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에 쓴 글을 고쳐쓰며 내용을 추가하였으므로 시점의 불일치가 있습니다. 여러 토막을 부분 발췌했기 때문에 내용이 연결되지 않습니다. - ‘네멋대로 해라!’ 이게 좋은 거다. ‘바르게 살아라’고 말하는건 정말이지 바보같은 거다.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이익을 보는 시스템을 세팅해 놓는게 현명한 거다. 자꾸만 ‘바르게’를 외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바르게 사는 사람이 손해보는 사회라는 거다. 왜 사회를 바꾸지 않고 사람탓을 하느냐 말이다.
곡쟁이가 운다. 곡쟁이 역할 정도야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는 듯이 잘도 운다. 그 사람 인생에서 맡은 많은 배역들 중에 가장 멋드러지게 연기해낸 배역이 있다면 아마 그 배역일 것이다. 남편역할, 아내역할, 부모역할, 자식역할 다 못해도 곡쟁이 역할은 거뜬하게 해치운다. 에이고 데이고 잘도 한다. 서럽게도 잘 한다. 눈물 흘리며 잘 한다. 머리칼 쥐어뜯으며 잘도 한다. 땅바닥 내리치며 잘 한다. 어차피 인생은 한 바탕 연극이 아니던가? 다음 사이트 초기화면에서 본 ‘낸시랭이 소비되는 방식과 그의 한계’, <― 이런 글은 정말이지 역겨운 것이다. 보나마나 자본주의, 상업주의, 상품화 어쩌구 결론은 없는 뻔한 글 아니겠는가? 촌넘의 질투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지식도, 신분도, 인격도 내가 더 높은데 왜 저런 천한 것이 나보다 인기를 끌까?’ 하고 시샘하는 그런 거. 곡쟁이는 장례식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머리칼을 쥐어뜯고 퍼석 자빠진다. 망자가 누구인지 확인도 않고 눈물 왈칵 쏟아낸다. 문상객이 감탄하며 ‘거 곡쟁이 한번 잘 불렀네’하고 상주를 칭찬할 정도로 잘 해낸다. 평론가라는 이름의 곡쟁이들 역시 기다렸다는듯이 타령조로 뽑아낸다. 너절하게 잘 뽑아낸다. 상주가 곡비를 부르지 않아도 문상객만 모여있으면 곡 나온다. 자동반응이다. 필자가 가장 혐오하는 부류는 외국여행 가서 현지인 삐끼 욕하는 자다. 그 지역민 옷이 더럽네, 바가지를 씌우네, 냄새가 나네, 속임수를 쓰네, 불쌍하네, 어떻네 하는 자다. 그 현지인의 꼬질한 모습이 바로 얼마전까지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이었다는거 모르고. 그 현지인 입장에서 가장 역겨운 방문자가 누구이겠는가? 바로 그런 자다. 그 여행자의 눈빛은 현지인 삐끼의 눈빛과 완전히 같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만약 그대가 어느 나라를 여행하거든 그 나라에서 가장 멋지고 똑똑한 인간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당신의 여행은 실패다. ‘오래된 미래’를 쓴 호지 여사가 지구촌 마지막 오지 중의 하나인 라다크에서 가장 신성한 모습을 보고 왔듯이 말이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삐죽하게 솟은 산과 평평한 들판에서 있지도 않은 무언가를 찾으려고 고개를 두리번거릴 할 때, 호지 여사는 민초의 삶 속으로 성큼 걸어들어갔다. 어떤 형태로도 프로그래밍 되지 않은 가장 순수한 삶을 찾아내고, 가장 건강한 영혼의 노습을 그려낸 것이다. 공원을 거닐다 보면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태어날 때 부터 인간의 손에 길러져서 한 번도 개를 구경하지 못한 개가 있다면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할까 개라고 생각할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개는 개를 보고 즉각 반응한다는 것이다. 개를 생전 처음 본 개도 금방 반응한다. 띠띠띠띠 신호가 간다. 멍멍멍멍 응답한다. 돼지는 돼지를 보고 금방 반응하고 부처는 부처를 보고 바로 반응한다. 