리 잘 놀다가 원수지간으로 대립하게도 되는 특이점이 있다. 결혼할 때가 그렇다.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혹은 한 남자를 두고 두 여자가 대립한다. 길은 갈림길이다. 진학하면서 갈라지고 취직하면서 갈라지고 결혼하면서 갈라진다.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서로 다른 정당에 속해서 얼굴을 붉힌다. 철학자들은 자유가 어떻고 사랑이 어떻고 평등이 어떻고 떠들기 좋아하지만 가식에 찬 립서비스에 불과하다. 대중이 듣기좋아하는 말을 해주는 거다. 사회가 개인을 챙겨줄테니 믿고 따라오라는 유혹이다. 그런 수작에 넘어간다면 곤란하다. 인간이 원하는 진짜는 하나다. 그것은 힘이다. 매력이든 금력이든 권력이든 인간은 힘을 원한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어쩔 것인가? 도망치든가 싸우든가 뿐이다. 대개 도망치라고 한다. 이런 주의 저런 주의가 있단다. 그래봤자 모두 겁먹고 도망치자는 주의다. 그것은 약자의 철학이다. 철학이 아니다. 산수 문제가 있으면 풀어야 한다. 못 풀겠으니 튀고 보자? 그런 수학은 없다. 모르겠으니 철학하지 말자는 철학은 철학일 수 없다. 수학은 곧 죽어도 문제를 풀어야 하고 철학은 곧 죽어도 의사결정해야 한다. 철학은 철학이 아니라 환경적응이다. 싸워서 이겨야 한다. 전쟁에 이기는게 전술이지 지는 것은 전술이 될 수 없다. 허무주의, 회의주의, 염세주의 패배주의 따위가 철학일 수는 없다. 생각하면 무섭다. 너와 나는 원래부터 적이다. 필연적으로 대립한다. 타고난 환경과 대립하고, 주어진 운명과 대립하고, 낳아준 부모와 대립하고, 길러준 국가와 대립하고, 손잡은 동료와 대립한다. 어린 시절은 그럭저럭 괜찮다. 의사결정이 필요없다. 갈림길 앞에 외로이 서지 않는다. 15살이 되면서부터다. 사방의 적들에 둘러싸이고 마는 것이다. 내 편은 어디에도 없다. 어리광은 먹히지 않는다. 부모와 가족과 동료와 사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광야에서 홀로 버려진 채로 고독하게 기초부터 벽돌을 하나씩 쌓아야 한다. 자기 존재의 근거를 자기 손으로 구축해야 한다. 설사 네가 맞는 말을 해도 내가 동의해줄 이유는 없다.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적군이 바른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박수쳐줄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구 좋으라고? 이것이 철학의 근원적 출발점이다. 왜? 바둑의 첫 한 점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첫 한 점을 놓으면 거기에 연동되어 다음 착점이 결정된다. 적인가 동지인가? 세상과의 관계설정이 첫 점이다. 그래서 공자가 의리를 밝혔다. 분별과 의리다. 너와 내가 한 편이 아니라는게 분별이라면 한편이 되는게 의리다. 갑자기 정의를 부르짖으면 이상하다. 떳떳한 의리를 밝힌 다음에 정의를 주장하는게 맞다. 수순이 있다. 네 아버지라도 된다더냐? 하고 힐난하면 그래 내 아버지 맞다 하고 말하는게 의리다. 갑자기 신을 믿어보라고 권유하면 이상하다. 미쳤지. 남을 왜 믿어? 만약 신이 나를 만들었다면 나의 과거를 안다는 건데 그런 넘은 얼른 쳐죽여야 맞다. 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를 죽이라고 말하지 않나? 신이 아버지라면 첫 번째로 죽여야 한다. 먼저 의리를 밝힌 다음에야 명분이 선다. 기독교는 의리를 밝히지 않는다. 그냥 사람을 제압하려고 한다. 네까짓게 신을 당할 수 있을 거 같아? 신은 꽤 세다구. 뒈지고 싶지 않으면 복종해. 꼭 지옥의 불맛을 봐야 정신차리겠어? 이런 겁박이다. 납득할 수 없다. 의리가 앞서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이 아버지라면 당연히 죽이는게 맞고 신이 주인이라면 당연히 죽이는게 맞고 신이 나를 창조했다면 역시 죽이는게 맞다. 나를 납득시켜 보라. 철학은 시작된다. 그래서 의리다. 