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태어나고도 가장 늦게 이루어지게 된 학문이 심리학이다. 심리학은 종교와 신앙의 영역에 먼저 자리를 잡았다. 많은 종교들이 다투어 천국행과 극락행을 표방하며 허풍을 떨고 있으나 이는 논할 가치가 없는 것이고, 종교의 실질적인 기능은 신도의 마음 다스림을 돕는데 있으니 종교의 탄생과 더불어 심리학의 관점은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원시신앙 단계에서 주술사들이 부적이나 터부나 토템 따위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테크닉을 구사하는 것이 이미 넓은 의미에서 심리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수만년 전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에 벽화가 그려졌을 때 이미 인류의 심리학적 시도는 출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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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리비도설은 황당한 소설에 지나지 않지만 학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것이 구조원리상 제 1번 포지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제 1원인처럼 연역논리의 출발점을 제시한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듯이 어떤 문제이든 출발점만 찾으면 거의 반은 성사된 셈이다. 프로이트는 확실히 잘못된 출발을 했지만 구조원리상 반드시 하나의 출발점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바로 지적한 바는 평가할만 하다.
그러므로 소설을 쓰더라도 ‘정주영은 어린시절 지독한 가난을 경험했기 때문에 어른이 되면 부자가 되어야지 하고 결의했다’고 써야지 ‘정주영은 원래 재물욕이 있었다. 그래서 돈을 벌고자 했다’고 쓰면 안 된다. 그것은 설득력없는 잘못된 전개이다. 변학도는 원래 욕심이 지나친 나쁜놈이라는 식으로 쓰면 안 된다. 원래 그렇다면 무죄다. 원래 인간이 그렇게 태어났다면 나쁜 것이 아니다. 이는 정신병자가 범죄를 저질러도 시설에 격리될 뿐 처벌받지 않는 것과 같다. 변학도는 교양이 없어서 잘못된 판단을 했기 때문에 그 오류를 깨우쳐주기 위하여 징벌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신은 자신의 상태와 환경간의 충돌에 따른 모순구조이다. 그러한 모순의 크기만큼 에너지의 낙차가 발생하며 학습하기에 따라서 그것이 욕망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이 맞닥들인 환경이 배고픔이고 자신의 상태가 굶주림이라면 그만큼 식욕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는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전개에 따른 의식적인 학습의 결과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무수하게 경험한 것이 축적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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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자신을 존중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그냥 할아버지가 손주 어르듯 무턱대고 오냐오냐 할 수도 없고
세력을 이루어야 하고 그 세력이 가는 방향을 알고 있어야 하오.
그 세력의 전진 안에서 자기 위치를 알고 있어야 하오.
그걸 모르면 자기만 존중하고 남은 차별하게 되며
남을 차별하면 그게 반사되어 자신도 차별한 결과로 되오.
구조원리상 타인을 존중하지 않으면 자신도 존중하지 않는 것이오.
왜냐하면 이러한 논리는 나를 나 아닌 영역까지 연장한다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은 축구팀이 시합을 하되 나도 이기고 상대팀도 이기고 관객도 이기고 심판도 이기고
그 자리에 모인 모두 이기는 경기를 하는 것 만큼이나 어렵소.
모두 이기는 경기를 하려면 최고의 기량으로 최고의 플레이를 해서
지난해보다 진보한 무엇인가를 그 현장에 남겨놓지 않으면 안 되오.
아무 남는 것이 없이 그냥 승자는 축제를 벌이고 패자는 울고 있다면 허망한 것이오.
그냥 존중하겠다는 것은 허망한 것이고 진보하여야 하고 혁신하여야 하고 우일신하여야 하오.
더 나아지는 것이 존중하는 것이오.
그런 관점에서 가장 크게 한국인을 존중한 사람은 세종대왕이라고 보오.
정신분석학이 그 출발점에서 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프로이드 이전에 는 종교적으로 심지어는 잔인하게 다루어졌던 ‘미침(being crazy mentally)’의 문제를 성직자의 손에서 비성직자인 치료자의 손으로 넘겨오게 했다는 점에서 그 공헌은 참으로 큰 것 같습니다.