필자가 문제삼는 부분은 반응했다는 거다. 형편없는 여행자는 삐끼를 보고 금방 반응하더라는 거다. 곡쟁이는 영구차만 봐도 눈물을 쏟아내고 3류 평론가 역시 기다렸다는듯이 타령을 뽑더라는 거다. 왜 반응하는가 말이다. 둘째로 혐오하는 부류는 월드컵 길거리 응원하는 평범한 시민 욕하는 자다. 좌파 지식인입네 하는 자들 중에 많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모습만 보면 줄 세우고 싶은 완장본능이 작동한 거다. 유인촌이 울고갈 완장근성이라니. 이것도 자동반응이다. 그래서 문제다. 놓여난지 3초만에 다시 미끼를 무는 붕어처럼 1초의 고민도 없이 바로 반응온다. 바로 낚인다. 인생에 낚이고 삶에 속는다. 세번째로 혐오하는 부류는 낸시랭 사생활이니 강의석군 비리니 하며 남의 사적 영역 건드리는 자들이다. 프라이버시니 개인주의니 하는 현대사회를 규정짓는 용어들은 우리보다 백년 먼저 이런 저질들의 작태를 경험한 선진국 아저씨들이 이런 식으로 찐따붙는 봉건 부족민들을 떼버리려고 만들어 놓은 용어가 아니겠는가? 제발 떨어져라. 번개같이 자동반응 하는 것들에게 하는 말이다. 세상은 요지경. 각자 재주껏 먹고 사는 거. 빨아먹든, 빌어먹든, 뜯어먹든 따지고 보면 그게 다 기생질. 신문기자라는 기생은 양복이라도 걸쳤으니 그럴듯한 일패기생이고, 낸시랭은 관기 축에도 들지 못하는 사창이라서 안쳐주는 삼패기생이라는 건가? 내가 보기에는 오십보백보다. 기실 평론가라는 것들이 다 기생들이 아니던가? 누구 비위 맞춰주고 몇 푼 버는 것은 똑같다. 강의석이나 낸시랭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를 논한다면 저급한 거. 집단지성, 집단지능, 집단인격의 관점에서 그가 인류의 보폭을 넓혔는지 좁혔는지가 중요하다. 임금이 정치를 하되 가장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소중한 영토를 잃어먹는 것이고, 가장 잘한 것이 있다면 영토를 크게 넓힌 것이다. 영토를 팔아먹는 자는 진보와 보수를 떠나 공공의 적이 되며, 이는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다. 가치판단의 첫 번째 기준은 인류의 지적 영토, 상상력의 영토, 프라이버시의 영토를 넓혔는가 좁혔는가다. 평론가나 기자라는 부류는 다른 사람이 개척한 지적 영토에 뛰어들어 재빨리 점포 내고 기반 닦으면서 그 영토가 깨끗하니 더럽니 하고 불평하는 부류다. 다 그렇진 않겠지만 대개는 그렇더라. 지식인입네 하는 3류 불평꾼들 때문에 한국인의 마음은 자꾸만 좁아진다. 집단지능의 아이큐를 떨어뜨린다. 인간 상상력의 제한은 어떤 경우에도 해롭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의 영토를 넓혀가지 않으면 안 된다. 상상력의 영토, 창의력의 영토, 자유의 영토보다 가치있는 것은 없다. ###
오랜 식민지와 분단과 독재의 질곡에 시달리며 길들여진 대중의 노예근성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들은 자신을 노예로 규정해놓고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자신을 이끌어줄 ‘주인님’을 기다린다. 별 것 아닌 연예인들에게 ‘공인’이라는 굴레를 씌워 주인님의 모범을 요구한다. 넘치는 끼 하나만으로 연기자가 된 그들에게 주인님의 모범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대중은 그들을 ‘모범’이라는 감옥에 가둬버린다. 연예인들은 대중으로부터 모난 놈으로 낙인이라도 찍힐까봐 전전긍긍하게 된다. 연기자들은 점차 자기 내면으로부터의 갈구하는 목소리에 응답하지 않게 된다. 타고난 끼를 부리지 않게 된다. 변덕스런 대중의 수요에 공급하는 눈치빠른 장사꾼으로 전락해 버린다. 대중이 그들 연예인들의 날개를 꺾어버렸다. 새장 속의 앵무새로 만들어 버렸다. 끼가 넘치는 그들, 끼를 주체하지 못하여 무수히 사고를 치는 그들을 공인의 모범이라는 감옥에 가두어서 새장 속의 새로 만드는 것보다 그냥 사고를 치게 냅두는 것이 더 얻는 것이 많다. 공동체의 이익으로 귀결된다. 