의리는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게 한다. 서로 상관있게 한다. 남의 일에 참견할 자격을 부여한다. 납득할 수 있게 한다. 인간의 근본문제는 타자성이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서로는 남남이다. 세상이 어떠한들 국가가 어떠한들 무시하면 그만이다. 조국이 망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랴. 내가 눈을 감으면 그만이다. 지구 온난화가 어떻다구? 나몰라라 하면 그만이다. 인류가 멸망하든 말든 나와 상관없다. 나야 살아먹을 만큼 살아먹었고 앞으로 30년만 더 살면 된다. 내 죽고 난 다음에 지구가 어떻게 되든 관심없다. 그러한 타자성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 의리다. 의리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외면하지 못한다. 가족 간의 의리, 동료와의 의리를 확장하다 보면 결국 인류와의 의리로 나아간다. 지구 온난화로 인류가 망하든 말든 상관없다고는 말할 수 없게 된다. 역사이래 많은 철학자가 한마디씩 언설을 보탰지만 다들 핵심을 짚지 못하고 변죽을 올렸다. 일방적으로 선언할 뿐 남득시키지 못했다. 철학의 본질은 타자성이며 이를 극복하는 것은 의리다. 분별과 의리가 철학의 씨줄날줄이다. 질문에는 답변이 있고 원인에는 결과가 있다. 분별에는 의리가 있다. 서로 남이라는 분별이 타자성이라면 우리가 한 편이고 한 팀이고 동료인게 의리다. 그러나 그냥 우리는 원팀이다 하고 선언한다고 원팀이 되는게 아니고 의리를 밝히는 절차를 밟아서 되는 거다. 의리란 무엇인가? 의사결정구조다. 부모가 나를 낳았다면 부모에게 복종해야 하는게 아니고 마땅히 의사결정구조를 조직해야 한다. 신이 나를 창조했다면 복종해야 하는게 아니고 무릎 맞대고 앉아서 의사결정구조를 조직해야 한다. 동의하고 합의하고 서명하고 약속하고 인증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누구도 문서에 사인하고 도장 찍고 보증인 앉히고 증명서 제출하고 태어나지는 않았다. 얼떨결에 태어난 것이다. 나고 보니 한국인이고 나고 보니 헬조선이고 나고 보니 황인종이다. 나고 보니 남자 혹은 여자고 나고 보니 다른 사람도 아닌 나다. 이러기 있나? 동의한적 없고 승인한적 없다. 어려서는 힘이 없으니 부모가 시키는대로 했다. 국가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했다. 개기다간 싸대기 맞는 수가 있다. 잔뼈가 굵어지면서 달라진다. 내가 왜? 무엇 때문에? 누구 좋으라고?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는 의리는? 분별과 의리는 철학의 알파요 오메가다. 민주주의는 의리를 조직하는 절차다. 그냥 대통령을 밀어야 하는게 아니고 내 손으로 뽑았기 때문에 의리를 지켜야 한다. 그래서 결론은? 합당한 의사결정구조를 만들면 된다. 의리를 조직해야 한다. 정의는 산에서 발굴하는게 아니고 우리가 조직하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이름의 책도 있다. 웃겼다. 정의를 무슨 광산에서 노다지 찾듯이 한다. 도원결의해서 의가 조직되는 것이다. 동의하고, 합의하고, 평의하고, 논의하고, 상의해서 정의된다. 정의는 아기를 낳듯이 낳는다. 반드시 절차가 있다. 절차가 의리다. 의리를 밟아 정의를 일으킨다. 국가는 있는게 아니고 만드는 것이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가족도 그냥 있는게 아니고 만드는 것이다. 부자간은 유전자의 의가 있고 동료간은 호르몬의 의가 있다. 그런데 호르몬 의리가 유전자 의리보다 높다. 이는 대법원 판결이다. 유전자를 물려준 부모보다 길러준 부모를 따르는게 정의다. 호르몬에 의한 애착관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이 의리다. 기르는 과정에 동의와 합의가 있었지만 낳는 과정에 동의도 합의도 없었다. 자식에게 물어보고 낳은 사람은 없다. 