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날아가는 화살과 같다. 누군가 그 화살을 쏘았기에 화살은 지금 날아가고 있다. 계속 날아가다 보면 좌표를 읽어 마침내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된다. 어디로 가는지를 알면 그 반대편을 살펴 최초에 어디서 왔는지도 알게 된다.
내가 결정하지 않았다. 내가 처음 눈을 떴을 때 화살은 이미 날아가고 있었다. 돌이킬 수 없다. 누구도 그 화살에서 마음대로 내릴 수 없다. ‘나는 날아가고 싶지 않소’ 하고 항의하거나 ‘도대체 누가 나를 화살에 실어 쏘았단 말이오?’ 하고 따져묻는다 해도 소용이 없다. 화살은 계속 날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화살의 전략은? 아차피 가야 하는 길이라면 알고 가는 것이다. 누가 그 화살을 쏘았는지 어느 과녁에 명중되어야 하는지 가더라도 알고가야 한다. 알 수 있다.
◎ 존재의 세 질문 ≫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인간은 지구호라는 로켓을 타고 여행하는 우주비행사와 같다. 목적지는 까마득히 멀고 그 비행을 처음 시작한 두 남녀비행사 아담과 이브는 오래 전에 죽었다. 그 자손들이 살아남아 대를 이어가며 계속 비행하고 있다. 애초에 이 여행이 왜 시작되었으며, 또 지구호의 최종목적지가 어디인지, 지구호의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살펴보고 알 수 있다. 문제는 풀렸고 답은 있다. 알아야 한다. 모르는 어떤 대상에다 막연히 신이라고 이름붙인게 아니라, 신의 존재를 상정하면 모든 문제가 다 풀려서 잘 알게 되기 때문에 신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우주상수를 대입하여 난제를 푸는 것과 같다. 문제가 안 풀리면 그게 거짓이고, 문제가 풀리면 우주상수는 맞는 것이다. 이건 간단한 논리다. 신이라는 개념을 대입하여 존재의 세 질문에 응답할 수 있게 된 것이며, 마침내 그 화살의 출발점과 목적지를 알고 지금 당장 내가 해야할 일을 알게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과의 소통이며 그것은 신의 편에 서는 것이다. 진리의 편, 역사의 편, 문명의 편, 진보의 편,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신의 편에 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구호라는 화살이 날아가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화살은 언제라도 그 화살이 가는 방향의 편에 선다. 그게 화살이다. 그게 인간이다. 어떤 경우에도 끝끝내 인간을 옹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신을 나 바깥의 어떤 것, 즉 타자(他者)라고 여긴다면 이미 게임 끝이다. 나의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 곧 타자에 대해서는 어떤 소통도 의미가 없다. 인간이 세상과 소통한다는 것은 내 바깥에 바깥뇌를 건설하는 것이며, 그것이 누구 남이 아닌 바로 나의 문제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라는 하부구조 위에 상부구조 만들기, 혹은 상부구조 발견하기다.
무신론을 따른다면 어떨까? 어떤 인간이 자기 외에 나머지 모든 지구인을 전부 죽여버린다고 해도 그게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히틀러 뺨치는 무지막지한 깡패가 있다 해도 ‘그래 네가 이겼다’하고 물러설 밖에. 오로지 힘의 논리만 적용될 뿐이다. 생각하자! 살인이 왜 나쁘지?