그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왜? 인류의 집단지능은, 인류의 상상력은 그들의 무책임한 도발에 의해서만 높아지기 때문이다. 예술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갈 데 까지 가보는 것이 예술이다. 바로크식의 돔은 웅장할대로 웅장하고, 고딕식의 첨탑은 뾰족할대로 뾰족하고, 로코코식의 궁전은 화려할대로 화려하고 제각기 갈데까지 가보는 거다. 화가는 빛과 색의 극한을 탐구하고, 연주가는 소리의 극한을 탐구하고, 과학자는 물질의 극한을 탐구한다. 다르지 않다. 과학자의 지식만 심오한 것이 아니고 연예인의 끼도 심오한 것이다. 연예인이 타고난 끼로 갈데까지 가보는 것이나, 아인슈타인이 물질을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어 그 극한을 탐색하는 것이나 같다. 결과는 인류 자유의 영토 확장이다. 과학은 자연이 가진 물질의 힘에 맞서 인간이 가진 기술의 힘이 우위로 서게 하는 것이며, 철학은 신과 운명에 맞서 인간과 삶이 가치판단의 우위에 서게 하는 것이며, 예술은 환경의 억압에 따른 고립에 맞서 공동체의 소통이 우위에 서게 하는 것이다. 과학이 없었을 때 인간은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았다. 철학이 없었을 때 인간은 소극적으로 운명에 순응할 뿐이었다. 예술이 없었을 때 인간은 서로 단절된 채 고립되어 있었다. 과학자가 발명하자 인간은 집을 짓고 옷을 기워 비바람을 막았다. 철학자가 길을 열자 인간은 더 이상 신탁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예술가가 연주하자 인간은 고립된 동굴에서 나와 너른 광장에 모여 예술가의 노래를 들으며 대화를 시작했다. 연예인의 역할이 과학자와 다르지 않고, 철학자와 다르지 않고, 예술가와 다르지 않다. 철학자는 기술의 극한을, 철학자는 정신의 극한을, 예술가는 소통의 극한을, 연예인은 삶을 가득채우게 하는 끼의 극한을 탐구한다. 과학은 인간에게 자연을 다루는 힘을 주었고, 철학은 인간에게 정신을 다루는 힘을 주었고, 예술은 인간에게 소통하는 힘을 주었고, 연예인은 인간에게 개인의 영역을 다루는 힘을 주었다. 그들은 두려움없이 나아가 각자 삶의 극한을 탐색하고 와서 그 성과를 인류에게 보고한다. 그 과정에 일탈하여 죽어간 이도 있고, 법의 심판을 받는 이도 있고, 스스로 무너지는 이도 있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삶의 전사다. 그 결과로 인류의 삶은 더욱 풍성하게 된다. 무엇이 두렵다는 말인가? 연예인은 본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 있는 자다. 연예인이 떠나자 군중의 고독함이 드러났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 있던 자가 떠나니 사람과 사람 사이가 서먹해졌다. 그 사이에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돌아볼 일이다. ### 우리는 유쾌 상쾌 통쾌한 민중의 에너지로 거침없이 밀어붙인다. 우리는 상상력의 힘으로 좌파의 지적 장벽을 허물고, 혁신의 에너지로 수구의 기득권 장벽을 무너뜨린다. 우리는 좌파먹물과 수구기득권의 팽팽하게 교착된 전장을 떠나, 신대륙에서 새로운 전단을 열어나간다. 그들은 죽을때까지 그렇게 서로 뒷다리 잡고 엉겨붙어있게 놔두고 우리는 우리대로 훨훨 날아간다. 신천지로 간다. 진실로 말하면 자유주의, 개인주의야말로 진정한 진보다. 왜인가? 인류의 문명이 진보할수록 개인의 영역이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이는 물리적 변화라서 이데올로기로 편가를 사항이 아니다. 왼쪽의 먹물이 뭐라하든 오른쪽의 깡패가 뭐라하든 실제로 개인의 영역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이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자동차를 이용해도 옛날에는 운전기사의 역할이 중요했다. 