갈림길에서 가만있으면 두 명이 죽고 핸들을 저쪽으로 꺾으면 한 명이 죽는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의란 무엇인가는 이런 소리를 무한반복한다. 공자가 의리를 밝혔다. 공자왈 가족부터 챙기라고 되어 있다. 정의는 서로가 동의하고 사회가 합의해서 정한다. 합의가 정의에 선행하고 호르몬이 유전자에 앞선다. 남녀가 사랑해도 호르몬이 정하지 다른 것이 정하지 않는다. 의리는 오랜 시간에 걸쳐 물리적으로 구축된다. 그래서 공자는 가족부터 챙기라고 말한 것이다. 물리가 관념에 앞서기 때문이다. 정의는 사회가 논의해서 합당한 매뉴얼을 만들면 된다. 우리는 말한다. 이것이 옳다. 저렇게 해야 한다. 웃기고들 있다. 그런거 없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그래서? 니가 무슨 상관인데? 어떻고 저떻고 간에 과연 당신이 개입할 자격이 있는가? 발언권이 있는가? 니가 왜 참견하는데? 주제넘게도 말이다. 개입할 권력이 있는가? 당신이 노예라면 한마디 하고 나설 수 없다. 누가 노예에게 인류의 앞날을 묻겠는가? 그런데 말이다. 당신 노예잖아. 노예 맞네. 당신이 노예가 아니라는 증거라도 있는가? 없잖아. 당신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한다고 믿지만 대개 환경에 지배된다. 남들이 시켜서다. 집단의 무의식에 지배된다. 당신은 출세와 성공과 평판과 지위를 원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발명해낸 것이 아니다. 집단이 당신에게 스트레스를 가하자 당신이 그런 소리로 비명을 지른 것이다. 나는 출세할거야 성공할거야 사랑할거야 이러지만 그게 비명소리다. 당신이 집단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증거다. 당신의 생각이 아니라 집단의 압박이다. 주변의 평판공격에 당한 것이다. 독립적인 의사결정권을 획득하고 적절하게 행사하게 하는 것이 철학이다. 물리학이 물질을 다루고 수학이 수를 다루고 생물학이 생물을 다룬다면 철학은 의리를 다룬다. 의리에서 권력이 나온다. 말은 넙죽넙죽 잘한다. 난 이게 좋아. 난 저게 좋아. 이런 말은 권력자에게만 해당된다. 당신은 의사결정권이 없는 노예이므로, 왜냐하면 당신은 합당한 절차를 밟아 의리를 조직하지 않았으므로, 당신은 동의하고 합의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원초적으로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질문을 던질 자격조차 없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노예는 질문할수 없다. 노예의 사슬을 벗어나게 하는게 의리다. 양반에게는 있고 상놈에게는 없는 것은? 의리다. 양반은 전국적으로 단일 조직을 가지고 있다. 양반은 언제나 역성들어줄 자기편이 있지만 상놈은 개인이 고립되어 있다. 의리가 없다. 내 편이 없다. 내 가족이 없고 내 친척이 없고 내 가문이 없고 내 나라가 없고 내 동료가 없다. 그러므로 권리가 없는 것이다. 공민권도 없고 투표권도 없고 인권도 없고 소유권도 없다. 의리가 있어야 한다. 가족과 동료가 있고 팀이 있고 역할이 있어야 의리를 가진다. 당신이 누리는 공민권과 투표권과 인권과 소유권은 그냥 있는게 아니고 3.1과 419와 광주와 6월과 촛불에 의해 조직된 것이다. 권리는 피 위에 씌어진다. 의리는 의사결정구조다. 그 구조를 가져야만 한다. 시스템을 일으켜야 한다. 우리는 애국이니 충성이니 상투적인 말을 하지만 개뿔 얼어죽을 애국이고 충성이겠는가? 그런거 없다. 노예에게 애국이 어딨어? 노예는 공민권이 없는 비국민이다. 공민권을 박탈당한 로힝야 람들에게 미얀마에 애국하라고 떠들건가? 식민지 피지배자 주제에 일제에 충성할 것인가? 어림없는 일이다. 소모품 주제에 무슨 충성? 의리로 인해 인간은 거듭난다. 군신간의 의리를 주장한다면 봉건시대고 지금은 가족간의 의리, 동료와의 의리, 팀과의 의리가 중요하다. 집단 안에서 내게 주어진 역할과 관계와 권력구조 안에서 곧 의사결정구조 안에서 내 삶의 근거와 방향을 찾는 것이 의리다. 의리는 있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야 한다. 