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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와 우리말이 다르고 또
구조론의 용어들은 구조의 모형 안에서 성립하는 맥락으로 이해해야 하므로
의미가 다를수 있겠지요.
사랑도 대체될 수 있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을지도.
중요한건 방향성입니다.
존엄 자유 사랑 성취 행복 중에
행복이 반복되고 대체되는 욕구에 대한 응답이라면
성취는 반복-대체되지 않는 것이고
성취도 반복된다면 사랑은 반복-대체되지 않는 것이고
사랑도 반복된다면 자유는 반복-대체되지 않는 것이고
자유도 반복된다면 존엄은 반복-대체되지 않는 것이지요.
먼저 논리를 알아야 합니다.
인과율 자체를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거죠.
논리학 책에 보면 무슨오류 하는 오류의 종류가 수십가지나 되는데 이게 잘못된 거죠.
이런 혼란의 이유가 근본 인류의 모든 학문이 논리학 수학에서 유도되는 건데
그 논리와 수학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과율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지구에 한 명도 없어서 무슨오류가 수십가지 되는 혼란에 빠져버린 거죠.
원인은 시간적으로 앞서고 결과는 나중이라는 요 정도가 현재 인류가 아는 인과의 지식이고
인과율은 좀 복잡합니다.
질적으로 높은 단계가 낮은 단계의 원인이 되고
낮은 단계가 높은 단계의 작용에 대한 결과가 됩니다.
그러므로 같은 레벨에서는 인과법칙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립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같은 레벨에서 원인이 작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건 자체의 원인이 아니고 사건이 일어난 시점과 장소의 원인일 뿐이지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말하지만
옷깃만 스치는건 인과율을 성립하지 않으므로 인연이 아닙니다.
인연관계을 추론할 수 있는 단서일 뿐이지요.
이런 인과의 메커니즘을 입체적 모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시간개념이 포함된 동영상형 모형이어야 합니다.
반복되는 것과 대체되는 것을 배제하는 것이 구조론의 제 1 원칙입니다.
중복과 혼잡의 배제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욕구도 대체될수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욕구이기 때문에.
대체될 수 있고 반복될 수 있는 욕구는 진정한 욕구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말을 헛갈리게 하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대체될 수 없는 욕구가 있다면 그것이 성취고
대체될 수 없는 성취가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겠지요.
그러므로 대체될 수 없는 욕구가 있고 바로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을 해도 되겠지요.
말은 포지션이 중요할 뿐 단어가 중요한게 아니니까.
이렇게 하면 욕구와 사랑을 구분한 의미가 없어지니까 잘못된 거지만.
그러므로 단어 차원에서 이해하면 안 되고
역시 입체적 모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여간 입체적 모형 안에서 위의 포지션은 아래의 포지션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체될 수 없고 반복될 수 없습니다.
결론은 욕망을 버려라 마음을 비워라 하지 말고
반복되고 대체되는 것은 중복과 혼잡에 따른 수고로움을 피하라고 하는게 맞습니다.
욕구가 부질없는 이유는 그것이 허무하게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많은 노가다가 투입되어야 하고 따라서 비효율적입니다.
한국인이 벼를 재배하는 데는 88번 손이 가지만
그래서 米를 八十八로 푼다고도 하지만
신대륙에서는 단 한번만 손을 써도 됩니다.
땅이 넓으니까.
같은 면적에 두번 손을 쓰는 것보다
경작지를 두배 확대하는게 더 효율적입니다.
단위당 수확량이 떨어져도 전체적으로는 수확량이 더 늘지요.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욕망에 응답하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수고로운 것이고
마음밭 자체의 면적을 늘리는 것이 효율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더 높은 세계와 만나는 것입니다.
시시한 애들과 안 놀고 좀 아는 사람과 함께 하는 거죠.
가장 높은 세계는 인류가 큰 무리를 지어 문명의 진보라는 항해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그 흐름 안에서 자기 포지션을 찾을 때 위태롭지 않습니다.
인간이 고통받는 이유는 잘못 때문이 아니고
그 잘못을 물타기할 잘한게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작은 잘못을 저질러도 크게 고통을 당하고
어떤 사람은 큰 잘못을 저질러도 태연하게 잘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높은 세계와 만나서 큰 무리를 이루어 위대한 진보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흐름 안에서 작은 잘못들은
이슬처럼 부서져서 지나가버리는 것입니다.
그 흐름 안에서 인간은 욕구를 발휘해도 괜찮고, 타락해도 괜찮고, 사고를 쳐도 괜찮습니다.
사고를 치지 말아야지 하고 조심할 것이 아니라
사고를 쳐도 사고가 나지 않는 큰 항해에 편승해야 하는 것입니다.
욕구와 사랑을 분별하고
진정한 사랑을 선택하며 욕구를 억누르기 보다는
진정한 사랑 안에서는 온갖 욕구도 무방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짓 사랑 안에서는 지켜야 될 매너가 복잡하지만
진정한 사랑 안에서는 그런게 없습니다.