지금은 손수운전을 하니 운전기사의 역할이 축소된 거다. 관공서를 이용해도 요즘은 인터넷에서 서류를 떼니 공무원 탓할 일이 적어졌다. 신용카드를 써도 개인이 자기신용을 관리해야 한다. 신입사원이 입사를 해도 이제는 개인이 스펙을 관리해야 한다. 블로그다 홈피다 트위터다 해서 개인의 영역이 커졌다. 줄만 잘 서면 만사형통이었던 시대는 가고 적극적으로 자기관리를 해야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실질적 변화는 현장에서 물리적으로 진행되므로 좌파먹물들이 아는 척하고 떠들어봤자 전혀 먹히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역할증대를 사전에 감지하고 대중들에게 알려준 생각있는 좌파지식인은 지구상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어떻게 대중을 줄 세우면 혁명이 되나 하고 공상하며 딴짓거리 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중을 요렇게도 줄세워보고 조렇게도 줄세워보고 하며 실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중이 갑자기 천 만명씩 월드컵 응원하는 줄에 가서 서 있으니 ‘파시즘의 광기가 우려된다’니 어쩐다니 하며 성질을 부리기도 했다. 그들은 눈 뜬 장님이다. 변화하는 현장의 트렌드를 전혀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20세기는 산업화의 시대이고 21세기는 정보화의 시대이다. 20세기의 산업화는 포드시스템으로 줄만 잘 세우면 먹는 시대였다. 포드는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노동자를 길게 줄세워서 톡톡히 재미를 봤다. 마르크스는 사회에 컨베이어 벨트를 설치하려고 했다. 그들은 정당을 결성하고 사회운동을 조직하고 노동자를 통제하면 그게 사회의 컨베이어 벨트가 되어 사회가 생생 잘 돌아갈줄로 믿었다. 교육, 의료, 복지 등이 현장에서 일부 먹히기도 했지만 그게 다였다. 대개는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21세기는 다르다. 줄세우기 초식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인터넷은 줄을 세우지 않고 점프한다. 컨베이어 벨트 없이도 플래시몹은 성공한다. 컨 베이어 벨트는 순서대로 전부 한 줄에 꿰는 것이다. 인터넷은 동시에 수백만을 상대하는 것이다. 이건 순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이다. 컨베이어 벨트 아이디어 하나 가지고 아직도 고집 피우는 구식 아저씨들은 이제 그만 뒷전으로 물러나야 한다. 세상이 달라졌다는 말이다. 세상이 실제로 바뀌었으니 입장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고, 눈높이를 바꾸고, 시선을 바꾸어야 한다. 필자가 강의석을 논하는 입장도 그렇다. 옳으니 그르니 하며 개입하는 그 자체로 구시대의 폭력이다. 나는 그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지 않는다. 판단하려면 개입해야 하고, 남의 일에 개입하는 행위 그 자체를 폭력으로 보기 때문이다. 퍼포먼스에는 특허가 없겠지만 강의석이 고안한 무대는 그의 창의한 영역이고 그 영역 안으로 들어서는 행위 자체가 표절이나 모방과 같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동이다. 강의석의 퍼포먼스는 말하자면 그의 지적 블로그인 것이다. 각자 자기 블로그나 가꿀 일이지 남의 블로그에 가서 시비할 일은 아니다. 90년대 PC통신 시절에는 동호회마다 의장이 있어서 적극적으로 회원관리를 했지만 지금은 각자 자기를 관리하는 블로그 시대이다. 의장은 사라졌고 완장도 필요없다. 세상이 원할하게 돌아가려면, 우리가 양팔간격으로 시원하게 벌려야 한다. 도무지 타협이 안 되는, 그래서 서로 간의 지나친 밀착을 막아주는, 개성이 강한 다양한 개인들이 있어주어야 하고, 그런 다양성의 출현 자체를 반긴다. 내막은 무시한다. 