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강에서 소동파까지
(이어쓰는 글입니다.)
혜강에서 소동파까지 인류최고의 발명품은 무엇일까? 중국의 4대발명이라는 화약, 나침반, 종이, 인쇄술 따위? 자동차, 비행기와 같은 탈것? 핵무기와 같은 전쟁무기? TV, 영화, 인터넷과 같은 미디어들? 이런 따위는 안 쳐주는 거다. 시시하다. 이런 것들은 그냥 쓰고 버리는 물건에 불과하다. 최고의 발명품은 살아서 움직이며 스스로 나아가는 시스템이어야 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대표적인 발명품이다. 자본주의나 민주주의를 이데올로기 개념으로 제한하여 바라본다면 장님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많은 톱니바퀴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고도의 발달된 시스템이다. 자본주의는 은행제도, 보험제도, 특허제도, 주식회사제도, 납세제도, 소유권제도, 상거래제도, 노사제도 등으로 복잡하게 조직되어 있다. 이들 중 부속품 두엇만 빠져도 자본주의는 철퍼덕 자빠지고 만다. 뿐만 아니라 고정된 형태가 없이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되고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에너지를 순환시키며 계속 발전하고 변신한다. 살아있는 생물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사회주의 역시 상당부분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기능하는 것이며, 말하자면 일종의 애프터서비스 같은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 개념은 더 폭넓은 지평을 가지지만 상당부분 자본주의와 겹쳐져 있으며 자본주의를 보완하고 있다. 동남아와 아프리카, 중남미의 많은 후진국가들이 우리보다 300년 먼저 자본주의를 도입하고도 실패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고도의 정밀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쉽다. 그냥 괴벨스는 선전하면 되고 군중이 따라오면 된다. 그러나 실패하고 만다. 껍데기는 외부에서 들여올 수 있지만 내부 콘텐츠가 될 부속품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양차 세계대전 전후로 자본주의를 도입해서 20세기 안에 정상궤도에 들어선 나라는 일본과 한국 정도다. 최근 중국과 인도, 브라질, 러시아가 뜨고 있지만 이는 21세기 들어 나타난 현상이다. 중, 인, 브, 러는 양차대전 이후 무려 50년 동안이나 발동을 걸었는데 계속 실패하다가 이제 겨우 자본주의 엔진에 발동이 걸려 부릉부릉 소리를 내며 시운전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만큼 어려운 시스템이며 무작정 자본주의를 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선거만 한다고 민주주의 아니고, 집회의 자유, 언론의 자유만 보장한다고 민주주의 아니다. 실제로 시스템이 작동해야 민주주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류의 집단지성 안에서 숨 쉬어야 한다. 엔진에 발동이 걸려야 민주주의고, 저절로 돌아가야 민주주의고, 에너지가 순환되어야 민주주의고 세계사의 흐름에 맞추어서 지속적으로 신장되고 발전해야 민주주의다. 과연 시스템이 동작하느냐가 중요하다. 학계와 문화계, 재야, 시민사회, 언론계, 정계, 군부, 네티즌 등의 톱니바퀴들이 정밀하게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2차대전 후 민주주의 도입해서 정상궤도에 들어선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 이것이 시스템이기 때문에 부속품 몇이 빠지면 삐걱대면서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쯤되면 부시가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도입하겠다는 생각이 얼만큼 순진한 망상인지 알만하다. 문명이 발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과학이냐 미학이냐다. 과학은 도구를 사용하여 눈앞의 문제를 해결한다. 과학은 칼과 같다. 방해자인 문제거리를 칼로 쳐내는 것이다. 미학은 소통능력을 향상시켜 인류의 아이큐를 올린다. 집단지능을 형성하는 것이다. 방향성이 다르다. 썰매개가 커브를 돌 때는 대장개의 역량이 중요하다. 개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면 대장개가 컹컹 짖어서 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단지 잘못이라고 혼낼 뿐 바른 길을 일러주지는 못한다. 반쪽 지휘법이다. ‘그 길이 아냐!’라고 호통칠 수 있을 뿐 ‘이 길이 옳아’하고 일러주지 못한다. 과학도 이와 같아서 인류가 질병, 재난, 가난, 전쟁, 고립과 같은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이를 바로잡을 수 있을 뿐 바른 길을 일러주지는 못한다. 바른 길을 찾아내게 하는 것이 미학이다. 미학은 소통의 과학이다. 대장개는 바른 길을 알고 있지만 팀원들에게 일러줄 수 없다. 개는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성별로 막히고, 종교로 막히고, 문화로 막히고, 이념으로 막히고, 국경으로 막혀서 소통하지 못한다. 인간의 소통능력 한계가 문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미학이 위기를 극복하게 한다. 꼴등하는 녀석을 2등까지 끌어올리기는 쉽다. 그러나 1등으로 올라서려면 특단의 방법이 아니면 안 된다. 뒤에 오는 사람은 앞에 가는 자 뒤에 숨어서 외풍을 피하며 살살 따라가면 되지만, 맨 앞에 가는 사람은 모든 환경의 저항을 혼자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팀을 이끌며 길잡이 역할을 하지만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가 대장개에게 목덜미를 물리고 혼나는 썰매개와 같이 모든 시행착오를 혼자 감당해야 한다. 2등으로 뒤에 살살 따라가는 개는 대장개에게 혼날 일이 없다. 