개나 소는 의리가 없다. 노예도 의리가 없다. 역할을 가져야 의리가 있다. 미션을 가져야 의리가 있다. 임무를 가져야 의리가 있다. 집단의 나아가는 방향이 있어야 의리가 있다. 진보하지 않는 집단은 의리를 가질 수 없다. 보수는 의리가 없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운전기사와 승객의 의리가 있는 것이며 버스가 운행을 멈추면 의리는 없다. 운전기사님 하고 존중해줄 이유가 어디에도 없는 거다. 공간적으로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계통을 이루어야 의리가 있다. 계통이 3대는 연결되어야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통제하는 데서 의리가 성립한다. 선배와 후배 사이에 의리가 있는 것은 제 3의 신참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더 이상 신병이 들어오지 않는 내무반은 의리가 성립할 수 없다. 계급이 낮다고 일방적으로 당해야 하는 이유가 없는 것이다. 소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 소와 인간 사이에 의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다. 이유없이 죽이면 동물학대죄로 처벌된다. 동물과 인간 사이에도 약간의 의리가 있는 거다. 사건 안에서 역할을 나누어 가질 때 의리가 성립한다. 피부색과 성별과 국적을 차별하면 안 되는 이유는 의리가 있기 때문이다. 인류 단위의 도전과 응전이 분명하게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에너지로부터 출발한다. 세상은 궁극적으로 에너지에 지배된다. 에너지의 결을 따라간다. 순응하면 흥하고 거역하면 망한다. 에너지의 결을 인간사회에 가져온 것이 의리다. 의사결정의 결이다. 인간은 의사결정하기 편한 쪽으로 의사결정한다. 자연은 결따라 가고 인간은 의리따라 간다. 가족이 있고 부족이 있고 부부가 있고 친구가 있다. 상사가 있고 부하가 있다. 선배가 있고 후배가 있다. 동료가 있고 동반자가 있다.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는다. 동료와 친구와 가족을 따른다. 동반자가 우선이다. 부인과 장모 중에서 누구를 먼저 구해야 하나? 이건 정해져 있다. 모든 드라마가 사랑을 노래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서로의 호르몬을 끌어내고 무의식을 점령해서 의리를 만드는 절차다. 인간은 그렇게 조금씩 만들어져 가는 존재다. 호르몬이 끌어내어지고 무의식이 세팅되고 이성이 진작되고 대표성이라는 형태로 영혼이 만들어져서 인간이 된다. 갓난아기도 영혼이 있다면 그것은 위임되는 것이다. 그런게 없다면 인간이나 개미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에너지가 정한다. 왜 가난한 나라는 계속 가난한가? 결따라 가지 않기 때문이다. 왜 결따라 가지 않는가? 결이 없기 때문이다. 왜 결이 없는가? 의리를 조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족민은 가족이 없다. 혹은 희미하다. 선배도 없고 후배도 없다. 형도 없고 동생도 없다. 영어만 해도 형제간의 서열을 정하는 단어가 없다. 부족민에게도 가족 비슷한 것은 있는데 우리가 아는 그런 가족이 아니다. 열 살이 넘으면 자녀를 버린다. 가족보다 부족에 의지한다. 부족원은 적어도 백 명이 넘는데 많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다 보면 하향평준화 된다.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은 부족주의로 보면 이기적인 행동이다. 인도라면 매달 축제가 있다. 학교에 등교하면 축제에는 불참한다. 배신자다. 의리가 망하면 통째로 망한다. 합당한 의리를 조직하지 않으면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망한다. 금요일에 주급 받으면 월요일에 출근하지 않는다. 돈이 떨어지려면 수요일은 되어야 된다. 