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를 참구해서 깨닫을 수는 없다. 절대로 없다. 가당치도 않다. 불교의 수행이라는 것은 애당초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이 화두를 통해서 그 깨달음을 들킬 수는 있다. 거기에 간화선의 각별한 매력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한국에 불교의 방법으로 진짜 깨달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보면 된다. 엉덩이가 장판지에 눌어붙도록 앉아있는 사람도 있다지만 미련한 짓이다. 아마 아스퍼거인이 대인관계에 자신이 없어서 그 방법으로 피난해 있는 것일 게다. 까놓고 이야기하자. 석가의 깨달음을 쳐주는 것은 당시만 해도 인간들이 대개 몽매했으므로 ‘아 이 양반 2500년 전 고대사람 치고는 좀 아네!’ 하는 거다. 솔직히 석가가 뭘 알겠냐? 초딩이냐? 바보냐? 소크라테스의 경우도 비슷하다. 아는 게 없다고 스스로 실토한 사람이다. 그나마 나는 내가 아는 게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나름 현명하다고. 친구가 델피의 신전에 가서 신탁을 듣고 왔는데 점쟁이가 말하길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거였다. 그 말 듣고 우쭐해서 소피스트들을 찾아다니며 지혜배틀을 뛰었다. 사실 점쟁이는 그냥 원하는 말을 해준 거다. 왜냐하면 복채가 적었기 때문에. 돈을 많이 줘야 ‘나무로 된 판자떼기 뒤에 가서 숨어라.’ 정도의 긴말을 해준다. 돈을 조금 주면 OX로 답하는데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하냐고 물으니 O에 당첨되었다. 바둑을 처음 발명한 사람에게 몇 급의 실력을 인정하겠는가? 바둑의 발명자는 바둑을 잘 두건 못 두건 무조건 국수에 명인에 10단에 기성이다. 줄 수 있는 타이틀은 다 주는 거다. 석가가 주제에 알긴 쥐뿔을 알겠냐고? 그냥 저작권에 지적재산권에 발명특허권 인정해서 아는 걸로 쳐주는 것이다. 로열티는 챙겨줘야지. 선종불교 초기 당나라 때 스님들은 당대의 엘리트였다. 그 시대에서 가장 앞서가야 깨달음이다. 그런데 보자. 양자역학이 선도하는 21세기 이 시대에 성철스님이 상대성이론을 살짝 언급했다지만 그걸로 과학을 이길 수 있겠느냐고. 스님들은 아는 게 없다. 알면 노벨상에 도전하지 산중에서 중노릇이나 하고 있겠냐고. 상대적이라는 말이다. 깨달음을 말하려면 그 시대에 가장 앞서 있어야 한다.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첫 번째는 쳐주고 두 번째부터는 안 쳐주는 거다. 2500년 전 석가는, 반야심경이 만들어질 때 그 저자는, 당나라 때의 육조 혜능과 마조 도일은, 왕년의 성철은 그 시대 가장 앞에서 빛나는 지성이자 엘리트였다. 그러나 한 번 과학에 따라잡힌 이후 깨달음이 과학을 따라잡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시대에 당나라 수준으로 아는 척하다가는 개망신을 당한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대문 밖을 나서니 보자. 도깨비, 머깨비, 허깨비, 귀신, 유령, 이매, 망량, 요정, 요괴, 깡철이, 혼백, 잡귀 등이 난리부르스를 치는 판이다. 이들 허다한 귀신들의 공세 앞에서 쫄지 않고 뒷짐 지고 태연히 산길을 걸어가기만 해도 존경을 받는 시대다.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 영감 이야기다. 현해탄을 건너는데 폭풍이 불어 배가 전복될 판이다. 선원들이 일제히 엎드려 애걸한다. 어사또 영감님이 입고 있는 적삼을 벗어 바다에 던져야 용왕의 진노가 풀립니다. 얼른 적삼을 벗어 바다에 던지소서. 무당들이 말했다고요. 이런 말에 넘어가면 바보 된다. 경거망동을 멈추어라. 내 천기를 보아하니 한 식경 안에 파도는 잦아들 것이니라. 과연 파도는 30분 안에 잔잔해졌고 선원들은 어사또 영감을 존경했다고 한다. 미쳐 날뛰는 소인배의 무리를 호통쳐서 제압할 수 있어야 한다. 선비든 스님이든 당대의 최고 지식인이고 엘리트이며 불안한 군중을 제압할 위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어떤가? 아프면 의사를 찾아가지 스님을 찾지는 않는다. 