과학의 문제해결은 지속가능한 방식이 아니다. 꼴등이 2등까지 올라가는 데는 과학이 최고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면, 길잡이 개가 되려면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 과학은 좋은 도구를 제공한다. 도구만 좋으면 단번에 성적을 낼 수 있다. 그러나 최고는 될 수 없다. 최종 단계는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 자동차만 좋으면 F1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선수의 기량이 뛰어나야 한다. 서구의 근대화는 르네상스로부터 촉발되었다. 르네상스는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생각의 변화다. 미학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뀐 것이다. 개념이 잡힌 것이다. 르네상스의 바탕은 휴머니즘이며 이는 신과 인간의 관계가 역전된 것이다. 신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으로 믿고 신이라는 길잡이 뒤에 숨어서 살살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던 2등주의 사고를 버리고,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그것이 미학의 가치다. 역대 중국의 통치자들이 현명하게 정치를 한 결과 인구만 늘어났다. 중국사를 고찰해 보면 현군의 치세 다음에는 반드시 암군의 난세가 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때로는 당나라 현종처럼 치세와 난세를 동시에 겪기도 한다. 현명하던 현종이 양귀비 한 사람에 빠져서 갑자기 바보가 된 것일까? 천만에! 여자가 나라를 망치고 어쩌고 하는 소리는 다 지어낸 이야기다. 정치를 잘 하면 인구가 늘고, 인구가 늘면 반드시 곤란해진다. 천하가 태평하면 반드시 어지러워진다. 게가 속으로 살이찌면 반드시 허물을 벗어야 한다. 불경기는 구조원리상 필연적으로 오게 되어 있다. 좋은 임금이 정치를 잘해도 점점 상황이 나빠지는 시기가 있고, 나쁜 임금이 정치를 방탕하게 해도 저절로 잘 돌아가는 시대가 있다. 관리의 부패가 만연하고 매관매직이 성행해도 더욱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막부시대 일본의 어떤 재상은 대놓고 매관매직을 했다. 그는 ‘인간이 양심이 있어야지, 돈도 내놓치 않고 벼슬을 거저먹으려고 하다니 그런 염치없는 놈이 어떻게 백성을 다스린단 말인가?’하고 호통을 칠 정도였다. 그때 일본경제는 크게 발전해서 자본주의 맹아론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한무제 때 대사농 상홍양은 매관매직을 제도화 하여 관리가 곡물을 바치면 곧 승진시키고, 죄수가 돈을 바치면 사면하여 주고, 농부가 돈을 바치면 부역을 면제받게 했다. 그 이익은 국고로 돌려 나라의 재정을 확충했다. 그 결과 경제가 크게 발전하여 무제는 그에게 두 번이나 황금 백근을 상으로 내렸다고 한다. 이와 유사한 예는 매우 많다. 치세 다음에는 반드시 난세가 오게 되어 있지만, 드물게 치세가 오래 간 경우에는 대개 정복사업이 뒤따랐다. 아니면 무역로가 뚫리거나 대대적인 과학적 혁신이 있었다. 한무제 때 노자노선을 따랐던 재상 급암과 공자노선을 따랐던 공손홍의 대결을 들 수 있다. 급암은 황로학의 가르침에 따라 무위의 정치를 주장했다. 공손홍은 유교개혁을 주장했다. 장탕은 법가개혁을 주장했다. 젊은 군주는 도가를 물리치고 유가와 법가의 손을 들어주었다. 개혁으로 일시적으로는 백성을 윤택하게 할 수 있지만 결국 인구가 늘어나 도로아미 타불이 되고 만다. 민생은 다시 도탄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도 한 무제는 성공했다. 왜? 대대적인 정복사업을 벌였기 때문이다. 한 무제는 동으로 고조선을 치고, 서로 파촉을 경영하고, 남쪽으로 베트남을 치고, 북으로 흉노를 쳤다. 영토를 늘려 인구를 분산했기 때문에 그의 개혁은 지속가능한 개혁이었고 그 결과 성공한 것이다. 물론 급암의 예언대로 무수한 부작용이 일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무제의 중국은 계속 전진했다. 세종대왕도 마찬가지다. 북방을 개척하여 인구를 재배치했기 때문에 개혁이 지속가능했다. 그러나 정복사업을 무한정 계속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결국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 정복전쟁 없이 그냥 정치를 잘하기만 하면 구조적으로 망하게 되어 있다. 청나라 초기 중국인구는 1억이었으나 강희제, 건륭제, 옹정제 등 현군이 줄줄이 등장하여 정치를 잘한 결과 청나라 말기 중국인구는 4억이 되었다. 군주의 치세동안 백성의 삶은 윤택해 졌지만, 인구가 늘었기 때문에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서양사의 경우 현명한 군주가 등장한 예가 별로 없다. 십자군전쟁, 백년전쟁, 30년전쟁 등 전쟁만 줄곧 계속했기 때문이다. 서양은 현명한 군주가 없으니 인구가 늘지 않아 백성이 굶어죽는 사태도 많지 않았다. 반면 중국사의 경우 유가의 교육을 받은 현명한 임금이 많다. 그들은 어진 정치로 인구를 늘려 나라를 곧장 말아먹었다. 일부 학자들은 말한다. 현대 중국이 민주화를 시도하지 않는 이유는 청나라 때 현명한 군주가 나라를 번영시킨 예와 같은 성공적인 독재의 기억 때문이라고. 러시아도 피오트르 대제의 개혁이 기억에 남아서 선한 독재자에 대한 환상이 있다. 푸틴이 뜨는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나라가 크다 보니 정복할 데가 많아서 현명한 군주의 독재가 예외적으로 오래 가는 것이다. 과학의 방법은 결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 하나의 해결은 또다른 문제를 낳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학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계속 정복을 하거나, 계속 신대륙을 찾아내거나, 인터넷과 같은 혁신을 계속 이루는 수 밖에 없다. 