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은 맞고 퇴계는 틀리다 옛날에 공자 선생이 공자왈 하고 맞는 말을 시전했는데 누가 물었다. '근데요? 왜요?' 아 이거 치명적이다. 공자 말씀은 다 맞는 말인데 그렇다 치고 왜 우리가 그 맞는 말을 실천해야 하는 거지? 왜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왜? 무엇 때문에. 남이사? 남이야 이렇게 살다 죽든 말든 니가 무슨 상관인데? 이런 어긋난 짓 하는 넘 꼭 있다. 말이 맞다는 것과 내가 받아들인다는 것은 별개다. 이에 대한 구조론의 답은 권력이다. 그런데 권력이라는 말은 어감이 좋지 않다. 독재자의 횡포를 떠올리게 한다. 권력타령 하다가 권위주의로 타락하겠다. 그래서 좋은 말을 찾아낸 것이 의리다. 답은 의사결정구조다. 강물이 거세게 흘러간다. 급류에 휘말린 당신은 어째야 하나? 구조대는 상류로 가야 하는가 아니면 하류로 가야 하는가? 당신이 상주에서 까불다가 낙동강에 빠졌다면 하류인 왜관에서 건져야 하나 아니면 상류인 예천에서 건져야 하는가? 이건 인간이 자의적으로 결정하는게 아니고 자연법칙을 따라야 한다. 인간 행동의 최종근거는 물리학에서 찾아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답은 에너지다. 에너지의 유도공식이 있는 것이며 그 공식에 인간이 맞춰 살아야 한다. 에너지에는 결이 있다. 결따라 가야 한다. 결을 따르지 않고 까불다가는 뒈지는 수가 있다. 에너지는 자연에 있는 것인데 이것을 인간사회로 가져온다면? 의리다. 정확히는 의사결정구조가 된다. 의사결정구조는 글자가 여섯 자라 너무 길다. 두 글자로 줄이자. 그래서 의리다. 자연에는 에너지가 있고 에너지에는 질서가 있고 질서는 의사결정구조이며 이를 간략하면 의리가 되고 의리는 사회에서 권력으로 나타나며 권력질서가 인간행동의 궁극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왜 그 권력질서를 따라야 하는가? 아니다. 반대로 권력질서를 생산해야 한다. 어떻게? 그것이 의리다. 일차적으로 인간이 사회의 권력질서를 따라야 하지만 모든 인간은 자기 내부에 고유한 에너지의 원천을 가지고 있으므로 즉 질서의 궁극적 주인은 개인이므로 집단이 개인에게 권력을 강제하면 안 되고 개인이 스스로 권력질서를 조직해야 하는데 그것이 도원결의이니 동료와의 평등한 의리, 부부의 평등한 의리가 근본이 된다. 자연에 에너지가 있으며 에너지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니 인간이 에너지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 예컨대 어떤 인간이 나는 밤이 좋아. 그러므로 밤아 길어져라. 낮아 짧아져라 한다고 해서 입맛대로 밤이 길어지고 낮이 짧아지겠는가? 인간이 밤낮의 길이에 맞춰살아야 한다. 어쩔 수 없다. 에너지는 절대적인 답이 되는 것이다. 사회적 에너지는 양상이 달라지는데 보통 선이니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것이 사회적 에너지다. 그것이 조직화되어 권력으로 나타나니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바보가 아니므로 그런 권력의 지배에 만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으니 스스로 의사결정구조를 조직하여 불의에 맞서고 정의를 펼치니 그것이 바로 의리다. 의리라 하면 군신간의 차별적 의리를 떠올리기 쉽지만 그것은 가짜고 구조론으로 보면 의리는 계의 평등과 균일에서 조직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보면 질에서 평등했다가 입자에서 서열이 생기지만 힘에서 주도권 넘어가고 운동으로 형태를 바꾸다가 량에서 다시 평등해진다. 여기서 권력의 정당성이 유도되는 것이다. ### 율곡의 일원론이 중앙집권적이라면 퇴계의 이원론은 지방분권적이다. 율곡의 일원론이 맞고 퇴계의 이원론은 틀리다. 한국에서는 중앙집권이 맞고 지방분권은 틀리다. 거칠게 말하면 대략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구조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이다. 수학이라는 말이다. 수학은 선악이 없다. 수학은 선악이 없다면서 왜 구조론은 진보편을 드는가? 진보란 가속도다. 인류문명이 정지상태가 아니라 가속상태이기 때문이다. 보수는 정지해 있는 사물을 컨트롤 하는 기술이고 진보는 가속도가 걸린 에너지를 컨트롤하는 기술인데 현대 인류문명이 꽤 가속이 걸려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지금이 조선왕조이고 100년간 아무런 변화도 없다면 보수안정이 맞지 진보변혁이 맞겠는가? 괜히 진보한다며 들쑤시고 다녀서 좋은게 뭐가 있겠는가? 