또한 정신의 문제(mental issues)를 성욕이나 인간의 타고난 공격성으로 설명하려 했지만, 이드(ID)와 초자아(super ego)와의 갈등(conflict)의 인해 발생한다고 본 불안(anxiety)을 피하고자 하는 자아의 무의식적인(unconscious) 여러가지 방어기제(self-defense mechanisms)들을 ‘의식(conscious)’의 수준으로 인식(aware)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치료의 최종 목표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깨달음’으로의 노력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애들러, 융, 빅터플랭클등과 같이 심리치료를 발전시킨 분들 모두 처음에는 정신분석학에 매료되었고, 그들 나름대로의 이론을 발전시키게 되었으니, (물론 프로이드 입장에서는 배신이고 반란이였지만. 그래서 서로 맞서게 되었지만) 말씀하신 것처럼,정신분석학이라는 출발이 없었다면 현재 심리치료는 아직 태동 조차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아쉬운 것은 현대의 한국의 정신과 훈련이 제가 알기에는 아직 정신분석의 수준에 치중하고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건 전적으로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로고테라피를 함께 공부하고 계신 교수님께서 첫날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전 심리학을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이 이론이다, 저 이론이다.. 이렇게 치고 박고 하는 그 전쟁판에 왜 끼어 듭니까?”
그래서 신학을 하셨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여전히 그 치고 박고는 계속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참 심리치료의 여러가지 이론들을 배울때 (Theories of Personality; Theories of Counselling라는 제목으로)
제가 느낀 것은 모든 이론들이 발전시킨 분들의 ’ 개인적인 경험들’으로 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였습니다.
프로이드는 프로이드의 개인사와 사적인 경험으로 부터, 또 애들러는 소아마비라는 신체적 열등함으로 부터,
또한 빅터 플랭클 박사는 자신의 종교적인 배경과 나치수용소에서의 경험으로 부터… 그래서 어떤 이론이 옳고 그르다기 보다는, 이론들의 수준과 내용은 그 이론을 개발한 사람의 삶의 경험 수준과 내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편 제 자신도 제 경험에 따라 심리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었지요.
실제로 그때 학기말 숙제가 ‘자신만의 심리이론 모델을 개발 하라는 ‘논문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선생님께서 나누어주신 내용은 제가 접한 어떤 심리이론이나 원리보다 가장 명쾌하고 심플해서 제 마음속에 잘 정리가 되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아직 제게는 방대한 내용이여서 한구절 한구절 다시 읽어가며,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신은 하나의 파이프와 같소. 외부의 것을 흡수하여 내부에서 처리하고 다시 외부로 흘려보내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며 일(work)이오. 이때 행동과 욕망을 남기오. 행동은 그 일에 성공한 것이고 욕망은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오. 욕망은 그 일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오. 그러나 욕망은 다음 일에 영향을 미치오. 그러므로 논리적인 분석을 하지 않으면 욕망이 원인으로 보여지기도 하오. 이는 착오이오. 원인은 정신이며 그것은 환경과의 대면이오. 문제는 인간이 그 환경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이오.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이오. 호랑이에 물려가면서 눈을 감고 호랑이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흔히 볼 수 있소. 그것이 인지부조화. ‘아냐 난 지금 고양이와 함께 산책하는 거야. 내가 호랑이에 물려가다니 설마 그럴 일이 있겠나?’하고 편하게 생각해 버리는 것이오다. 우리가 노력하고 성취하고 하는 모든 일들이 인류문명의 진보라는 호랑이에게 물려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오. 권력화된 자본의 전 지구적인 팽창이라는 호랑이에 물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오. 시장이 권력화 되어 정치를 압도하고 있는 현실이 호랑이에 물려가고 있는 것이오. 지금 현대와 삼성이 전 세계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고무된 한국인들이 현대와 삼성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게 좋다 싶어서 이명박을 찍은 현실을 인정해야 하오. 이걸 현실로 인정해야 이야기가 되오. 지식인들이 이걸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이 이건희와 정몽구를 불러서 혼내주면 다 잘될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지? 재벌해체 해버리면 되잖아? 아냐?’ 이러고 있는 것이오. 호랑이를 고양이라고 우기면 도무지 대화가 안 되는 것이오. 호랑이 등에 올라탄 지금 호랑이를 죽일 수는 없고 길들여야 하오. 이건 두 눈 부릅뜨고 똑똑히 보아야 하는 현실이오. 쓰다보니 삼천포로 갔소.
이건 그냥 쓰는 얘기이오^^
요즘 문득 내 마음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 ^^;ㅋㅋ....참...
내 마음이 가난하구나를 느꼈소.
마음이 가난하여...등등의 시구절이나 잠언등을 볼 때는 그런가보다 하며 지나갔는데...
내 마음이 가난하다는 느낌을 직접적으로 느껴보기는 처음이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을 느끼니..조금 순간 당황했지만....바로 마음이 뭔가로 가득차오름도 느꼈소.
알면 해소되어버리는거....아마도 그것은 마음이 가야할 방향성을 인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요즘 올려지는 글들을 보며 내가 그동안 느끼면서도 내 의식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부분을 인지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소.
저역시 요즘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요즘에서 느껴지는 갈등이나 그런 감정들에 있어서 무관할 수는 없기에...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마음이 가난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네요.