청나라의 치세도 강희제, 건륭제, 옹정제 임금이 현명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서양에서 대량의 은이 흘러들어와서 화폐경제가 발달했기 때문에 흥한 것이다. 청나라는 실제로 사방을 정복하여 명나라 때에 비해 영토를 크게 늘렸다. 또 대외무역은 정복과 같은 효과를 가져온다. 중국의 산서상인은 청나라때 이미 현대와 같은 고도의 발달된 주식회사 제도를 만들어서 파리와 런던에 객점을 두고 도자기와 차와 비단을 무역했다. 그 덕에 조선왕조도 숙종, 영조, 정조시대 경제가 발전했다. 중국경제의 발전이 조선에까지 파급되어 개성상인의 인삼장사가 뜻밖의 대박을 맞은 때문이다. 이 외에도 콜롬부스를 따라 담배와 고추,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이 들어온 이유도 있다. 대규모의 정복사업을 통한 물산의 유통과 발견과 발명에 의한 지속적인 산업의 혁신이 일어나야 하며, 그런 물적 토대의 뒷받침 없이 고립된 국가에서 혁명과 같이 단발성의 법가주의 개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거의 없다. 반면 대대적인 혁신을 이루어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더욱 꼬여서 상황이 나빠지는 경우는 매우 많다. 송나라때 개혁가 왕안석과 보수파 소동파의 대결을 들 수 있다. 왕안석의 개혁이 실패한 것은 너무 급진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귀족들이 반발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점도 있었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팩트에 불과하다. 본질은 항상 따로 있다. 지속가능한 개혁은 르네상스와 같은 인식의 대전환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대파를 압살하여 국가기강을 확립하고 법률을 엄격하게 집행하여 조세수입을 늘리는 따위 허리띠를 졸라매는 방법으로는 조직 내부에 고도의 스트레스를 주어 팽팽하게 긴장되게 하기 때문에 살짝 건드려도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느슨한 줄은 잘 끊어지지 않지만 팽팽한 줄은 칼만 갖다대도 끊어진다. 왕안석의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임금이 변덕을 부려서도 아니고, 귀족이 반대해서도 아니고, 본질적인 모순에 의해 살짝 건드렸는데도 와르르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무엇이 개혁인지 잘 생각해야 한다. 왕안석은 개혁이 전부 잘못된 것은 아니고, 전부 실패한 것도 아니다. 그 시대의 한계다. 진보인가 보수인가?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왕안석의 개혁 중 상당수는 레이건의 개혁과 같은 보수개혁이다. 민중의 삶을 향상시키려 한 부분은 진보적이지만, 국가기강을 확립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며,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려 한 것은 이명박과 다를바 없다. 반면 소동파는 개혁에 반발했지만, 현대의 관점으로보면 오히려 진보적 인물이다. 왕안석은 부자의 것을 빼앗아 가난한 자에게 주었지만 시장의 발전이 뒷받침되지 않아, 그 효과는 3년을 가지 못하는 것이었고, 소동파는 널리 알려진 서원아집도에 묘사된 것처럼, 발달한 남조문화의 정수를 계승하여 유교의 선비가 불교의 스님과 도교의 도사와 교유하는 등, 지식인의 전범을 일으켜 널리 소통의 길을 열었으며 궁극적으로 인류의 아이큐를 올렸다. 오늘날 중국정신의 정수에 소동파가 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추사와 같다. 한국정신의 정수를 이끈 사람은 오직 화담과 추사가 있을 뿐이며, 화담이 뿌린 씨를 추사가 꽃피운 것이고, 그 외에는 대략 보잘것이 없다. 중국정신의 모든 정수가 소동파 하나로 집약된다. 그 안에 황노사상도 있고, 유가사상도 있고, 불교의 선종도 있고, 있을건 다 있다. 말하자면 소동파는 중국의 작은 르네상스를 이끈 것이다. 수호지에 묘사되고 있는 송나라 민중의 자유로운 삶은 소동파의 태생적 반골기질과 맥이 닿아있다. 소동파가 이끈 문화의 붐이 건축과 회화와 음악과 문학으로 발전되었다면 중국에서 먼저 르네상스가 일어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왕안석의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그 내용에 정복사업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개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생산력이다. 개혁은 반드시 생산력의 증가를 수반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많은 혁신이 뒤따라야 한다. 구조론으로 말하면 상부구조를 혁신하는 질의 개혁과 하부구조를 혁신하는 입자의 개혁이 있다. 질의 개혁은 외부에서 에너지를 끌어오는 것이고, 입자의 개혁은 내부의 구조를 효율적으로 재배치하여 에너지 소비를 최적화 하는 것이다. 한무제의 개혁은 외부에서 에너지를 끌어오는 개혁이었다. 일단 영토를 늘린 것이 효과가 있었다. 서역으로 진출하여 비단길을 개척하니 아랍의 문물이 중국으로 흘러들어왔다. 서역의 옥과 보석, 유리, 석류, 포도, 참깨, 호두 따위가 들어왔다. 그리고 과학자 장형의 무수한 발명들, 채륜의 종이 등 무수한 산업의 혁신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송나라 때의 왕안석은 정복사업을 벌이지 못했으므로 끌어올 외부의 에너지가 없었고, 개척할 무역루트가 없었고, 신통한 과학적 발명도 없었다. 법률과 제도를 바꾸는 정도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물론 왕안석의 부국강병책이 궁극적으로 영토확장에 뜻을 두고 있었다면, 왕안석이 스스로 군대를 이끌어 사방을 정복하고 그리하여 송나라가 징기스칸의 제국과 같은 강력한 대제국이 되었다면 왕안석은 성공한 개혁가로 이름이 남았을 것이다. 개혁이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강조하는 바는 저절로 돌아가는 시스템을 작동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시스템은 발동만 걸어주면 스스로의 힘으로 에너지를 순환시킨다. 