무조건 환영이다. 이것이 21세기 방식, 인터넷 방식이다. 엄기봉 씨의 맨발. MBC의 보도는 ‘맨발의 기봉이 그 불편한 진실’이라는 제목이다. 무엇이 불편한 진실이란 말인가? 무엇이 불편하지? 나는 MBC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불편한건 맞는데 겨냥이 잘못됐다. 타깃을 잘못 찍었다. 누가 잘못했지? 최초로 보도하고 나몰라라 한 KBS 인간극장? 열 몇평짜리 작은 집 한채 건축비만 달랑 던져주고 발뺌한 영화사?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으나 결정적으로 300만원에 눈이 먼 이장님? 엄마를 양로원에 보내고 돈을 엉뚱한 데 쓴 여동생? 여동생을 꼬드겨 돈을 뜯어낸건 아닌지 의심받은 목사부부? 진짜로 잘못한 것은 누군가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태도이다. 바로 그것이 발뺌하여 자신의 책임을 면하려는 비겁한 심리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인용된 탈무드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굴뚝청소를 마치고 기어나온 두 굴뚝청소부 중 한 사람은 검댕이 묻어 얼굴이 시커멓고 한 사람은 검댕이 묻지 않아 얼굴이 하얗다. 누가 먼저 샘터로 달려가서 얼굴을 씻겠는가? 검댕이가 묻어 얼굴이 검은 청소부? 아니다. 역설이다.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판단한다. 얼굴이 흰 청소부는 얼굴이 검은 청소부를 보고 자신의 얼굴도 검을 것이라고 믿는다. 얼굴이 흰 청소부가 먼저 샘가로 달려가서 씻는다. 천만에! 역설의 역설이다. 반대의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현실은 이중으로 꼬여 있는 법이다. 두 굴뚝 청소부 중 어느 누구도 그 굴뚝에서 깨끗한 얼굴로 나올 수 없다. 한국사회의 총체적 수준이 이 지경인데 강남졸부들만, 서울대학벌만, 소망교회 신도들만 특별히 얼굴이 깨끗하다든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부자마을에 다 잘 사는데 단 한 사람이 헐벗고 굶주린다면 그 부자들이 높은 담장을 쌓고 검게 선팅한 외제차를 타고 다니며, 그 가난뱅이와 마주치지 않으려 애쓴다 해도 그 둘러친 담장의 높이만큼, 그 칠해놓은 선팅의 검은 색깔만큼 그들의 마음은 허기지고 굶주려지는 것이다. 가난뱅이 얼굴이 꼬질꼬질해져서 그 가난을 속이지 못하듯이 부자들의 마음도 꼬질꼬질해져서 그 비겁한 마음을 속이지 못한다. 그 얼굴에 그 눈빛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바로 이것이야 말로 모두가 알아야 할 불편한 진실이 아닐지. 불편한 진실은 뫼비우스의 띠 처럼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가위로 분명히 가운데를 뚝 잘랐는데도 자르고 보니 결과적으로 하나로 이어져 있더라는 거다. - ‘뫼비우스의 띠’ 역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한 챕터이다. - 장애인 동생을 이용하려 한 파렴치한 여동생과 돈관리에서 잘못을 저지른 이장과, 충분히 챙겨주지 못한 KBS 방송국과 소극적으로 행동한 영화사를 비롯한 주변사람들의 그 숨기고 싶은 내막이 불편한 진실이 아니라 이 하늘 아래에서 누구도 떳떳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진정 불편한 진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MBC는 불편한 부분을 가위로 잘라내서 특별히 지목했지만 다 자르고 보니 MBC도 한 몸뚱이로 거기에 들러붙어 있었던 거다. 엄기양 이장이나 목사부부, 여동생, 그리고 주변인물들 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다. 네티즌들이 모르고 마구 비난하는 리플을 달지만 특별히 악한 인물은 그곳에 없다. 전여옥 같이 생긴 인물만이 악을 저지르는게 아니다. 