중요한 것은 합리성이다. 비합리적인 행동이 있다. 그것은 자체모순을 의미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해치는 결과로 되는 것이 비합리적 행동이다. 요즘 TV에서 많이 보게되는 장면들 말이다. 아침저녁으로 말을 바꾸는 연예인들, 거듭 망언하고 그때마다 사과하는 정치인들의 행태가 나쁜 것은 그 안에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인이 나쁜 이유는 그것이 결국 자기를 죽이는 결과로 되므로 비합리적 행동이기에 나쁜 것이다. 인간을 죽이는 행동은 바깥뇌를 죽이는 결과로 되고, 지성을 죽이는 행동이 되고, 자신의 존립근거인 공동체를 죽이는 결과로 되고, 그것은 곧 자기를 왜소하게 만드는 행동이고, 넓은 의미에서 자기를 죽이는 행동이 되므로 합목적성과 배치되는 비합리적인 행동이고 그러므로 나쁜 것이다. 왜 살인은 나쁜가? 작은 나를 위해 큰 나를 죽이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조삼모사와 같다. 오늘을 위해 내일을 죽이고, 아침을 위해 저녁을 죽이고 그것이 결국 자기파괴로 치닫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우리가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내 바깥의 세계가 나의 연장선 상에 있기 때문이다. 환경파괴가 나쁜 것은 환경을 나 자신의 일부로 보기 때문이다. 팔을 잘라버린다면 아플 것이다. 명박이 산을 깎아버린다면 역시 아플 것이다. 그 산이 남의 산이 아니고, 바로 내 산이기에 내 맘이 아픈 것이다. 신에 대한 개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구상의 모든 종교가 말하는 신은 사실 외계인과 가깝다. 지구인이 외계인을 숭배하든 찬양하든 그것이 외계인의 관심사는 아니다. 신은 인간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데, 인간이 혼자 짝사랑하며 찌질대고 있는 거다. 나 바깥의 타자와 소통한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이다. 누구든 결코 자기 바깥의 어떤 존재와도 소통할 수 없다.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결국 소통이란 부분과 전체의 소통이며, 인간사회의 소통은 바깥뇌를 만들어가는 건설과정이며, 신과의 소통 역시 신의 일부인 인간이, 자기 자신의 연장선 상에 있는 신을 발견해 가는, 또 건설해 가는 과정이다.
필자가 신을 인정하는 것은, 신이라는 이름의 우주상수를 사용하는 것은, 그것이 내것이고, 나의 일부이며, 나의 자산이며, 나의 영토이며, 나의 무대이며, 나의 목적지며, 내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합리주의 안에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진보가, 문명이 내게 이득이 되면서, 동시에 타인과도 그 이득을 공유하듯이, 모두의 공유자산이면서, 동시에 내가 뿌리를 박고 있는 나의 기댈 언덕이다. 내것을 내가 쓰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내것인 신을 내게 유익하게 쓰는 것이며, 마을 공동의 우물을 어떤 자는 많이 쓰고 어떤 자는 적게 쓰는데 각자 알아서 필요한 만큼 쓰는 것이며, 쓰는 만큼 이익이다. 그 과정에 우물이 발달하는 것이며, 우물의 발달은 우물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며, 신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이로운 것이 신에게도 이롭다. 인간을 이롭게 함으로써 신을 이롭게 하는 그것이 소통이다.
인간의 의미는 지성에 있다. 지성이 바깥뇌다. 인간이 지구에 와서 창조한 것들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지성의 시스템이다. 그것은 학계, 언론계, 문화계, 재계, 정계 등의 결집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인간은 뇌 바깥에 상부구조로 만인이 공유하는 뇌를 하나 더 건설한 것이며, 그 지성의 시스템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발명품 중에서 으뜸인 것이며, TV나 자동차나 PC같은 것은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TV나 자동차 따위가 쓸모있는 것은 그 지성의 시스템이 잘 작동하게 돕기 때문이지 그 자체로는 별 가치없다.
인간이 달나라에 로켓을 보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집단지능의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종교 역시 지성의 시스템 안에서 삶의 양식이라는 형태로 기능한다. 과학은 바깥에서 개척하여 삶의 외형을 키우고, 종교와 문화는 안에서 그 삶을 살찌워 삶의 내실을 다진다. 과학과 종교는 바운더리가 다르다. 과학이 종교의 모순을 지적할 수는 있지만 종교를 대신하여 삶의 내실을 다지는 문제에 응답하지는 못한다. 애초에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모순은 과학에 의해 폐기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발전된 삶의 양식으로 대체될 뿐이다. 그리고 그 진보한 삶의 양식은 아직 개척되지 않았으며, 그 역할은 궁극적으로 미학이 맡는다. 종교의 문제는 과학의 발달에 의해 격파되는 것이 아니라 미학의 발달에 의해 해소된다. 미학의 임무는 인간으로 하여금 널리 소통하게 하여 인류 전체의 마음을 하나의 인격으로 통합해 가는 것이다. 모든 병사가 장군처럼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 인간 모두가 인류의 대표자로 서는 것, 신 앞에 단독자로, 신과 대등한 눈높이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과 친하기
‘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못마땅하다. 왜 ‘믿는다’는 표현을 쓰지? 믿음과 불신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것이 되려 신 앞에서 불경스런 표현이 될 수 있다. ‘믿는다’는 것은 ‘가치판단과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권한을 위임한다’는 말이다. ‘너 나를 믿지?’ 하는 말은 내게 맡기고 더 알아보려고 하지 말라는 거다.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너는 몰라도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신을 믿는 사람은 신에 대해서 더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신의 참모습을 알아보려고 하는 행동은 불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을 모른다. 그들은 신과 친하지 않다. '너는 빠져도 돼!' 이게 인간소외다.
