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쳐쓴 옛글입니다. 신에게서 인간으로
어차피 인간은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불과하다. 이 사실에 낙담하지 말아야 한다. 그거 중이병이다. 삶의 허무 앞에서 당신은 회의하고 좌절하고 낙담할 수 있겠지만 그게 사실은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다른 사람의 주의를 끌려는 행동인 거다. 낙담해서 밥을 안 먹고 있으면 엄마가 관심을 가져주겠지만 버릇되면 곤란하다. 원래 부족민은 15살에 독립하게 되어 있다. 소속된 가족을 떠나 새로운 소속을 일구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철학하게 되는 것이다. 독립하여 새로 깃들일 둥지를 찾아서. 신은 수염 난 할아버지가 아니다. 신은 인격체가 아니다. 신은 당신의 존재에 관심 없다. 낙담하지 말아야 한다.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란다는 사실 자체가 유치하지 않은가? 바둑알 입장에서는 바둑을 두는 '알파고 신'이 나를 특별히 귀여워해서 화점 아래 삼삼에 놓아준거 아닌가 하겠지만 그런거 없다. 그냥 둔 거다. 바둑은 당신과 상관없이 바둑 자체의 논리를 따른다. 중요한건 전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화점이나 삼삼이나 천원에 놓여있지 않다. 당신은 연결되어 바둑판 전체를 메우고 있다. 그렇다. 당신은 당신이 아니다. 중요한건 연결되므로 외부에서 끊임없이 에너지가 공급된다는 거다. 상대가 쉬지 않고 맞대응하기 때문이다. 환경이 변하기 때문이다. 환경이 변하고 그 변화에 당신이 대응하고 당신의 대응에 다시 환경이 대응한다. 신의 의미는 그러한 대응이 한 귀퉁이에 놓인 바둑알 한 알의 사사로운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둑판 전체의 팽팽한 밀당에 의해서 일어난다는데 있다. 모두 연결되어 있으므로 한곳이 끊기면 대마가 죽는다. 바둑판 한 귀퉁이에 놓인 당신이 특별한게 아니고 모두가 중요하다. 당신은 생각한다.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어. 내가 당장 죽는다 해도 달라지는건 없어.' 아니다. 그건 중이병이다.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든 상대가 맞대응을 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인생의 의미가 없다는 말은 당신의 현재 결정에 따라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다. 신분제도가 있는 국가라면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든 왼쪽으로 가든 상놈이 양반되는 일은 없다. 바이샤가 크샤트리아 될 수 없다. 백수가 재벌 2세 되는 일은 없다. 별수 없다. 한계를 넘을 수 없다. 그다지 달라지는건 없다. 그런데 상대의 맞대응은 미래다. 무엇인가? 당신의 현재가 당신의 미래를 바꿀 수는 없지만 당신의 미래가 당신의 현재를 조정하고 있는 것은 명확하다. 이게 문제다. 당신은 갈림길에 서 있다. 짜장이냐 짬뽕이냐. 어느 길을 선택하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신통한 일은 어디에도 없다. 세상은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현재의 현재 선택에 따라 미래가 바뀌는게 아니고 미래에 일어날 상대방의 대응이 당신의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신은 탈주해야 한다. 상대가 당신을 함정으로 몰아가고 있다면? 구조론은 마이너스다. 당신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으며 그 상황을 플러스로 여긴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선택할 권한이 있고 좋은 것을 선택하면 귀찮아지고 나쁜 것을 선택하면 편하다고 여긴다. 어느 쪽이든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착각이다. 낚싯바늘에 꿰인 미끼 앞에서 붕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좋지 않다. 일찍 낚이거나 늦게 낚이거나 어차피 당신은 낚인다. 빨간약을 선택해도 낚이고 파란약을 선택해도 낚인다. 그 매트릭스 환경의 구속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은 연주를 마치고 텅 비어있는 객석을 바라보며 '아무런 보상이 없네. 박수 쳐주는 사람 하나 없어. 인생은 허무해.' 이러겠지만 착각이다. 반대로 당신은 사건의 시초에 서서 스위치를 누르려고 하는 것이며 그럴 때 에너지의 1파와 2파와 3파가 기승전결 순서대로 준비되고 있는 것이며 바로 그것이 진짜 보상이다. 하나의 사건을 끝내고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에 착수하여 에너지를 일으킨다. 보상받으려 하는 태도가 틀려먹었다. 에너지를 일으켜야 진짜다. 삶의 의미는 사건을 완결지어 보상받는데 있지 않고 사건을 시작하여 에너지를 일으키는데 있다. 당신의 결정에 연동되어 다른 사건이 일어나는게 진짜 보상이다. 반응하는 것이 의미있는 것이며 반응하지 않는 것이 허무한 것이다. 상대의 맞대응을 끌어내느게 진짜다. 내가 인생의 허무에 낙담하여 죽음에 두면 상대가 어디에 둘지 당신은 안다. 그래서 죽지 못한다. 죽을 수 있으므로 죽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카드를 써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순간 당신은 죽어도 그냥 죽지는 못한다. 