뒤늦게 출근해 보지만 회사는 이미 문을 닫았다. 그런 식이다. 의리가 없기 때문이다. 의리는 그냥 되는게 아니고 호르몬으로 되는 것이며 팀의 일원이 되어 팀 안에서 제 역할을 가져야 된다. 지분을 가져야 의리가 성립한다. 기득권을 가져야 의리가 성립한다. 그냥 말로 선언하는 의리는 가짜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권력이며 권력은 자연법칙에서 유래하니 엔트로피가 권력의 근거가 되며 에너지는 결따라 가고 결을 조직하여 자연의 에너지를 사회의 권력으로 가져오는 장치가 의리 곧 의사결정구조다. 식민지와 종주국 사이에 의리가 없는데 무슨 얼어죽을 정의가 있겠는가? 대표가 없으면 세금도 없다. 투표가 없으면 대통령도 없다. 서로를 통제할 수 있는 물리적 수단을 갖추어야 한다. 자연을 움직이는 것은 대칭이고 대칭은 밸런스다. 의리는 평등이다. 서로가 이익균형을 확보했을 때 의리가 성립한다. 그 다음 역할을 나눈다. 임금과 신하 혹은 상사와 부하의 수직관계는 이미 역할을 나눈 것이며 사건에 돌입한 것이며 평등은 그 이전의 전제다. 서로 간에 이익균형을 도출하여 평등한 동료가 된 다음에 각자의 능력에 따라 지분을 나눠가지고 역할을 결정하여 사업에 착수하고 이익을 분배하는 거다. 이익균형이야말로 모든 근거의 근거다. 그게 없기 때문에 의리가 없고 의리가 없으므로 이게 선이다 도덕이다 윤리다 정의다 사랑이다 하고 떠들어봤자 먹히지 않는다. 기계적 평등과는 다르다. 어차피 인간은 외모와 피부색과 근력과 지능과 성격에서 다르다. 같은 것은 후견이다. 각자 능력은 다르지만 후견인이 같기 때문에 평등하다. 후견인은 인류문명이다. 누구든 세종의 한글을 로얄티 없이 갇다 쓴다. 세종에게 저작권료 지불한 사람은 없다. 누구든 1만년 인류사의 축적된 지혜를 공짜로 가져다 쓴다. 문명이 인간을 후견하는 것이다. 문명으로 보면 능력있는 자와 능력없는 자를 차별하지 않고 고루 대접하는게 유리하다. 문명이라는 저울의 축이 움직여 강자의 특권을 빼앗고 약자의 핸디캡을 보완하여 균형을 맞춘다. 그것이 이익균형으로 나타난다. 각자 능력은 다르지만 주어진 위치에서 에너지 낙차는 같다. 호르몬은 같고 무의식은 같다. 강자가 더 많은 리스크부담을 진다. 약자가 더 많은 보호를 받는다. 그러므로 균형이 있는 것이다. 강자와 약자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 타격받는 것은 문명 그 자체다. 제 2차대전이 그러하다. 평형이 무너져서 문명이 깨진 것이다. 강자가 되어 리스크를 부담하든 약자가 되어 문명의 후견을 받든 이익은 동일하다. 장애인은 더 많은 사회의 보호를 받고 아기라도 더 많은 보호를 받는다. 더 많은 혜택을 받기 위해 아기가 되겠다거나 멀쩡한 자기 팔을 부러뜨리거나 혹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실형을 면제받기 위해 정신병자가 되겠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균형이 있는 것이다. 선진국일수록 그런 의리가 정교하게 디자인된다. 후진국은 그냥 약자를 차별한다. 그러므로 사회가 깨지는 것이다. 의리의 조직은 이익균형을 따른다.
모름지기 철학자는 그냥 이렇다 선언하고 끝내면 안 되고 자연으로부터 유도하여 사회로 가져오는 경로를 밝혀야 한다. 친권이 있다고 주장하면 있는게 아니고 유전자는 결코 호르몬을 이기지 못한다. 의리는 물리적으로 있다. 호르몬에 있고 무의식에 있고 균형감각에 있다. 1만년 인류문명의 성과로 있다. 경험치가 누적되어 있다.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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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익균형' 이란 개념을 좀 더 쉽게 풀어 줄 다음 글을 기대합니다.
( 24연, 의리를 조직하지 않고→ 의리를 조직하지 않으면. 28연, 친권이 있다고 주장하면 있는 게 아니고→ 친권이 있다고 주장해본들. 이라고 하면 문장이 더 자연스러울 듯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