보았듯이 엄기봉 씨 주변에 떳떳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엄기봉 씨가 특별히 운이 나빠서 하필 문제있는 인간들 속에 던져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엄기봉씨 주변의 수준이 이 나라 대한민국의 수준이다. 끝내 아름답지 못한 드라마가 되었다. 결국은 모두가 실패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엄기봉 씨 뒷얘기를 꾸준히 보도한 오마이뉴스도 예외는 아니다. MBC도 마찬가지다. 본질은 따로 있다. 터놓고 상담할 한 명의 지성인 친구가 그에게 없었던 거다. 엄기봉 씨 주변에 식견있는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어도 그는 불행해지지 않았다. 누가 잘못해서 잘못이 일어나는게 아니라 하는 일이 잘못되어서 잘못이 일어나는 것이다. 지성의 문제다. 악당이 잘못을 저지르는게 아니라 지성인이 도와주지 않으면 잘하려고 해도 결국 잘못되고 만다. 엄기양 이장이나 여동생은 잘하려고 했는데 식견이 부족해서 일을 그르치게 되어 잘해내지 못한 거다. - 하긴 유인촌이나 조재현이나 김흥국도 잘 하려는 의도는 있었을 거다. 지성이 없기 때문에 결국 잘해내지 못한다. 개인을 탓할 일이 아니라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다. - 확실히 한국은 교육과잉이다. 왜 모두들 자식을 대학에 보내려는 것일까? 독일이라면 어떨까? 혹은 뉴질랜드라면 또 어떨까? 노동자와 교수가 같은 펍에서 맥주를 마신다.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쉽게 친구가 된다. 한국은? 계급이 다르면 대화하지 않는다. 세대만 달라도 대화하지 않는다. 옛부터 부부유별이라 했으니 성별도 장벽이 된다. 존댓말이라는 장벽도 있다. 끔찍한 지역주의도 있다. 별의별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 사람이 제대로 사회생활을 하려면 주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성인 친구가 있어야 하는 것이며 한국인은 노동자와 교수가 사귈 수 없으므로 모두가 대학을 나오는 수 밖에 없다는 거다. 모든 사람에게 대학생 친구 하나씩 붙여주는게 교육의 목적이다. 물론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다 지성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이다. 분명히 문제가 있다.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불행에는 확실히 이유가 있다. 친구 나서고 친척 나서면 얽히고 설켜서 절대 불행해진다. 공부 많이 한 똑똑한 친구를 얻으라는 말이 아니다. 이건 공부하고 상관이 없다. 집단지성, 집단인격, 집단지능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풀어가는 관례와 문화를 일구어야 한다. 2010년 월드컵에서 아프리카 팀이 특히 고전한 이유는 부족이 다르다고 패스를 하지 않는 등의 아프리카 관습 때문이라고 한다. 가나가 그나마 약간 선전했을 뿐 대부분의 아프리카팀은 팀에 내분이 있었다. 가족과 친지들이 나서면서 얽히고 설켜서 문제가 더욱 꼬이는 한국의 병폐도 이와 유사하다. 한국팀도 파벌이니 인맥이니 해서 문제가 있었지만 네티즌과 언론이 굉장히 많은 비판을 가했기 때문에 그나마 허정무호도 상당히 나아진 것이다. 가족과 친지 중심으로 몰려서 달팽이처럼 안으로 숨어들지 말고 폭넓게 대화하며 소통하는 지성의 광장으로 나오라는 거다. 그러한 개방된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는 거다. 그러나 아직은 체면이니 위신이니 해서 가족과 친지 중심의 내부적인 소통에 매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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