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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706 vote 0 2018.10.15 (15:06:17)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한다. 흔히 쓰는 표현이다. 그러나 과연 전환이 일어났는가? 그렇지 않다. 어느 면에서 볼 때 인류는 여전히 80개의 원을 그려서 복잡하게 설명하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 우주관에 빠져 있다고 하겠다. 문제는 근본적인 우주관의 변화다. 지구냐 태양이냐 하는 사실의 문제가 아니다. 쉽지 않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설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기했지만 행성이 타원궤도를 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여전히 관측은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이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했던 이유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사상 때문이었다. 신플라톤주의는 미적 감각을 중시한다. 자연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이 진실이다. 


    아름다운 것은 단순하고 조화로운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복잡하다. 아름답지 않다. 신이 바보가 아니라면 세상을 이렇듯 번잡하게 설계할 이유가 없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간단하고 아름답다. 신이 세상을 만든다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 그렇다. 당시에 세상을 바꾼 것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었던 거다. 


    철학이 앞에서 길을 열고 과학이 따라가며 실적을 쌓는다. 그러므로 태도가 중요하고 관점이 중요하고 방향성이 중요하다. 21세기 이 시대에도 인류는 여전히 같은 문제에 봉착해 있다.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기소개라면 곤란하다. 자연의 있는 그대로를 따라야 한다. 인간의 경험과 상관없이 자연은 존재한다.


    자연은 고유한 자기 논리를 가지고 있다. 부족민들은 모든 사물을 쓸모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눈다고 한다. 백인 식물학자가 부족민에게 식물의 이름을 물으면 부족민은 비웃곤 한다. ‘바보야. 그건 쓸모없는 거라고. 하하하.’ 쓸모있는 것에만 이름이 붙는다. 먹을 수 있는 식물은 세밀하게 분류되어 다양한 이름이 붙는다고. 


    인간중심 사고다. 그런 한계를 넘어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모든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오류 말이다. 그러한 중국인의 오만함이 그들의 앞길을 막았다. 지구가 태양 주변에 자리잡고 있듯이 자신을 변두리로 놓아야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자신을 주인이 아닌 손님으로 놓는 것이 객관이다. 과학은 객관이어야 한다.


    주관에서 객관으로 넘어가기 어렵다. 보이지 않게 앞을 가로막는 천장을 뚫어야 한다. 있는 힘을 모두 끌어모아 단번에 뚫지 않으면 안 된다. 우주선이 대기권을 돌파하듯 단번에 새로운 세계로 올라서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철학이 중요하다. 미적 감각에 기반을 둔 신플라톤주의 철학이 새 시대를 열었다.


    구조론에서도 역시 미학적 직관이 중요하다. 구조론은 관계를 추구한다. 관계는 만남으로 시작된다. 모든 만남은 어색하고 긴장된다. 첫 만남의 순간에는 나의 전체를 들어 상대의 전체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익숙해지면 다르다. 많은 것이 약속되어 있으므로 당장 필요한 것만 챙기면 된다. 첫 만남은 다르다. 미지와의 조우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산골로 캠핑을 가도 그렇다. 낯선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많은 캠핑 애호가들이 장비중독자가 되는게 이유가 있다.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로 간에 약속되어 있지 않다. 그곳에서 만남의 어색함을 포착해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잘못된 것에는 위화감을 느껴야 한다. 


    자연스럽지 않은 것에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어야 한다. 번거로운 것을 거부해야 한다. 이에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자세와 태도의 교정이 필요하다. 옷을 입든 집을 짓든 음식을 먹든 마찬가지다. 구조론사람이라면 부족민의 현란한 장식을 거부하고 스티브 잡스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해야 한다. 밸런스 감각이 있어야 한다.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완전히 거듭나야 한다. 일단 구조론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그래서 구조론사람이 되었다면 알맹이만 빼먹겠다는 약은 자세를 버려야 한다. 먼 길을 함께 갈 때는 동료에게 민폐가 되지 않도록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미적 감각이 없는 사람은 구조론연구소에 머무를 수 없다. 


    구조론의 방법이 아닌 기존의 관행대로 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단, 아름답지 않고 조화롭지 않고 복잡하고 번거로울 뿐이다. 구조론은 같은 것을 더 아름답고 단순하고 명쾌하게 접근한다. 개별적으로 보지 않고 이것저것 엮어서 통짜덩어리로 보기 때문이다. 엮이면 대칭된다. 구조론은 세상을 대칭으로 본다. 