시구절 등에서 사람들이 마음이 가난하다 라는 말을 썼던 것은 실제로 그런 마음을 느꼈기 때문 이었고, 그것은 사실이었던 셈..... 그들은 진실을 얘기했던 것이었다는 것....
그런 진실들을 내 마음을 통해서 내가 직접 확인해보는 절차를 거침으로 인해서 마음의 구조, 정신의 구조, 의식의 구조,의도의 구조, 생각의 구조, 감정의 구조가 본질적으로 서로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것 같소.
아란도 님 .. 댓글 전체 뜻 공감하면서...
지엽적인 것이지만 마음이 가난하다 는 언어 혼란 에 대해 아는체(?) .. (재미로 이해해 주시리라 믿으며)
마음이 가난하다 는 표현은 성경의 번역오류라고 하더군요... 가진 것 없이 가난해도 마음은 풍요(부자)로워야.....
도마복음 원전 (도올의 번역 참조) 에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에 가난 은 원래 불교(또는 예수 탄생 이전의 인도 중동 당시 종교)
용어 인 공(비움)하다 를 오역한 거라는데 ..........공감이 가더군요
마음이 공한 자는 복이 있나니.... 불교적 어원.... 무아의 경지인 욕심을 비운 ... 空을 깨달은 자 ... 복이 있나니 ^ ^#
구조론으로 접근하더라도 정신 의식 이 가난하다 .. 좀 이상하지요.. 생각이 가난하다? 그것도 ㅎ
정신은 존엄하고 마음은 풍요로워야 하고 감정/욕망은 절제 되어야.....................
님이 마음이 가난하다 했을 때 욕심이나 욕망이 작다는 뜻으로 저는 이해했으니 글 자체에 이의제기는 당연 아닙니다
모든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_^
^^ 좋습니다. 서로 댓거리를 주고 받는 다는 것에서요.
저는 해석보다는 그 사람이 쓴 의도를 파악해서 마음이 가난하다라는 뜻을 살펴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의 심중에서 마음이 가난하다.라고 표현 했다면 그 표현하는 마음 상태가 어떤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서 얘기했다고 보시면 될듯합니다.
그냥 그 때의 제 마음을 보니 마음이 가난하다라는 표현과 맞아 떨어진 것이지요.
성경이나 불경의 표현은 말 그대로 탐진치가 없는 상태의 마음을 얘기함이기에
그 표현도 맞는 얘기이겠지만,
제가 표현한 것은 ^^.... 뭔가를 체우려 한다고 했을 때..왜 채워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원인이 될 것이고, 갈망하거나 갈증을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의 근본 원인과 이유가 될 것이기에...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난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들은 불만족이라는 것이지요.
무엇을 해도 만족되지 않고, 조금은 우울한 느낌과 무기력을 동반한다는 것에 대해서....
하여 그 이유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갑자기 내 마음에서 찾아오니 그것을 느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꼬투리 삼아서 쫓아 들어가보니...마음이 가난하다라는 말을 가져다 붙일 수 있는 거였고, 그 말이 가장 합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마음이 비어 있으면 공하다고 하지만....정말 내 마음이 비어 있더라구요. ㅋㅋ
나의 내면이 공허하고 조금은 삭막하게 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요.
어찌보면 어떤 것들에 대하여 욕망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욕망하는 것에 대하여 욕망의 끈을 놓아버린 상태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나의 내면과 생각과 행위들이 조금은 불일치를 보이고, 그래서 무기력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정말 내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뭔가 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 상태에서 뭔가 해소되어 버리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뭐 ...이런 얘기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하다.라는 것 자체가 공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을 봄으로 인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 원하지 않는 것 등등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을 하여야 방향성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이기에 이러한 결과로 뭔가 마음이 밸런스를 회복하기에 공해지는 것이 아닌가? 진정으로 비워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다시 생각해보게 되네요.
채울 수 있어야 비우는 것이기에 텅빈 상태에서는 비울 수 없고, 텅빈 곳에 뭔가를 채워야 비워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지식은 채울 수 있어도 마음은 쉽게 채울 수 없는 이유는 마음은 소통을 하기 때문이겠지요.
마음을 채우는 것은 소통에 있다고 보니까요.
제 마음이 가난하다고 생각되었던 이유는....아마도 제대로 세상과 소통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며칠전에 본 달은 마음을 비웠더니 오늘 달을 보니 다시 차오르고 있군요.^^
이는 결국 인간의 마음이 병드는 이유가 "자아존중감"의 결여에 있다고 본 현대 심리치료의 통찰과도 통하는 바이오.
이로써 구조론 심리학의 토대가 다져졌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