초기 단계에서는 당연히 개혁이 필요하고 국가의 개입도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 제도가 정비되면 국가의 개입없이 시장이 스스로 혁신을 해내간다. 송나라 때는 자본주의가 발전해서 소주의 직물공장에서는 노동자 다섯명이 한 조로 베를 짜는 직기를 백여대씩 보유한 전옥이 수도 없이 많았다고 한다. 노동자를 천 명 이상 고용하고 실잣기, 염색하기, 베짜기, 디자인(비단에 정교한 꽃무늬를 넣었는데, 복잡하게 연결된 단추가 자동으로 직기를 조작하며, 이는 현대의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원리가 같다.) 등으로 분업하여 역할을 분담하였는데 현대의 포드시스템은 당시에 이미 발명되어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다. 한국의 베틀처럼 혼자서 베를 짜는게 아니고, 다섯명이 한 조로 베를 짜는데 속도가 매우 빨랐다. 비단에 무늬를 넣으려면 소년 두 명이 베틀 위로 올라가서 기계를 조작해야 하므로 직기 하나에 인원이 다섯 명씩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큰 공장이 소주에만 백여호도 넘었다고 하니 수십만명 노동자가 종사하는 공단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것이 진짜다. 이런건 왕안석이 개혁하지 않아도 민중의 창의에 의해 저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왕안석도 부분적으로 옳고, 소동파도 옳지않은 점이 있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문치(文治)의 송나라는 소동파의 송나라다. 마르크스 혁명 역시 왕안석의 법가개혁과 동일하다. 레닌과 마오는 마르크스의 혁명에 핵심적 요소인 제국주의가 빠져 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스탈린은 레닌을 계승하여 영토를 정복했고, 마오 또한 정복사업을 펼쳐 티벳을 빼앗고 만주에 눌러앉았다. 중국은 한족국가이니 침략자인 만족은 물러나서 독립하는게 정상인데도 말이다. 마오가 인류 최후의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스탈린의 법가개혁은 잠시 성공하는듯 했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크게 개척했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는 옛부터 러시아인이 진출해 있었지만 대개 버려져 있었다. 제대로 러시아화 된 것은 스탈린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거기다 동유럽의 공산화까지 더해져 러시아 제국의 건설이 완성되었다. 황무지를 개척하고 물산을 들여오며 교류를 하는동안 새로운 기운이 크게 일어나 혁명은 성공하는듯 하다. 그러나 그것이 제국주의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스탈린 방식과 마오 방식은 이름만 혁명이었을 뿐 제국주의의 다른 버전에 불과한 것이며, 본래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이었다. 시스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각 부위에 독립적인 가치판단기능, 의사결정기능이 있으면서 서로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것이다. 축구선수 열한 명은 각자 판단하여 그라운드를 뛰는 것이다. 만약 감독이 일일이 지시하여 ‘슛을 해라’, ‘크로스를 올려라’, ‘내려와서 수비를 해라’고 통보한다면 북한이 남아공 월드컵에서 포르투칼에 0 대 7로 참패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북한이 대 브라질 전에서 0 대 1로 선전하자 흥분한 김정일이 직접 지시하여 선수들의 수비 위치까지 일일이 찍어주었다고 한다. 이는 철저하게 반 시스템적인 행동이다. 왕안석의 개혁도 이와 같은 것이어서 인류의 아이큐를 떨어뜨리고 만다. 김정일이 북한선수단의 바깥뇌를 떼버렸기 때문에 바깥뇌가 없어진 북한 팀의 경기지능이 떨어져서 자멸한 것이다. 필자가 김성근 감독의 뛰어난 경기운영을 깎아내리고 로이스터 감독의 황당한 기살리기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선수들의 장점을 극대화하여 경기지능을 끌어올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의 축구감독들은 한국 선수들의 축구지능이 낮다고 한탄하지만 로이스터가 성공적으로 야구지능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물론 김성근 감독도 감동적인 열변으로 선수들의 목표의식을 고취하여 야구지능을 끌어올리는데 일가가 있다. 이제는 SK팀 선수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는 수준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경기 스타일은 극과 극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로이스터와 김성근 사이에 통하는 데가 있다. 김성근 야구가 언뜻 스파르타식 훈련만능주의로 보이지만 알고보면 ‘생각하는 야구’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스템이 아닌 것을 시스템으로 잘못 알고 있다. 법률이나 제도 따위는 원래 안 쳐주는 것이다. 그것들도 물론 기능은 있지만 하나의 부속품에 불과하다. 진짜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주의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니고, 그 모두를 포괄하면서, 한 차원 더 위에 있는 인류의 지성 그 자체다. 60억 인류가 각자 판단하여 각자 자기 길로 갔을 따름인데, 자신의 욕망을 추구했을 뿐인데, 개인의 자유와 이기심을 앞세웠을 뿐인데, 전체적으로 하나의 인격체처럼 의사수렴이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지성이다. 그것은 집단인격이다. 우리가 의사소통을 활발히 하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이 각자 이익을 추구하여 개인플레이를 했더니 팀이 망했다면 그것은 의사소통이 막혔기 때문이다. 