    낱개가 아니라 낱대칭이다. 우리는 사물을 낱개로 보지만 사실은 그것도 인간의 눈과 대칭된 것이다. 인간과 대칭시키면 그게 하지 말라는 자기소개가 된다. 나를 배제해야 한다. 관측자의 개입을 차단해야 한다. 자연이 서로 간에 긴밀하게 대칭되어 있음을 드러내야 한다. 거기에 질서가 있다. 그 질서를 따라가는게 구조론이다.


    자연에 사과도 있고 호박도 있고 대추도 있고 밤도 있고 귤도 있다. 금도 있고 은도 있고 구리도 있고 철도 있고 납도 있다. 이렇듯 낱낱이 개별적으로 주워섬기면 안 된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요구된다. 구조론은 언제나 대칭이 있다. 엮어서 봐야 한다. 엮으면 선후가 있고 좌우가 있고 상하가 있고 원근이 있고 명암이 있다. 


    경중이 있고 고저가 있고 장단이 있고 완급이 있고 우열이 있고 흥망이 있고 성쇠가 있다. 이렇듯 대칭을 기본으로 놓고 추적하는 것이 구조론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어야 한다. 개별적인 사물의 세계에서 대칭적인 사건의 세계로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사과, 밤, 호박, 대추, 감자, 고구마 따위는 대칭이 없는 것이다. 


    금, 은, 구리, 납, 철, 텅스텐도 대칭이 없다. 사물의 세계는 대칭이 없이 그냥 있다. 어색하게 있다. 안내인도 없이 혼자 창피하게 있다. 쪽팔고 있다. 남들은 부모 손잡고 당당하게 초등학교에 첫 등교를 하는데 이들은 그냥 혼자 뻘쭘하게 서 있다. 친절한 인도를 받지 못하고 있다. 민망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런 것을 느껴야 한다.


    사실이지 사과, 밤, 호도나 금, 은, 구리들은 인간과 대칭된 것이다. 그 인간을 배제해야 한다. 인간이 끼어들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처럼 중국인의 중국중심 천하관처럼 왜곡되기 마련이다. 자연의 스스로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럴 때 아름다움이 있다. 자연스러움이 있다. 구조의 세계에는 자체적으로 대칭이 엮여져 있다.


    고저, 장단, 완급, 우열, 흥망의 세계는 대칭이 있다. 그러므로 어색하지 않다. 서로 긴밀하게 맞물려서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를 인도하고 서로를 돕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의 세계로 그대를 초대한다. 이 세계는 전혀 다른 이세계다. 긴장타야 한다. 당신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와 있다. 그 사실을 절절히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물질에서 에너지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질은 공간에 있지만 에너지는 시간에 있다. 공간의 사정은 눈으로 볼 수 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다. 에너지 흐름에 올라타고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공간에 형태가 있듯이 시간에 시작되고 끝나는 완전성이 있다. 그래서 특별하다. 각별한 완전성을 추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간의 사물은 눈으로 보고 구별하지만 시간의 사건은 완전성을 보고 구분한다. 인식에서 존재로의 전환이다. 인식론은 인간이 사물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며 존재론은 에너지를 태운 자연이 스스로를 펼쳐 보이는 방식이다. 자연의 스스로됨에서 답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사물이 공간의 그림과 같다면 사건은 시간의 음악과 같다. 


    그림처럼 공간의 조화가 있듯이 음악처럼 시간의 조화도 있다. 이 세계에도 눈을 떠야 한다. 공간의 사물은 선택이 중요하지만 시간의 사건은 주도적인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선택은 그것으로 끝나지만 의사결정은 다음 단계가 중요하다. 호박과 수박이 있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또 금과 은이 있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미녀와 추녀가 있다면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서울대와 지방대가 있다면 어느 대학을 선택하겠는가? 답은 자명하다. 그러나 틀렸다. 당신의 선택은 언제나 실패로 된다. 공간에서는 그냥 선택으로 끝나지만 시간에서는 주도권 경쟁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서울대 선택했다가 낙방하기 쉽고 미녀 선택했다가 채이기 쉽다. 


    금보다 은이다. 당신의 얇은 호주머니가 금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박보다 호박이 낫다. 칼로리가 더 높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간에서의 선택에 익숙하다. 서울대 찍으면 된다. 미녀를 고르면 된다. 은이 아닌 금을 선택하면 된다. 호박보다는 수박이 맛나다. 당신의 현명한 선택에 다들 찬사를 보낸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인간은 시간의 선택에 서투르다. 당신이 무엇을 선택하든 에너지의 밸런스가 움직인다. 역설이 작동한다. 강한 에너지의 요동이 일어난다. 작용에는 반작용이다. 주도권을 놓치게 된다. 사건은 반드시 다음 단계가 있다. 고저 장단 선후 상하 원근 인과 명암은 시간의 선택이라 하겠다. 그 선택보다 다음 단계의 연결이 중요하다.