개나 소는 일만 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인간은 변하고 있다. 하필 지금이 인류역사 중에서 가장 변화가 큰 시대다. 형편이 그런 거다. 인류문명에 에너지가 걸려있고 계에 에너지가 걸리면 일원화되며 진보주의가 일원론적 성격을 가지므로 진보가 옳은 것이다. 이런건 근본이 되는 원리를 파악해야지 입시문제 암기하듯이 하면 안 된다.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은 당연히 균형을 이루어야지 중앙집권만 맞다고 말할 수는 없다. 율곡사상이 한국에서만 맞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고 어느 나라에나 예외없이 적용되는 보편적인 원리다. 무엇보다 주자학이 왜 생겨났느냐를 따져야 한다. 거기에 진보성과 반동성이 공존해 있다. 송나라가 오랑캐의 침략을 당해 저항할 목적으로 중화주의로 맞서야 하는 사정이 생긴 것이다. 중화주의 이론적 근거로 주자학이 기능한 것이며 그러므로 방어적이고 분권적이고 시골 대지주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며 퇴계 역시 노예를 300명 이상을 거느린 지방 토호의 입장을 대변하는 반동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측면만을 보고 성리학을 반동으로 몰아붙이면 빨갱이 짓이다. 학문은 건조하게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진보와 보수는 항상 공존해야 하는 것이며 진보만 옳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그런데 학문의 영역에서는 진보만 옳은 것이며 보수는 논할 가치가 없다. 왜냐하면 학문은 계에 에너지가 걸린 일원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학문연구가 에너지 투입이다. 밖에서 에너지가 계속 들어오기 때문에 일원이 아니면 안 된다. 그것은 상업영화와 예술영화가 공존해야 하지만 평론가는 예술영화만 평론하지 상업영화는 평론하지 않는 것과 같다. 상업영화는 그냥 돈만 많이 벌면 된다. 세상에는 똥과 오줌도 필요하지만 똥과 오줌을 밥상에 올리지는 않는다. 율곡은 성리학의 반동적 성격을 극복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학문에는 그 당시의 여러 가지 역사적 사정이 얽혀 있는 것이며 진보적 성격과 반동적 성격이 뒤엉켜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중에서 진보를 취하고 반동을 물리는 것이며 금이 1이고 흙이 9라면 대략 흙이구나 하고 버리면 바보다. 성리학에 금이 1에 불과하고 똥이 9나 되지만 그래도 우리는 깨끗하게 씻어서 금을 챙겨야 한다. 그 1이 나머지 9의 손실을 상쇄하고도 남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항상 그런건 아니고 한류가 세계를 지배하는 지금만 그렇다. 백 년 전만 해도 성리학은 거진 백퍼센트 똥탕이었지만 말이다. 지금 스마트 시대에 세계가 인터넷으로 통합되는 분위기에 그 흐름을 따라잡으려면 통합을 강조한 일원론의 율곡을 평가해야 하는 것이며 그렇다고 모든 한국인이 SNS만 하고 사는 것도 아니고 사상이라는 것은 지도자가 되는 극소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지나친 단순화라면 좋지 않다. 한국은 중앙집권이 맞다. 이렇게 단순화시키면 곤란하고 21세기 인류가 나아가는 방향성을 따라잡으려면 한국의 중앙집권적 성향이 부각되는 흐름이다 정도로 봐야 한다. 한국만 그런게 아니고 싱가포르도 그렇다. 작은 나라나 도시국가는 일원론적인 성격을 가져야 한다. 중국은 반대다. 중국은 나라를 여럿으로 쪼개서 지방분권을 강화하는게 맞다. 공산당이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너무 권력을 키워놓았다. 어쨌든 지방분권적이고 방어적이고 보수적이면 SNS 흐름에 뒤처진다. 지방화가 잘 되어 있는 일본이 상대적으로 IT붐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퇴계사상은 성리학이 태동하던 당시 수세에 몰려 전전긍긍하던 중국 송나라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오호 16국에서 5대 10국에 이르기까지 혼란은 끝없이 일어났다. 중간의 수나라와 당나라도 유목민이 지배하는 정복왕조의 성격이 상당하다. 천자의 나라가 아니라 가한의 나라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퇴계사상이야말로 정통성리학 주류와 일치하는 것인데 그래봤자 그것은 단순한 번역일 뿐 진보가 없다. 학문은 모두 진보이며 보수학문은 없다. 