구조적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무리하게 협력플레이를 하면 대인방어를 한다고 수비가 한곳으로 몰려서 수비 뒷공간을 허용하게 되니 더 망한다. 때로는 단결하지 말고 흩어져서 지역방어를 해야 한다. 서로 돕는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서로 교착되어 방해하는 결과로 되는 일은 매우 흔하다. 특히 조직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단결하여 한 곳에 몰려있다가는 전멸한다. 일단 나부터 살겠다고 흩어져야 오히려 살아날 확률이 높다. 식물은 가뭄을 겪어나 재해를 만나면 더 많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농부는 감나무에 감이 많이 열리게 할 목적으로 줄기를 철사로 감아놓거나, 대추나무 가지사이에 돌을 끼워놓는다. 환경이 좋으면 꽃을 피우지 않고 계속 키만 키우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위기를 당하면 흩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생태계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날씨가 나쁘면 악어의 알은 암컷이 되고 날씨가 좋으면 수컷이 된다. 모래구덩이 온도가 30도 미만이면 악어 알은 모두 암컷이 되고 34도를 넘으면 모두 수컷이 된다. 그 사이 온도면 암수는 반반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흉년이 계속되면 더 많은 자식을 낳는다. 부유해지면 자식을 낳지 않아 유럽처럼 인구가 감소된다. 지구 마지막 날이 오면 무엇을 할것이냐고 물으면 섹스를 하겠다고 대답하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위기에는 번식을 해야 한다는 본능이 작용했다고 보아도 틀린 답은 아닐 것이다. 시스템은 흩어진 채로 각자 판단하고 각자 결정하며 이심전심으로 협력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자식을 퍼뜨려 분산하는 것이다. 양적으로 분산할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분산해야 한다. 수십억년 전 지구에 처음 출현한 하나의 원시세포가 이렇듯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한 것은 그러한 분산노력에 따른 결과다. 바깥뇌는 그러한 분산노력에 의해 건설된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인류의 집단지능, 집단인격이야말로 최고의 발명품이다.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은 그 집단지능, 집단인격을 구성하는 부속품에 불과하다. 자본주의가 저절로 돌아가는 시스템이듯이 인류의 집단지능도 인위적으로 건설될 수 없다. 그러나 르네상스에서 보듯이, 또 소동파의 자유정신이 송나라 민생경제의 발전과 밀접하게 닿아있듯이, 한 사람의 생각이 모두의 생각을 바꿀 때, 그리고 서로 소통할 때, 60억의 지혜가 하나의 인격으로 결집될 때 그것은 분명히 작동한다. 인간이 동물보다 뛰어난 이유는 첫째 지혜를 축적할 수 있고, 둘째 지혜를 합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가치판단을 할 수 있고, 집단이 의사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가치판단과 집단의 의사결정을 연동시키는 것이 집단지능, 집단인격이다. 구조가 있다. 자연에는 에너지가 가는 길이 있고, 개인에게는 가치판단의 길이 있고, 집단에는 의사결정의 길이 있고, 자연에는 생명진화의 길이 있고, 조직에는 성장과 발달의 길이 있다. 일찍이 한비와 마키아벨리가 그것을 알았다. 그들은 최초로 근대를 사유한 사람들이다. 권력에는 권력의 길이 있고, 대중에게는 대중의 길이 있고, 논객에게는 논객의 길이 있다는 거다. 조직의 생리가 있다. 스스로 호흡하고 발전하고 성장하는 루트가 정해져 있다. 그 결을 따라가야 한다. 에너지의 결, 개인의 가치판단 결, 집단의 의사결정 결, 생명의 진화하는 결, 조직의 성장하는 결이 모두 합쳐져 인류의 집단지능, 집단인격을 형성하는 것이며 그것은 구조론적 의미에서 상부구조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과 윤리를 말하여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봉건적인 가치판단 방법, 대의명분을 주장하여 군중을 선동하는 의사결정 방법, 신에게 의존하는 봉건시대의 성장발달 방법을 대체하는 것이다. 봉건인과 근대인이 있다. 당신은 어느 쪽에 속하는가? ● 봉건인의 가치판단.. 겉으로는 윤리와 도덕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TV에 나와서 눈물 흘리며 동정을 구하는 등 인간의 감정에 기대고 정서에 호소하는 변덕스런 판단을 한다. ● 봉건인의 의사결정.. 겉으로는 대의명분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선전선동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켜 불안해진 군중이 동요하여 우왕좌왕하며 몰려가는데로 눈치보며 따라가는 줏대없는 결정을 한다. ● 봉건인의 세계관 .. 모든 가치판단과 의사결정의 근거는 신이므로 잘되든 잘못되든 신의 뜻으로 치고 우연과 불확실성의 바다에 뛰어들며 전쟁을 일으켜 놓고도 신이 시켰다고 둘러댄다. 한비자와 마키아벨리는 윤리도덕을 빙자하여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지 않았고, 대의명분을 빙자하여 군중심리에 편승하지도 않았고, 그 결과를 담담히 받아들일 뿐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 핑계는 대지 않았다. 냉철하게 자연법칙과 시스템의 작동 원리에 의존했다. 그것은 결을 따르는 것이다. 권력의 결, 의사결정 결, 가치판단 결, 생명진화 결, 성장발달 결이 있다. 욕을 먹든 말든, 세상이 뭐라하든 법칙대로 가는 거다. 그러나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다. 단지 후세사람에게 좋은 영감을 던져주었을 뿐이다. 