    음악과 같다. 그다음에 어떤 음이 오는지가 중요하다. 당신이 미녀를 선택했다면 다음 단계로 갈 곳은? 백화점이나 호텔이다. 그런데 돈이 없다. 망했다. 당신이 서울대를 선택했다면 다음 단계로 해야할 것은? 공부다. 그런데 실력이 없다. 당신이 무엇을 선택하든 망하는 선택이 된다. 사건의 세계에서 당신은 언제나 패배한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이 세계에서는 선악의 선택에서 게임의 승패로 전환된다. 선악의 세계는 본인이 선을 선택하면 된다. 악을 선택하면 모두가 당신을 미워할 것이고 선을 선택하면 모두가 당신을 칭찬할 것이다. 그러나 게임의 세계는 그리 만만치 않다. 상황을 이겨야 한다. 함부로 선의를 베풀었다가 뺨맞기 다반사다. 


    당신이 미녀를 돕고자 한다면 멋진 양복부터 챙겨야 한다. 선을 행하기 전에 자기 옷차림부터 살펴야 한다. 치한으로 몰리지 않으려면 말이다. 많은 사람이 악행으로 치닫는 이유는 마음에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쪽팔려서 그런 것이다. 어색해서 그런 것이다. 남을 도울려면 자신이 먼저 완벽해야 한다. 그런데 쉽지가 않다.


    공자는 극기복례라 했다. 자신을 이기고 환경을 이기고 문제를 이겨야 한다. 해결해야 한다. 사물에서의 선택은 객관식으로 찍는 것이다. 사건에서의 의사결정은 주관식으로 풀어야 한다. 그것이 이기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미녀를 선택하고 서울대를 선택하고 대기업을 선택하려고 하지만 과연 내게 그러한 선택권이 있을까?


    은과 금 중에서 금을 취하려고 하지만 황금을 감당할 능력이 내게 있을까? 이기는 자에게만 허락된다. 사물의 세계는 그저 선하게 살면 되지만 사건의 세계는 내가 주도하여 해결해야만 한다. 힘이 있어야 한다. 혼자는 무모하고 더불어 함께가 아니면 안 된다. 선을 행하기 앞서 먼저 의리를 조직하여 동료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선은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가치다. 집단의 요구와 맞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순진한 의도는 보기좋게 좌절된다. 내가 사건의 주도권을 잡아야만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선의로 접근하다가 모욕당하고 매맞기 다반사다. 역설이 작용한다. 선은 강자의 특권이고 악은 약자의 어색함에서 나온다.


    에너지가 내게 있어야 한다. 그것이 주도권이며 게임에 이기는 것이다. 강자의 자세를 훈련하는 것이 공자의 극기복례다. 이 세계에 적응하기 쉽지 않다. 언제나 결과는 의도와 반대로 되니 멀미가 나고 현기증이 난다. 에너지를 태우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언제나 대칭을 이루고 쌍으로 움직인다. 그 쌍을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양자역학이 규명하는 바다. 혼자서는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동료를 얻고 가족을 이루고 집단을 꾸려서 그러한 절차를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사업에 착수하는 방법으로 어색함을 피하고 민망함을 해결하고 자연스러움에 이르는 것이다. 돈 없는 주제에 자선을 하겠다는 무모함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이 만만치 않다. 


    인간이 보는 세계는 그냥 사물이 있다. 에너지가 태워져 있지 않다. 그러나 가짜다. 자연의 진실로 보면 언제나 에너지를 태우고 있다. 물이 에너지 없이 그냥 흐르지 않는다. 사건이 에너지 없이 그냥 진행되지 않는다. 선도 정의도 자유도 행복도에너지를 가진 다음에나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에너지를 태우면 뭐든 반대로 된다. 


    원인의 다양성이 결과의 획일성으로 되고 원인의 획일성이 결과의 다양성으로 된다. 획일적인 도화지에 다양한 그림이 그려지고 다양한 색깔이 칠해진 도화지에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에너지를 태워야 다양할 수 있으며 에너지를 태우려면 비워야 하며 비우면 획일적이 된다. 좋은 것은 획일적이다. 이는 우리의 상식과 반대다.


    우리는 막연히 다양한 것이 좋다고 믿지만 과연 그런가? 원인이냐 결과냐에 따라 상반된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이 더 획일적이고 안드로이드폰이 더 다양하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에너지는 언제나 역설이다. 전환은 역설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에너지 작용은 항상 방향이 반대로 되기 때문에 구조론적 사고가 중요한 것이다. 