가끔 침 놓고 뜸 떠주는 부적팔이 민간요법 스님이 있다지만 말이다. 귀신이 난리쳐서 불안하면 과학을 공부하지 스님을 찾아가지 않는다. 스님이 그 수준으로 엘리트 행세를 할 수 없다. 법륜 따위가 아는 척하지만 대중에 대한 아부가 유치찬란하다. 깨달음의 유통기한이 지난 시대다. 인정해야 한다. 석가의 제자 500비구는 모두 깨달았다. 혜능의 제자들도 단박에 깨달았다. 그때는 왜 다들 쉽게 깨달았을까? 귀신을 제압하기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부적 한 장만 써주면 어지간한 귀신은 단박에 나가떨어진다. 요즘은 의사를 이기고, 잡스를 이기고, 대통령을 이기고, 양자역학을 이겨야 한다. 무리하다. 깨달음이 용도폐기 된 것이다. 인터넷 시대다. 아는 척하려면 세계최고가 아니면 안 된다. 70억과 경쟁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조금 아는 지식인은 필요가 없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밤길에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정도의 지혜만 있어도 다들 의지해 왔다. 마을의 어른으로 존경받았다. 석가의 위빠사나든 한중일의 간화선이든 밤길에 귀신을 제압할 정도의 지혜는 된다. 간화선 화두는 내용이 모순되어 있다. 내용의 메시지가 중요한게 아니고 형식의 관측자가 중요하다. 1700공안이 있다지만 뻔한 패턴의 반복이다. 구조론으로 복제된 거다. 메시지에 집착할 때 관측자를 돌아보라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거다. 언어는 정보를 담아 전달하는 그릇이다. 그 그릇에 담긴 내용물은 무시해도 좋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로 조직된다. 전제가 그릇이면 진술이 내용물이자 그 언어에 담긴 메시지다. 이 정도만 알아도 1700공안은 하루에 다 깨진다. 한 가지의 복제반복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공안을 만들어낸 사람은 그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안다고 요즘 세상에 어디 가서 아는 척할 수는 없다. 비유하면 이런 것이다. 왕년에는 자동차와 마차를 구분할 줄 알면 아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자동차를 운전할 줄 알아야 아는 사람이다. 아니 더 나아가 신차를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이어야 제법 아는 사람으로 쳐주는 세상이다. SNS 시대에 그렇다. 첨단이 아니면 안 된다. 인류 중에 가장 똑똑하지 않으면 어디 가서 아는 척하면 안 된다. 바로 털리는 세상이다. 에너지 흐름을 타고 가면 두렵지 않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로 조직된다. 어떤 말이든 전제가 숨겨져 있다. 숨은 전제를 깨는 것만으로도 똑똑한 척할 수는 있다. 이걸로 깨달았다고 큰소리치면 곤란하지만 1700공안은 하루아침에 깰 수 있다. 전제가 숨어 있으며 그 전제를 비틀기만 해도 이야기보따리가 하나씩 만들어진다. 밤새도록 떠들어댈 수 있다. 비교우위만 증명하면 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스님이 질문을 한다. 동자가 답변을 한다. 그런데 스님은 과연 질문했을까? 그 말을 질문이라고 접수하는게 이미 숨은 전제에 놀아나는 것이다. 그것을 깨야 한다. 묻는다고 답하냐? 바보냐? 순진하긴. 패턴을 복제할 수 있어야 아는 것이다. 문답에 빠지면 이미 틀렸다. POD 출판 신의 입장 .. 책 주문하기 POD출판이므로 링크된 사이트를 방문하여 직접 주문하셔야 합니다. |
언어감각에서 깨달음의 실마리를 찾는다 함은 한 인간이 타고난 고유의 에너지의 흐름에서 크게 이탈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자신만의 네버엔딩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고서야 비로소 완전성에 도달할 기회를 부여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깨달음에 대한 유쾌 상쾌한 해석에서 통쾌함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