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원인이 욕망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욕망을 줄여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대개 실패한다. 그러므로 ‘~를 하지 마라’거나 ‘~를 비워라’거나 ‘~를 내려놓으라’거나 하는 식의 부정적 접근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흡연욕구를 내려놓거나 혹은 알콜욕구를 비우는 방법으로 금연, 금주에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다. 욕망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원인측을 통제해야 한다. 비만환자에게 ‘그 많은 살들을 그만 내려놓거라’고 해서 다이어트에 성공하겠는가 말이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정신차리기는 오로지 외부충격으로만 가능하다. 욕망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가도 갑자기 외부에서 강도가 침입했다거나 하는 상황에서는 재빨리 정신을 차린다. 당쟁을 일삼던 관료들도 외부에서 적군이 침략하였다면 문득 정신을 차린다. 게으럼뱅이도 외부에서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면 정신을 차려 의관을 갖춘다. 하던 게임을 멈추고, 하던 식탐을 멈추고, 하던 도박을 멈추고, 피우던 게으럼을 멈추고 정색하여 손님을 맞이하게 된다. 외부에서 뭔가 플러스 되어야 마음은 다스려진다. 동료가 마음의 문제에 빠져 있다면 외부충격으로 동기부여 하여 바로잡을 수 있다. 좋은 사람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면 대개 정신을 차린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으려면? 가만이 앉아 있는데 외부에서 소식이 찾아올 리 없으니, 자신이 외부로 나아가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더 높은 세계를 만나는 것이다. 나아가서 가족을 만나고, 공동체를 만나고, 민족을 만나고, 국가를 만나고, 세계를 만나고, 자연을 만나고, 신을 만나야 한다. 그렇게 점점 범위를 넓혀나가는 데서 진보를 만나고 기세를 만나고 에너지 흐름을 만나며 그 흐름에 올라타야 한다. 진보라는 말을 타야 한다. 달리는 말에서 내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계속 전진하게 된다. 큰 무리를 이루고 방향을 잡아 전진하여 나서면 저절로 내부에 질서가 생겨난다. 형님, 아우 서열이 생겨나며 그 사이에 충돌은 없다. 앞서가는 자는 에너지를 전달받아 뒤따르는 사람에게 전달한다. 뒤따르는 사람도 에너지를 전달받아 또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그렇게 전달받고 전달하기 때문에 형제간에 모순과 갈등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무리가 나아가던 도중에 멈추면 만가지 병통이 생겨난다. 잠복해 있던 갈등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갈갈이 찢어놓는다. 형님, 아우 멱살잡고 싸운다. 마음의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 해소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인간은 진보하는 존재이며 진보의 에너지 흐름 속에서 갈등이 용해될 뿐이다. 병리의 원인은 공동체 안에서 역할을 잃었기 때문에며 역할을 얻을 때 마음은 다스려진다. 혹은 역할에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이며 역할의 변화를 받아들일 때 마음은 다스려진다. 역시 더 높은 세계로 나아갈 때 만이 즐겁게 역할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람이 밥을 먹는 이유는 밥을 먹고 싶기 때문이 아니고, ‘먹어야 산다’는 정신, 의식, 의도, 생각의 판단을 거친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먹다보면 그러한 초기의 설정을 잊어버린다. 왜 먹는지 모르고, 단순히 먹기 위하여 먹는 결과로 된다. 그러나 뇌 안에는 알짜배기 정보가 그대로 남아있다. 욕망은 밥을 먹는 이유를 잊어버리고 먹기 위해 먹는 상황으로 치달은 것이다. 이는 지능이 떨어지는 현상이고 교양있는 사람이라면 정신과, 의식과, 의도와, 생각의 분별함이 있어야 한다. 반복되는 행동을 의심하고 점검해야 한다. 브레이크를 걸어줄 수 있어야 한다. 뇌 안에 정보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가능하다. 이는 다른 모든 욕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동작이 반복될 때 정신, 의식, 의도, 생각의 점검을 잊어버리는 이유는 뇌는 반복되는 행동 전체를 하나의 행동으로 치기 때문이다. 밥을 열 숟갈을 먹든, 백 숟갈을 먹든 뇌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행동이므로 반복하여 판단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같은 행동이 무한 반복되며 그것이 욕망이다.
욕망은 마음의 원인이 아니므로 욕망에 대응해서는 치료될 수 없다. 정신에 의해 욕망의 문제는 치료된다. 폭식을 하던 여성이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난다면 다이어트에 돌입하게 된다. 이 방식의 새로운 동기부여가 정신차리기다. 세상과 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정신차리기는 가능하다. 외부에서의 동기부여가 반드시 공간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상황전개가 외부요인이다. 니코틴중독자가 건강에 이상을 느끼고 담배를 끊는다거나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존에 없던 상황발생이므로 외부환경의 변화다. 모든 욕망은 오직 새로운 외부에서의 동기부여에 의해서만 해결되며 그것은 새로운 세계, 더 높은 세계로 나아감으로써 가능하다. 더 이상 나아갈 높은 세계를 발견하지 못할 때 인간은 퇴행하여 욕망에 빠져들게 된다. 그들은 골프중독, 알콜중독, 섹스중독, 집금중독, 게임중독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이는 호르몬 조절 실패에 불과하다. 어린이가 불안할 때 틱장애를 일으키거나, 동물원에 갇혀 스트레스를 받은 오소리가 무의미한 단순동작을 반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와 만나고 진보할 때만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깊은 산중의 스님이 얼굴에 미소를 띠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천석고황에 깊이 중독된 듯이 보인다. 그것도 하나의 행복일 수는 있으나 마음의 일처리 능력은 확실히 떨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 분들 도시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노숙자들도 알고보면 나름대로 행복하다. 근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해고될 염려도 없고 가족을 부양할 걱정도 없다. 그러나 확실히 무기력해진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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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이른 아침에
선생님의 글이 제게 많은 힘이 됩니다.
이 낯선 곳에 왜 와 있는 것인지...
이곳에서 그동안 겪어내야 했던 많은 일들이..
고통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으로
저를 성숙시키고 확장시킨 시간들이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진정한 '용기' 와 용감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결국 '이유'는 하나인 것 같습니다.
성숙과 확장의 시간들이 그저 저에게만 머물지 않기를...
더욱 용감해지고, 또한 더욱 용기를 내어야 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