신과 친해져야 한다. ‘나는 신을 믿는다’고 말하지 말고 ‘나는 신과 친하다’고 말해야 한다. 부부사이라도 그렇다. 서로 믿고 서로 친하지 않으면서 각자 딴짓 하는 부부들이 많다. 그들은 하루에 두어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지만 별탈없이 부부로 살아가곤 한다. 부부모임에서는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미소를 지어보이기도 한다. 밖으로는 잉꼬부부로 알려져 있지만 껍데기 뿐이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기는 하지만 좋지 않다. 어떻게 하면 신과 친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다.
‘믿다’는 동사고 ‘믿음’은 명사다. 명사로서의 믿음에 주목하기다. 믿음이란 실상 그 믿음의 대상과 상관없이 작동하는 것이다. 참된 신앙은 그 대상인 신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내 안에서 믿음을 키워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내 바깥이 어떤 존재를 믿고 내 무거운 짐을 그에게 떠넘길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믿음의 씨앗을 뿌리고, 그 씨앗이 자라서, 마침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완성되는 것이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다. 진정한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안에서 시작되고 내 안에서 끝난다. 그 믿음의 대상과는 상관이 없다. 의지하지도 않고 떠넘기지도 않는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모두 감당해낸다. 그러므로 일관된 믿음은 일관된 믿지 않음과 정확히 같다. 과학은 의심을 토대로 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파헤친다. 신앙과 과학은 가는 방향이 다르지만 같은 지점에서 만난다. 완전한 신앙과 완전한 과학은 반드시 만나 하나가 된다.
필요한 것은 미학이다. 미학은 소통을 위주로 한다. 소통은 타자에 대한 소통이 아니라 실상 내 안에 믿음의 씨앗을 뿌리고 그 믿음의 꽃을 키워서 마침내 열매맺게 하는 것이다. 타인과의 소통은 어떤 경우에도 불가능하다. 참된 믿음은 결국 나를 믿는 것이다. 내 안의 신성을 믿는 것이다. 내 안의 어떤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내 안에 믿음의 나무가 자라서, 그 믿음나무의 키가 점점 자라서, 마침내 신의 꼭짓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다. 완전성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애초에 내 안에 있다. 내 안의 신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 신과 친하기다. 신은 나의 바깥에서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내 안에서 나와 겹쳐져 있다. 나를 키워서 신의 높이에까지 도달해야 한다. 높아야 한다. 높은 믿음이어야 한다. 낮은 믿음을 양적으로 늘려봤자 헛수고다. 그것은 안 쳐주는 것이다. 하루에 열 번 기도해봤자 불안감의 표현일 뿐이다. 불안하다면 그 믿음의 질은 낮은 것이다.
무엇인가? 내 바깥의 어떤 존재를 믿고, 그 외부의 존재에 의지하고, 나의 모든 것을 스스럼없이 내맡길 것이 아니라, 그러다가 사이비에 당할 것이 아니라, 100퍼센트 내 안에서 믿음 그 자체를 숙성시켜 가야 한다. 소통으로 가능하고, 친함으로 가능하다. 친한만큼 소통한다. 양을 더할 것이 아니라 질을 높임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신이 내 바깥에 있지 않고 나와 겹쳐져 있기 때문이다. 신은 타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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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블릿 PC 아이디어는 옛부터 있었지만 누구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는데 잡스형님이 한번 시범을 보이자 갑자기 지능이 상승했는지 일제히 좋은 것을 만들고 있소. 둔하기로 소문난 삼성이지만 갤럭시탭은 기대하고 있소. 다른 회사들도 좋은 것을 만들고 있소. 이는 집단지능의 아이큐가 올라간 것이오. 바깥뇌의 효과요. 마찬가지요. 생각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지만 어떤 계기로 일제히 생각이 진보하게 되오. 누군가 길을 열어주면 우둔한 사람도 현명해지오. 구조론이 길을 열고 있지만 아직도 구조패드는 설계 단계라서 완전히 빅뱅에 이르렀다고는 볼 수 없소. 조만간 빅뱅이 있을 것이오. 구한말로 돌아가서 일본인이 좀 안다며 조선인에게 가르쳐 주지만 말귀를 알아먹는 사람이 없었소. 그런데 딱 한 명이 제대로 배우자 다른 조선인들은 그 한 명이 하는 것을 어깨로 넘겨다 보았을 뿐인데 똑같은 것은 물론 보다 뛰어난 것을 마구 만들기 시작했소. 이런 일은 얼마든지 있소.