한비와 마키아벨리는 개인적으로 실패했지만 그들의 합리주의적 사고는 후대의 정치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모두들 입으로는 마키아벨리를 욕하면서 실제로는 마키아벨리즘을 구사했기 때문에, 민중이 그 모든 사태의 책임이 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군주에게 있음을 알아채고 봉건왕조를 타도한 것이다. 실제로 역사가 마키아벨리가 주장한대로 굴러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마키아벨리의 기대보다 300년 늦게 이탈리아가 통일되기는 했지만. 인간의 아이큐를 올린 것이 마키아벨리의 공적이다. 그들이 근대적 사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이유는 집단지능을 건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는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다. 신이 아니라 인간이 책임진다는 것, 인간의 지혜를 결집하의 의사소통과 의사결정, 가치판단을 한다는 것, 인간이 계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금속활자가 더해져 지식의 대량보급으로 인류의 판단능력이 향상되었기 때문에 현대가 일어난 것이다. 결국은 미학이다. 과학은 도구일 뿐이며 인간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 차가 좋아도 운전기사가 형편없으면 사고가 나고 만다. 20세기는 산업의 혁신을 일으켰다. 도구에 날이 섰다. 그러나 그 날이 선 칼을 쓰는 무사의 솜씨는 형편없다. 인간의 소통하는 능력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60억 인류가 각각 하나의 뇌세포와 같다. 그 뇌세포들 사이를 시냅스로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소동파가 시 한 수를 썼을 뿐인데 휘종 대에 이르러 문화가 크게 일어났고, 미켈란젤로가 그림 하나를 그렸을 뿐인데 르네상스가 탄생했다. 그 본질을 꿰뚫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서양음악은 복잡하고 풍성하다. 동양음악은 단조롭다. 그 이유는 서양음악의 경우 신의 완전성에 도달할 목적으로, 성당 건물을 돌집으로 크게 지어놓고 건물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소리를 얻으려 했기 때문에 풍성해진 것이고, 동양음악의 경우 실용적인 사고를 쫓아 ‘그게 도무지 무슨 소용이 있냐’며 쓸모를 따져보고 ‘다만 귀를 즐겁게 하는데 쓸모있다’ 하여 쓸모있는 만큼으로 영역을 좁혔기 때문에 퇴조한 것이다. 신의 완전성에 도달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이상주의는 돈 키호테적 발상이다. 비현실적인 공리공론이다. 성당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뿡뿡 울린다고 해서 신이 그 소리듣고 ‘오냐. 나 여기에 있다’ 하며 두팔 벌리고 찾아오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그런 비현실적인 도전이 도리어 큰 성취를 이루는 법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비현실로 나아가 모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음식이라도 그렇다. ‘음식이 무에 쓸모가 있느냐’며 실용주의로 따져서 ‘입을 즐겁게 하는데 소용있다’며 딱 맞는 정답을 찾아서 바운더리를 좁히면 결국 짜장면이 되고 만다. 설탕 넣고 조미료 넣고 맛은 있는데 더 이상 진보는 없다. 좋은 음식은 맛에 있는게 아니다. 예쁘게 장식한 색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야기에 있다. 그 재료가 어디서 구해온 어떤 재료냐다. 맛이 별로라 해도 그 재료를 먼 아프리카 어느 바위절벽에서 구해온, 정성이 들어간 재료라면 그 이야기값을 쳐주는 것이다. 이런 비현실적인 도전이 필요하다. 쓸모 바깥에 진정한 쓸모가 있다. 실용 바깥에 진정한 실용이 있다. 뇌 바깥에 또다른 뇌가 있다. 쓸모를 추구하면 영역이 좁하지고, 영토가 좁아지면 마음이 좁아지고, 마음이 좁아지면 상상력이 제한되고, 더 이상 창의와 혁신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먼저 천하의 마음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애초에 인류 전체를 상대로 도전할 뜻을 품지 않으면 안 된다. 음악가가 건반을 하나 치더라도 그 소리가 신에게까지 도달하여 마침내 신을 이 자리에 불러내겠다는 망상을 꾸미지 않으면 안 된다.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가 왜 근대문학의 효시인지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봉건논리대로 신의 명령을 따라, 대의명분을 따라, 윤리도덕을 따라 돈키호테가 나아간 것이 전혀 아니고, 그 동기가 순수하게 인간 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돈 키호테는 신의 계시를 받지도 않았고, 변사또의 악랄함에 치를 떨며 성춘향의 윤리도덕을 주장하지도 않았고, 오랑캐를 무찌르겠다는 대의명분을 따르지도 않았고 그냥 인간 자신이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지성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모나리자가 왜 걸작인가? 거기에는 아프로디테 신도, 헤라 신도, 아테네 신도 등장하지 않는다. 한비와 마키아벨리가 대의명분을 버리고, 윤리도덕을 버리고, 신의 계시를 버리고, 권력 자체의 결을 따라갔듯이, 모나리자는 순수하게 회화 자체의 결을 따라간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논리이며, 새로운 길이며, 근대의 길이다. 다빈치는 ‘진정한 그림이란 이런 것이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로 그린 것이다. 그 의도가 그림의 가치다. ‘아프로디테 여신의 멋진 모습을 보여주겠어.’라든가 ‘예수님의 성스러운 모습을 똑똑히 보여주겠어’ 하고 그림의 내용을 따라간 것이 아니라, 내용과 상관없이 ‘진정한 그림이란 이런 것이야’ 하는 깨우침이 숨어 있다. 이것이 근대다. 