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요십조는 내용이 상세하므로 위조될 수 있는 문서가 아니다. 왜 그런 규칙을 정했는지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한 사람이 일관된 사상을 가지고 쓴 글이다. 즉흥적으로 쓴게 아니고 왕건 자신이 아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필생의 역작을 남기려 한 것이다. 당나라 풍속을 우리가 굳이 본받을 이유가 없으며 거란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므로 절대 그들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고 경계한 것이 대표적이다. 각 잡고 진지하게 쓴 글이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8조의 차령남쪽에 공주강 바깥의 주군을 멀리하라는 표현이다. 궁예의 잔당이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청주 일대다. 공주강이라는 강은 없다. 금강이라 하지 않고 공주강이라고 한 것은 공주가 금강 남쪽에 있으므로 지역을 좁혀서 특정하려고 한 것이다. 그곳에 지금 세종시가 들어서 있다. 엥? 도선국사 예언이 맞았다. 이성계가 계룡산 신도안에 도읍하려고 한 적도 있다. 공주강 안쪽이지만 멀지가 않다. 당시에 궁예의 연고지인 청주세력이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왕건이 애를 먹었다. 이 내용은 나무위키에 나온다. 궁예는 청주일대의 주민들을 철원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궁예 충성파들이 모두 청주사람이었던 것이다. 호남은 왕건의 처갓집이고 현종은 나주로 피신을 하기도 했다. 다른 지역 주민들이 현종을 잡아 몸값을 받으려 했는데 황실의 외갓집인 나주사람들은 고려에 충성한 것이다. 당시는 제주도와 같은 제후국이 있었다. 외왕내제라 해서 내부적으로 황제였다. 문제는 우리가 일제강점기 산맥개념을 배워서 차령이라고 하면 차령산맥을 떠올린다는 거. 그러나 왕건 시절에는 지질학이 없어서 산맥개념이 없었다. 돌아다녀 보면 산맥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공주강 북쪽이 중요하다. 왕건은 서울이 아니라 개성에 도읍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망각한다. 게다가 평양을 중시해서 일 년에 네 차례 100일은 평양에 머무르라고 유훈을 남겼다. 개성과 평양을 합쳐 동그라미를 그려보라. 대척점에 무엇이 있는가? 백제의 수도는 서울과 공주 중심이다.
당시 한반도의 중심이 경주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망각한다. 서울도 아니고 개성을 수도로 정한 것은 너무 북쪽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고구려를 계승하여 평양으로 가고 싶었지만 북쪽에 거란이 있고 수도가 북쪽으로 치우치면 남쪽에서 반란이 일어날게 뻔하다. 호남은 원래 백제가 아닌데 백제가 고구려에 밀려 남하하면서 가야에 속한 침미다례가 백제에 편입된다. 지세가 역하다는 말은 산악을 의미하는데 호남에는 이렇다 할 산악이 없다. 후백제 견훤은 자진해서 나라를 바쳤고 왕건 오른팔 신숭겸은 곡성 출신이다. 태조의 장인 박영규도 순천이 근거지다. 망이 망소이의 난이 일어난 명학소는 대전 옆 유성이다. 풍수지리로 봐도 세종시와 신도안이 있는 충주 대전 일대가 매우 중요한 요충지다. 대전은 경상도와 전라도가 갈리는 갈림길이다. 대전을 틀어쥐고 반역을 한다면? 동학 농민군이 공주성을 점령하려고 한 이유다. 서울로 진격하지 못하면 공주에서 금강을 등지고 버텨야 한다. 지금은 철도 때문에 대전이 떴지만 당시는 공주가 중심지였다. 청주는 공주의 배후지다. 개성과 평양에 자리잡은 왕건세력과 맞설만한 지형이 된다. 당시는 풍수지리와 도참설을 믿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호남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호남은 개성에서 멀어서 반란을 일으킬 수 없다. 초반에는 청주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나중에는 평양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평양이 개성과 거리가 가깝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반란을 일으켜봤자 변방이라 아무도 호응하지 않는다. 1차로 노령에서 막히고 2차로 차령에서 막히고 3차로 한강에서 막힌다. 공주와 청주를 틀어쥐면 어떨까? 경상도와 전라도를 아우르고 경기도를 먹으면 개성을 겨눠 볼 만하다. 구조론과 맞잖아. 청주시와 세종시가 뜨는 이유다. 부산은 거리가 멀고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땅값이 싸서 투자 매력이 남아있고 충분한 배후지를 끼고 있어서 거점이 될 만한 곳은 당진항과 군산항을 양날개로 끼고 평택평야 바라보며 청주공항을 안으면? 세종시네. 초딩도 알겠다. 녹색으로 표시된 미호천을 공주강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그 경우 영역이 너무 좁아지는데 인근 주군이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으므로 금강 북쪽에서 차령 남쪽까지, 곧 공주와 청주 사이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공주성 바깥이라고 지명을 특정한 것이 중요하다. 호남지역을 의미한다면 그냥 금강 남쪽이라고 하지 차현이라는 지명을 특정할 이유가 없다. 지금은 교과서에 차령산맥이 나오지만 당시에 차현은 유명하지 않고 고개가 평지에서 해발 50미터에 불과하다. 문경새재와 같은 큰 고개가 아니고 그냥 작은 언덕이다. 결정적으로 호남은 너무 넓다. 국가 1/3으로 적으로 돌린다는게 말이 되는가? 그건 왕건이 정신병자라는 말인데 그럴 리가 있나? 실제로 호남 인물은 고려에 잘만 등용되었다. 경주에서 개성으로 수도가 너무 많이 올라갔기 때문에 중간 허리가 신경쓰인 것이다. |
북쪽으로 치우친 개성에서 보자면 충청, 전라, 경상 삼남을 아우르는 요충지 세종시가 신경쓰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