하긴...불과 2~30년 전만 하더라도 세상은 지금과 많이 달랐지요.
그리고 30년 더 뒤로 가서 지금을 본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 되는 것인가에 대해서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일대 사건이 되기도 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전복되는 것인가 봅니다.
미학은 전복을 시킨다.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조금 알것 같은 요즘입니다.
마음을 생각이 따라가고, 생각속에 마음을 담아내기 위해서 바깥 환경이 좋아야 한다는 것은...
뉴스를 보니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려, 자신의 처지를 보니 화가나서 살인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아연해졌습니다.
저 사람에게 환경은 그런 것이었구나.... 그리고 우리의 환경은 지금 이렇구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사건이 벌어지지만...결코 아름답지 않은 일들과 사건의 연속입니다. 왜 그럴까..? 그만큼 우리의 바깥 환경은 점점 토대를 상실해 가고 있다는 것이어서...
결국 정치인들에게 화살이 날아가...쓰디쓴 무엇인가가 치밀어 오르기도 합니다.
누구나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지만,
그 마음을 생각속에 잘 담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바깥환경이 좋아야 하는데...
마음이란, 바깥환경이 좋지 않아서 생각이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면,
마음은 엄청난 일을 내기도 합니다. 같이 죽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고 보면... 그것은 상대를 죽임으로 인해서 자기를 죽이는 것이기에 자살행위가 됩니다.
결국 저런 환경이 곧 나를 죽이고 우리를 죽이는 것과 같아서... 바같 환경은 하루라도 빨리 좋아져야 합니다.
각자가 실천할 수 있는 것들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정치는 인간에게 존재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같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해봅니다.()
님의 심사숙고하는 지성이 존경스럽습니다...
머리로 헤아리지 말고 마음으로 보라... 하더니만 그 말이 맞는가 봅니다.
늘 마음이 먼저고 생각이 그 다음이지만... 마음과 생각은 늘 같이 가고 있었소.
단지 생각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생각은 가꾸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마음이 선천적이라면 생각의 쓰임은 후천적 개발에 있기에
생각에 대하여 제대로 길을 잡아주어야 하고 길을 내어 주어야 하오.
그래야 마음과 생각의 호환이 바로바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어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할 수가 있는 것 같소.
마음을 표현하는 도구가 생각인데, 그동안은 마음을 표현하는 두구로서 본능적인 것에 의지하고 있었단 생각이 드오.
마음이 직관하는 것을 생각이란 도구로서 논리적으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생각은 한다고 하면서 정작 생각을 활용하지 못하였던 것은, 마음따로 생각따로 였기 때문이오.
그러다보니 마음은 본능을 도구로 삼고, 생각은 생각 그 자체로 별 소용이 없이 지내게 된 것이었소.
마음이 생각을 도구로 삼아 서로 호환되지 못하면, 마음은 본능을 도구로 삼기 때문에 분노, 화, 지나치게 과잉된 감정들에 의존하게 되오.
마음이 본능이 아니라 생각을 도구로 삼게되면 이성적판단, 논리적 판단, 합리적 판단,미학적 판단을 하게 된다고 보오.
그리고 무엇을 표현할 때도 훨씬 보기가 좋은 안정된, 멋진 방향으로 가게되는 것 같소.
마음이 직관을 하면 생각은 그 직관을 표현하여 보기가 좋게 하므로... 마음을 따라 생각도 같이 연동하는 훈련을 의도적으로 많이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즉 마음이 직관하는 것을 생각은 보기가 좋게, 합당하게 다듬어 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소.
그것이 지성이고, 지성인의 자세라고 생각되어지오.
물론 생각을 꼭 훈련시켜서가 아니라, 마음따라서 생각이 바로 연동되어 잘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났다.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렇다하여도 생각은 개발되어지고 훈련되어지는 것이기에, 꾸준한 것이 좋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