서로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관계라면
욕구를 나타내서 매너와 에티켓과 교양을 어겨도 그게 사건이 되지 않습니다.
서로에게 주는 것이 없으니까
작은 욕구로 충돌을 일으키는 거지요.
저의 결론은 저급한 욕구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을 택하라가 아니고
진정한 사랑 안에서는 저급한 욕구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신이 지구를 방문할 때 옷을 입어야 하느냐
옷을 입는다면 양복이 맞냐 한복이 맞냐 이런건 논외입니다.
설사 인간이 신의 고추를 봤다고 해서 그게 흉잡을 일은 아니며
신이 누드로 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거죠.
중요한건 신이냐 아니냐지요.
그러므로 당연히 진정한 사랑이라면 그 어떤한 욕구에도 자유하다'는 말씀...
제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진정한 사랑'에 대한 하나의 기준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단어자체보다는 '방향성'이 중요하다는 말씀도.. 마음에 와 닿는 말씀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만 붙잡고 갈 수 있다면
삶이 참 심플하고 명쾌할텐데요... 그리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항상 깨어 있으라' 하셨는데,
그 말씀이 바로 하느님 자신을 위해서도 그 어떤 타인이나 이웃을 위해서도 아닌
바로 저를 위해 주셨던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김기덕으로 비상할것인지.
김수현으로 재잘될것인지.
인정옥으로 네 멋대로 해도 스타일 가질것인지.
이문열처럼 서당에 갖힐것인지
이외수처럼 트위터로 나갈것인지.
또 없을까...
순환의 오류에서 벗어나는 것이 점프하는 것.
그런데 사람은 늘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 때문에 순환의 오류에 빠져 버리는 것 같습니다.
반복적으로 행하고 있지만 그 반복은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진도를 나가고 있는 것인데...
고루한 일상이나, 똑 같이 출근하고 퇴근하고, 세끼 밥 먹고 하는 등등의 반복성이 먼저 보이기 때문에 순환된다는 생각에 매몰되어,
그 반복성의 지루함에 질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즘 회사나 공장들의 특징은 지독하게 반복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에 인간이 거기서 어떤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고, 점프를 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반면에 거기서 새로움을 찾아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분업화하여 단순성을 반복하게 하는데에도 원인은 있다고 생각됩니다. 결국 자신과 환경에서 오는 압박 때문이기도 하다고 생각해봅니다.
반복되는 일상 역시 단순한 반복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구조론 사이트에 자주 들어오지만 그 형태는 반복이나 그 내용상으로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선생님의 글이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공부를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네요. 고맙습니다.
인간의 성격구조를 세단계 즉 Body-Mind-Spirit으로 보고 있는 the tripartite personality model를 제시하시면서
빅터 플랭클 박사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시더군요. 이 계층적 구조에서 bottom-up를 하거나(body에서 시작), 혹은
수평적으로 직접적으로 body 혹은 mind로 접근해서는 안되고, 바로 위에서 부터 아래로, top-down해야 한다구요..
예를 들어 육체적 고통이나 심리적 고통을 고통의 바로 그곳으로 부터 시작하면,
그 고통은 그저 절망만을 가져 올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절망을 느끼게 되는 경우 흔히 그 이유를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나 어려움 자체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고,그래서 그 어려움이나 고통이 사라지면, 절망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실, 절망을 느끼는 것은 고통이나 어려움 그 자체때문이 아니라, 고통중에 그리고 어려움중에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죠. 그래서 절망은 고통이나 어려움때문이 아니라
바로 의미를 찾지못하거나 어떤 일에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서 고통 자체가 아니라 의미를 잃거나 찾지 못하는 것이 절망의 원인이라는 설명이죠.
여기서 의미란 바로 선생님께서 제시하신 '정신'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구조의 단계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빅터플랭클 박사님께서 제시하신 모델과 선생님의 통찰이
같은 맥락인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에서야 비로서 '구조'책이 배달된다고 하니, 열심히 공부해야 겠습니다.
태평양 넘어 이곳에서도 선생님의 팬이 있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 한가지 더.. 조금 논지에 벗어난것 같기는 하지만, 욕구(drive?)와 사랑(love)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시더군요.
욕구란 대체가능한 것, 그러나 사랑은 대체가 가능하지 않은 것.
예를 들어 배가 고픈 것은 밥을 먹거나, 빵을 먹거나 여러가지 다른 것으로 충족시킬 수 있으니, 욕구이고,
그러나 '사랑'이란 '그것'아니면 안되는 것, '이 사람'이 아니면 안되는 것.
예를 들어 이 사람으로도 되고, 저 사람으로도 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성적인 욕구이며,
그래서 사랑은 '오직 하나'인 것이여야 한다고 설명하셨는데, 제게는 명쾌하게 이해가 되더군요.
(가장 아래 단계의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욕망이 바로 욕구를 포함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