추사의 세한도 역시 그러하다. ‘선비의 그림은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 그림이라면 어떤가? 상업적인 그림은 소비자에게 분명하게 공급하여 주는 것이 있다. 그림의 목적은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니 눈을 즐겁게 해주겠다는 식이다. 그런게 있으면 꽝이다. 무엇인가? ‘진정한 그림이란 이런 것이다’ 하는 다빈치의 선언, ‘선비의 그림은 이런 것이다’ 하는 추사의 선언은 인류의 아이큐를 상승시킨 것이다. 뒤마의 삼총사와 스탕달의 적과 흑을 비교해도 그러하다. 뒤마는 삼총사를 써서 독자에게 읽는 재미를 주었지만 그런 식의 주고받는 거래는 논외다. 이문열 소설의 재미는 짜장면의 맛과 같은 것이어서 일회용이다. 인류의 지능을 끌어올릴 수 없다. 인류의 가치판단 능력을 오히려 퇴행시켰다. 좋은 요리에는 맛이 아니라 이야기가 숨어 있어야 한다. 인류의 아이큐에 보탬이 있어야 한다. 스탕달의 적과 흑에는 ‘소설은 똑 이렇게 쓰는 것이렸다’ 하는 깨우침을 던져주고 있다. 그 안에 과학적인 탐구가 있다. 그것이 모여서 지성을 이룬다. 인류최고의 발명품은 핵폭탄도 아니고, 금속활자도 아니고, 인터넷도 아니다. 자본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저절로 돌아가는 시스템의 발명이 진짜다. 60억 뇌세포를 하나로 모으는 집단지성, 집단인격이 진짜다. 오랫동안 역사와, 전통과, 관습과, 종교와 문화와, 부족의 서사시와, 집단의 강령과, 사회의 규범이 그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한 나라의 역사는 국경을 넘지 못하고, 관습은 부족을 넘지 못하고, 종교 역시 문화권의 벽을 넘지 못한다. 지성은 그것을 뛰어넘는다. 미학이 가능케 한다. 베트남에서 학살을 저지른 미군 병사가 있다. 그 병사가 장군의 마음을 가졌다면 달랐을 것이다. 일개 병사가 위급한 시기에는 장군의 판단을 해야하듯이, 만인이 신 앞에서 인류 대표자의 판단을 하도록 할 수 있다. 개인의 가치판단과 집단의 의사결정을 연계시키는 것이 미학이다. 거리의 패션만 해도 그냥 제멋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북경의 패션과 명동의 패션은 그 안목의 차이가 상당히 크다. 그거 쉽게 따라잡을 수 없다. 무수히 많은 개인의 판단이 합쳐져서 더 큰 무언가를 이룬 것이다. 패션이 스스로 살아서 호흡하며 살금살금 기어다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안에 생명력이 있다. 그 결을 존중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디자이너는 망하고 만다. 모르는 사람들이 그냥 여자들이 어째서 하며 시큰둥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고도의 판단력이 숨어 있다.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도 맛이 있지만, 겉멋만 잔뜩 든 여대생들이 공연히 스타벅스에 앉아서 비싼 커피를 홀짝대는게 아니고, 그러한 과정에서 인류의 안목이 상승하여 평가기준이 높아지며, 인류의 아이큐가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우디의 디자인이 세련된 이유는 그 나라 여성들이 마구 꼴값을 떨어서 우리나라 여대생보다 훨씬 더 ‘된장’ 짓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냥 한 잔의 커피를 마셨을 뿐이지만 독일인 전체의 판단력이 향상되었다. 현대차의 꼬진 디자인을 보면 한국인의 평균적인 판단력이 아직 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자동차에 한국인의 아이큐가 드러나 있다. 창피한 거다. 한국인 개인의 아이큐를 테스트하면 독일인 평균보다 훨씬 높다. 분명 한국인의 지능이 세계 최고다. 그런데 집단지능으로 보면 판단력이 크게 떨어진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우리도 널리 된장녀를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타벅스 문화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스타벅스 역시 하나의 패션코드에 불과하다. 금방 다른 문화로 바뀔 수 있다. 필자가 강조하는 바는 왕안석과 같은, 마르크스와 같은 법가들이 절대로 이해못하는 더 높은 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말이다. 한국인은 단순하게 생각한다. 최고의 디자이너를 영입하거나 양성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서울대 미대 졸업생을 찾아보거나 외국 디자이너를 스카웃하면 된다고 순진하게 믿는다. 그러나 착각이다. 한국인 전체의 안목이 세련되어 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인이 스스로 더 까다로워져야 하고, 더 비실용적으로 변해야 하며, 더 비현실의 돈키호테가 되어야 하고, 더 우스꽝스러워져야 하고, 더 이상주의자가 되어야 하고, 괴짜를 옹호해야 하고, 만인이 미쳤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에게도 배울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 노숙자의 괴상한 옷차림도 멋진 디자인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 최희진과 김경아가 얼빠진 짓을 했지만 ‘아 그런 방법도 있었네’ 하고 그 기괴한 아이디어를 수첩에 적어놓아야 한다. 그 행동 하나하나는 잘못된 행동이지만, 비뚤어진 것을 통해서 바른 것을 아는 것이다. 인류는 그러한 주고받음 과정에서 안목을 길러온 것이다. 윤리도덕으로 개인의 가치판단을 대리하게 하고, 대의명분으로 집단의 의사결정을 대리하게 하고 신의 이름으로 세계관을 대리하게 하는 봉건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이 있었던 자리에 인간의 집단지성, 집단인격이 자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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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을이 되니 동렬옹의 글도 웬지 더 물이 오르고 풍성해진 느낌이오.