사석작전으로 써먹고 죽어야 떳떳하다. 그것이 에너지다. 하나의 결정이 또 다른 결정을 추동한다. 두 번째 결정,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결정으로 사건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보상이다. 그럴 때 에너지는 출렁거린다. 그것이 보상이다. 인간은 거기서 희열을 느낀다. 진보는 내가 사건을 일으키는데 따라 다른 사람이 반응하여 또 다른 사건으로 전파되는 데서 쾌감을 느끼고 보수는 내가 일한 만큼 보상받는데 쾌감을 느낀다. 진보는 사건의 시작에 서고 보수는 사건의 결과에 선다.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물음은 어떤 보상이 주어지느냐를 묻는 것이다. 보상은 없다. 죽음뿐이다. 인생의 의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않는다. 세상으로 퍼져나간다. 내가 자식을 낳으면 자식이 자식을 낳고 세상으로 퍼져나간다. 내가 하나의 진리를 깨달으면 진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진리로 퍼져나간다. 앞단계에 투자한 것을 뒷단계에 보상받는게 아니라 앞단계에 일으킨 사건에 따라올 뒷단계가 앞단계를 밀어올리는 것이 진짜 의미다. 봄에 파종하고 가을에 보상받는 것이 아니라 가을의 수확을 예감하고 지금 전율하는 것이 진짜다. 돈을 벌면 기분이 좋은 것은 땀 흘린 수고가 대가로 돌아왔기 때문이 아니라 돈으로 할 앞으로의 많은 계획이 현재를 전율하게 하기 때문이다. 삶의 결과는 죽음이다. 보상은 없다. 의미는 없다. 지금 전율하지 않는다면 실패다. 이 순간 설레지 않는다면 실패다. 미래가 현재를 밀어올리지 않는다면 실패다. 성공했을 때는 이미 늙었다. 당신의 성공을 알아줄 친구들은 모두 죽었다. 어디 가서 자랑할 수도 없다. 성공하여 누군가에게 자랑하려는 행동은 엄마에게 칭찬을 들으려는 어린이의 행동이다. 인생의 성공 따위는 없다. 만남에서의 전율함이 있을 뿐이다. 전율하지 못하는 자는 죽은 자다. 보수는 만족을 찾고 진보는 전율을 찾는다. 보수는 쾌락을 찾고 진보는 설렘을 찾는다. 보수는 보상을 찾고 진보는 에너지를 찾는다. 보수는 결과에 서고 진보는 원인에 선다. 보수는 대가를 회수하면 좋아하고 진보는 상대가 반응하면 좋아한다. 그 차이다. 진보는 어린이의 마음이다. 어린이에게 성공은 먼 훗날의 일이다. 성취에는 관심이 없다. 어린이는 반응하면 무조건 좋아한다. 딸랑이를 흔들어 소리가 나면 좋아한다. 뭐든 건드려보고 꿈틀하면 좋아한다. 방귀 뿡 소리를 특히 좋아한다. 푸짐한 응가도 좋아한다. 냄새가 구려도 헤벌쭉 웃으며 좋아한다. 반응한다는 것은 연결된다는 것이다. 모두 연결되어 있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모두 연결되어 있음 그 자체에 있다. 그리고 부단한 맞대응에 있다. 반응하는데 있다. 하나의 사건이 더 큰 사건으로 번져나가는데 있다. 에너지의 출렁거림에 있다. 하나의 작은 결정에 환경 전부가 연동되어 일제히 그리고 예민하게 반응하므로 에너지다. 그래서 끝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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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하지만 순환은 아닙니다.
바퀴는 순환하지만 차는 앞으로 갑니다.
환경이 더욱 긴밀해지는 것입니다.
왼발과 오른발이 교대하지만 순환이 아니고 앞으로 갑니다.
가끔 뒷걸음질 칠 때도 있는데 그 때는 뒤가 앞이므로 역시 앞으로 갑니다.
부분으로 보면 순환이지만 전체로 보면 언제나 전진입니다.
반응하면 에너지가 생기고 그결과 앞으로 전진해 나아가는것이 되는것?
그렇습니다.
우주 안에 순환은 원리적으로 없습니다.
단지 순환으로 표현될 뿐이지요.
순환은 인식론적 관점이고 인간 눈에 순환으로 보입니다.
언제나 강물이 바다로 가지 바닷물이 강으로 역류하지 않습니다.
물론 바닷물이 증발하여 강으로 가지만
바닷물이 그냥 강으로 스멀스멀 기어올라가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확실히 구분하는게 맞습니다.
바닷물이 증발하여 강으로 가는건 태양의 일이고
강물이 바다로 가는 것은 중력의 일이므로 에너지원에 따라 구분해야 합니다.
중력을 따르는 것과 결따라 간다는 것, 이 둘은 의미가 같습니까?
질문에 어폐가 있습니다.
결따라 간다는 것은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하나가 선택되는게 아니라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우선순위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판단 - 진보는 옳고 보수는 그르다.
결따라 간다 - 진보가 먼저 가고 보수는 나중 간다.
A가 선택되었다면 B가 폐기된 것이 아니라 유보된 것이며
다음에는 B가 선택될 확률이 높아집니다.
결따라간다는 말은 인간의 의도 목적 신념 도덕 윤리 가치에 따라 행동하는게 아니라
에너지의 원리에 따라 의사결정의 효율성대로 편한대로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정신적 목적 신념이 아니라
인간과 환경과의 관계가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중력을 따르는 것이 결따라가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맞대응-에너지-맞대응-에너지 의 순환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