학문은 그 자체로 계에 에너지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창의할 때 새것을 창의해야지 옛것을 창의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낡은 창의는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보수학문은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율곡은 명나라가 들어서고 다시 한족의 시대가 열려서 암울하던 송나라의 퇴행적 분위기가 일부 긍정적 분위기로 바뀐바 명나라 초기 북원을 물리치고 잘나갈 때의 진보적인 분위기가 뒤늦게 조선에 반영된 것이다. 성리학을 수세적 방어적 퇴행적 반동적 해석이 아니라 반대로 공격적 긍정적 진보적 해석으로 나아간 것이다. 성리학은 인간의 행위를 자연법칙과 일치시킨다는 동중서의 천인합일설에 근거하여 남녀간에 군신간에 형제간에 중앙과 지방간, 중국과 오랑캐 사이에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남자가 높고 임금이 높고 중국이 높아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오랑캐가 중국을 먹고 있으니 일종의 정신승리다. 남자가 높고 임금이 높고 중앙이 높고 중국이 높다는건 억지 해석이니 그냥 어거지로 말을 가져다 붙인 것이고 성리학의 근본은 우주에 질서가 있다는 그 자체다. 모든 차별은 그 천하의 질서를 부정하고 파괴하고 해체하는 것이다. 차별하면 떨어져 나가는데 무슨 질서가 있겠는가? 남자가 높다고 하면 여자는 가버리는데 남자끼리 모여서 무슨 모임이 되겠는가? 오프모임을 해도 남자만 나오면 망한 모임이다. 모임이 망했는데 무슨 질서타령이겠는가? 중앙이 높다하면 지방은 가버리고 강남이 높다하면 강북은 가버리니 모든 차별은 질서의 파괴요 해체요 부정이다. 질서는 통합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일원론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며 사건은 반드시 계에 에너지가 걸려 내부적으로 균일해졌을 때만 촉발되는 것이다. 평등만이 잉태할 수 있다.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서열이 생기지만 사건이 종결되면 다시 평등하게 된다. 하나의 사건은 평등>서열>평등으로 가는 패턴이 적용된다. 진행되는 일 안에는 반드시 서열이 있고 담당자가 있다. 의사결정은 만남에 의해 일어나며 그 만남의 뾰족한 접점에는 한 명만이 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율곡이든 퇴계든 시대조류의 반영인 것이며 퇴계는 노예 300명 거느리는 시골지주의 입장을 반영하고 시골에서 지주노릇을 하려면 도덕을 닦아야 한다 이런 것이고 율곡은 명나라가 잘나갈 때 조선도 뭣 좀 해보자 하고 지금 분위기 좋으니까 조선의 통합과 발전을 모색해보자 이런 것이다. 너무 단순화시키면 곤란하고 내막을 들여다 봐야 한다. 중화주의를 직수입해서 곧이곧대로 중국은 높고 조선은 오랑캐다 이러면 곤란하다. 퇴계사상이 강항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가서 덴노는 높고 막부는 낮다 이래버리니 만주사변 중일전쟁 터져서 2천만 명 죽어나가고 이것도 곤란한 거다. 이론은 입맛대로 가져다붙인 군더더기 해석을 걷어내고 근거가 되는 근본을 봐야 한다. 자연의 질서 그 자체를 따라가야지 인간의 의도를 갖다붙이면 안 된다. 자연의 질서로 보면 외부 에너지의 입력에 의한 계의 통합이야말로 모든 사건의 출발점이요 대전제가 되니 이것이 율곡사상이다. 진보는 통합이지만 통합만 옳은건 아니다. 그런데 학문은 언제나 통합되어 있어야 하지 한국학문 일본학문 중국학문 이렇게 나라마다 학문이 다르면 안 된다. 학문은 언제나 진보다. 진보만 있으면 안 되고 보수도 있어야 하지만 똑똑한 사람은 진보만 해야지 똑똑한 사람이 보수를 하면 망한다. 리더는 진보를 해야지 리더가 보수하면 망한다. 운전사도 있고 승객도 있어야 하지만 운전사는 진보여야 한다. 승객은 보수적이어야 하는데 난 승객할래 난 보수할래 이러면 강퇴된다. 구조론 연구소는 운전사를 양성하지 승객을 키우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는 하나의 순서일 뿐 공존이 옳다. 그러나 구조론 연구소에는 진보만 올 수 있고 보수는 올 수 없다. 학문은 언제나 진보이기 때문이다. 학문은 새것이며 낡은 새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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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권력의 지배에 만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으니 스스로 의사결정구조를 조직하여 불의에 맞서고 정의를 펼치니 그것이 바로 의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