언제나 그렇듯 이렇게 좋은 글을 볼 수 있다는 게 참으로 고맙기 그지없소
인식의 대전환, 발상의 전환, 관점을 바꿈, 생각의 변화, 가치관이 바뀜, 개념이 잡힘,
시스템은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각 부위에 독립적인 가치판단기능, 의사결정기능이 있으면서 서로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것이다.
법률이나 제도 따위는 원래 안 쳐주는 것이다. 그것들도 물론 기능은 있지만 하나의 부속품에 불과하다. 진짜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주의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니고, 그 모두를 포괄하면서, 한 차원 더 위에 있는 인류의 지성 그 자체다.
쓸모를 추구하면 영역이 좁하지고, 영토가 좁아지면 마음이 좁아지고, 마음이 좁아지면 상상력이 제한되고, 더 이상 창의와 혁신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자본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저절로 돌아가는 시스템의 발명이 진짜다. 60억 뇌세포를 하나로 모으는 집단지성, 집단인격이 진짜다. 오랫동안 역사와, 전통과, 관습과, 종교와 문화와, 부족의 서사시와, 집단의 강령과, 사회의 규범이 그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한 나라의 역사는 국경을 넘지 못하고, 관습은 부족을 넘지 못하고, 종교 역시 문화권의 벽을 넘지 못한다. 지성은 그것을 뛰어넘는다. 미학이 가능케 한다.
개인의 가치판단과 집단의 의사결정을 연계시키는 것이 미학이다.봉건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이 있었던 자리에 인간의 집단지성, 집단인격이 자리해야 한다.
"생각하는 지성"...자신은 왜 무엇인가에 참여하는지...자신의 바깥 환경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자신은 그저 참여 했을 뿐인데 집단과 집단지성에 어떻게 기여를 하는지...그리고 그것이 왜 자신과 타인을 돕는 행위가 되는 것인지...그렇게 연계되어 하나로부터 끝단까지 생각해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식의 전환, 발상의 전환, 관점의 변화가 어떻게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지, 그 시선이 어떻게 적용이 되어가는지...
기존의 것을 파괴하지 않고, 부수지 않고, 서로 배척하지 않으면서 함께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과학을 미학이 배척하지 않고 포용해 버리듯이... 과학은 끝없이 혁신을 이루어 내어야 문제를 해결하지만,
지성과 미학은 개인의 가치판단과 집단의 의사결정을 연계시키는 것으로 가능해지는 것이겠지요.
즉 과학의 시대를 지나서 미학의 시대에 도립한다라는 것이고보면, 그동안의 토대가 자연스럽게 미학의 시대를 불러오고 있다는 생각도 들구요.
미학은 지성이 나타나야만 그 실체를 드러낸다는 것에 대해서도....
결국 사람이 바뀌어야 다 바뀌는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결국 개인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에서도....
강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겠지요.
윤리도덕으로 개인의 가치판단을 대리하게 하고 집단의 의사결정을 대리하게 하고,
신의 이름으로 세계관을 대리하게 하는,
봉건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
< 신이 있었던 자리에 인간의 집단지성, 집단인격이 자리해야 한다 !
.
. 옳다 그렇다 !
.
.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기독교 전도찌라시안에 보면 그림이 그려져 있더군요
둥그런 원이 있고 그 원의 가운데 중심에 있는 나를 빼버려 둘레에 앉히고
그 가운데에 그들이 말하는 주님, 하나님, 신 등을 앉혔더라구요
즉 대가리에 내가 없고 쥐대가리로 대리하게 하는 건가 ?
동렬님의 글을 읽으니 저 개독교 지도자들이 얼마나 나쁜 사기꾼들인지 이해가 팍 ! 갑니다
예전부터 저 그림보면서 옳은 것 같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왠지 찜찜하기도 했는데
노무현 대통령을 알고 나서부터
저 그림에 문제를 느끼고 틀렸다 생각했는데
제 마음을 님이 대신해서 시원하게 풀어 주었습니다
다시한번 제가 얼마나 책을 안 읽는 지 확인하는 글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기독교는 디자인을 먼저 들여와 기독교를 전파시키고 소통했다 했는데
그것이 소통 미학이라 했는데
명바기같은 놈에게 그 소통과 미학이 통하는 지요
60억의 주인인, 대표인 내가 명바기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요 ?
오, 어제 구조 아카데미에서 강의 듣고 무릎을 쳤는데, 오늘 이런 대작이 올라와 있구려.
최근의 쏟아지는 글 속에 구조론의 위용이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는 듯합니다.
한국르네상스가 여기서 출발하는 것일까요. 대단합니다.
(뇌세포=신경세포=뉴런 이고, 세포끼리 접속하는 부분은 "시냅스"가 아닌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