    인간의 탄생은 획일적이나 그 삶의 결과는 다양하고 반대로 다양한 원인이면 결과는 획일적인 죽음이다. 에너지는 확산과 수렴 외에 방향이 없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획일성을 추구하여 다양성에 도달했지만 삼성은 그 반대로 간다. 다양성을 추구했는데 획일적인 성적표를 받는다. 이렇듯 사건으로 보면 모두 뒤집어진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모든 것이 전복된다. 도덕이 전복되고 윤리가 전복되고 선악이 전복되고 정의가 전복되고 자유가 전복된다. 도덕은 부도덕하기 쉽고 선은 독선적이기 쉽고 정의는 불의이기 쉽다. 자유가 억압이기 다반사니 자유한국당이 억압한국당 된다. 좋은 임금은 나쁜 임금보다 못하기 다반사다. 누가 나라를 망치나?


    태국의 푸미폰은 좋은 임금이라고 주장되지만 국민을 바보로 만들었다. 왕이 한계를 정하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박정희가 좋은 임금이었다고 믿는 태극기 충신들에 의해 망쳐지고 있다. 중국의 강희제는 좋은 임금으로 알려져 있지만 15억 중국을 어진 황제라는 환상을 추종하는 바보로 만들었다. 러시아의 피오트르대제도 같다.


    좋은 임금에 대한 환상이 압제자를 양산한다. 환상을 가진 국민이 의사결정권을 독재자에게 위임하면서 의사결정능력을 잃어버린다. 의사결정능력은 불과 같아서 한번 꺼지면 되살릴 수 없다. 어렵게 불씨를 살려놓아도 활활 타오르기까지 쉽지가않다. 밸런스가 무너져서 순환되고 연결되는 사이클이 끊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흐름이다. 흐름에는 생명성이 있다. 자연스럽지 않으면 안 된다. 선한 사회주의가 때로는 그 에너지 흐름을 끊고 연결의 마디를 끊고 자연의 생명성을 끊어 악을 생산한다. 국민 개개인의 가슴 속에 있는 불씨를 꺼트려 버리기 때문이다. 열정을 잃고 의사결정능력을 잃고 모든 의사결정을 어색하고 민망하게 만든다. 


    북한이 쉽게 대화로 나오지 못하고 혼자 구석에서 70년간이나 쭈뼛거리며 뒤통수를 긁적이며 망설인 것도 챙피해서 그런 것이다. 민망해서 그런 것이다. 지금도 체면 때문에 매우 힘들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때로는 악한 자본주의가 도리어 인간을 현명하게 만든다. 개개인의 환경변화에 대한 대응능력이 보다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사건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인과의 역설이다. 인과에는 응보가 있는게 아니고 역설이 있다. 에너지의 용틀임이 있다. 사건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전복된다. 선악이 전복되고 정의가 전복되고 자유가 전복된다. 완전히 뒤집어지고 만다. 당신의 기대는 보기좋게 빗나간다. 순진한 당신은 배반당한다. 세상 쓴맛을 보게 된다.


    원인이 좋으면 결과가 나쁘고 원인이 나쁘면 결과가 좋다. 공부는 힘들지만 결과가 좋고 음주는 즐겁지만 결과가 나쁘다. 의도와 반대로 된다. 뒤집어진다. 그러므로 대전환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 선을 독식하지 말고 나눠가져야 한다. 자신이 선하려 하지 말고 동료들에게 선할 기회를 양보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선이다.


    자유든 정의든 행복이든 마찬가지다. 자유를 찾다가 자유한국당에 들어가기 다반사다. 행복을 찾다가 자연인 되기가 다반사다. 정의를 찾다가 김기춘 되기가 다반사다. 오직 에너지의 원천을 틀어쥔 자에게만 선이 선하고 자유가 자유롭고 정의가 정의롭다. 머저리 안철수가 선을 행사할수록 사태는 이상하게 꼬여가는 것이다. 


    에너지의 원천을 틀어쥐려면 혼자서는 안 되고 반드시 팀을 이루어야 한다. 동료와 함께 가야 한다. 서로는 긴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료와 호흡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팀플레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천하의 공론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장기전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진보주의자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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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미지 [레벨:11]까뮈

2018.10.15 (21:44:18)

가슴이 찡하는 글입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1]오맹달

2018.10.16 (09:36:30)

팍~ 와닿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7]風骨

2018.10.16 (23:07:52)

두고두고 정독할 가치가 있는 멋진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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