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가 아니라 균형이다. 우리는 쉽게 정의를 말하지만 정의라고 하면 여러 가지로 곤란해진다. 정의는 절대평가이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부족민을 그냥 살도록 놔두는게 정의인가 아니면 그들을 문명인으로 교양하여 그들의 비참한 처지를 알려주는게 정의인가? 우간다든 스위스든 국적을 불문하고 평등하게 같은 소득을 누리는게 인류의 정의인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 경우 통제할 수 없다. 안 되는건 안 되는 거다. 인간이라는 것들이 원체 말을 안 들어먹기 때문이다.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 아니라 호르몬과 무의식의 동물이다. 사람을 바꾸려면 생각을 바꾸고 호르몬을 바꾸고 무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무의식을 바꾸려면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 위태롭다. 정의를 추구하다가 자칫 인간의 본성을 건드리게 된다. 인간을 다치게도 된다. 호르몬과 무의식을 바꾸려면 환경변화가 필요하므로 설계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며 그것도 청소년기에만 된다. 개도 생후 4개월 무렵 사회화 시기에 길들여야지 그 타이밍을 놓치면 개통령 강형욱 훈련사가 나서도 힘들어 한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거다. 상대평가로 바꾸어야 한다. 통제가능성이 해답이다. 우리는 거저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사건에 휘말려서 누군가는 죽어야만 하는 상황이 있고 누군가는 살아남아서 그 소식을 전해줘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 세상은 절대 공정하지 않다. 기본소득제를 실시하여 부시맨에게 현찰을 쥐어줘도 쓸 줄 모른다. 명목상 정의는 가능하나 진정한 정의는 어렵다. 그러나 이익균형으로 보면 답이 있다. 한국여성이 출산을 기피하는 것은 합당한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균형이 무너졌다. 국가가 나서서 이익을 보전해줘야 한다. 군대는 이익균형이 없다.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우리사회를 위태롭게 하는 불안요소 중의 하나다. 배우지 못한 사람도 이익균형을 찾을 수 없다. 본인에게 뭐가 이익인지 분간을 못한다. 제 발로 염전으로 되돌아가는 지적 장애인 염전노예에게 본인에게 무엇이 이익인지 설득하기는 힘들다. 염전에서 구출해주고 끝낼 일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이익균형은 게임과 같다. 참여자들에게 공정하게 기회를 준다. 일정한 정도의 교육과 도움이 따라야 한다.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게임에 참여할 수 있다. 결과는 자기 책임이다. 참여자는 게임에 가담할 것인가 아니면 빠질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다. 균형이 무너지면 당연히 게임에서 빠진다. 다수가 게임에서 이탈하면 사회는 붕괴한다. 사회는 참여자가 게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보장을 해야 한다. 균형이 유지될 때 사회는 원할하게 돌아간다. 자본주의 게임과 민주주의 게임이 불완전하나마 사회에서 기능하고 있다. 이익균형은 정의가 아니다. 자연법칙이다.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자기 앞가림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세상은 밸런스에 의해 지배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인간이 사회에 기대할 수 있는 최소한이 이익균형이다. 완벽한 정의는 불가능하고 사회가 무너지는 것을 막는 최소한 합의가능한 지점이 이익균형이다. 사회유지의 마지노선이다. 그것이 옳다는게 아니라 최후의 방어선이라는 거다. 절대적인 정의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상대적인 이익균형에는 도달해야 사회가 작동한다. 이익균형이 무너지면 범죄가 창궐하고 국가는 실패한다. 아프가니스탄이나 베네수엘라가 그렇다.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 존중받지 못한다. 이리저리 휩쓸리고 강제되고 떠밀린다. 그것은 노예의 운명과 같은 거다. 전쟁이 일어나면 누구나 그렇게 된다. 재수가 없으면 왕도 죽고 귀족도 죽는다. 거기에 균형은 없다. 개인의 선택권은 존중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라고 다되는건 아니고 우리가 전쟁사회를 탈피해야 한다. 너죽고 나죽자식 전쟁사회를 자본주의 본질인양 떠는 자들이 위험하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게임에 참여할지 여부를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참여를 강제당한다면 황당한 것이다. 게임의 룰은 납득하고 동의할만해야 한다. 도박을 해도 밑천이 있어야 한다. 교육과 의료와 생존권 보장이 참여자의 밑천이 된다. 이익균형은 이상적인 사회가 아니고 최선이 아니며 정의가 아니며 도덕도 아니며 선도 아니고 사회가 합의가능한 마지노선이며 여기서 무너지면 사회가 깨지는 한계점이다. 이익균형은 빙점과 같다. 얼어붙는 지점이다. 끓어오르는 지점이다. 저울이 갑자기 한쪽으로 확 기우는 지점이 있다. 물리적으로 변화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호르몬과 무의식이다. 인간은 최선의 정의와 행복과 안락과 대접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참다가 참다가 더 물러설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태도를 확 바꾼다. 공격적으로 변한다. 그러한 저항의 지점이 있다. 배후에 균형자가 있다. 균형감각이 있다. 이명박근혜의 삽질에 참다가 참다가 폭발하는 지점이 있다. 호르몬이 작동하고 무의식이 움직이는 균형추가 있다. 시장에서 거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파는 사람은 비싸게 팔아야 좋고 사는 사람은 싸게 사야 좋다. 그러나 싼게 비지떡이고 비싼 것은 그림의 떡이다. 그것을 결정하는 균형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 균형범위 안에서 시장원리는 작동하고 거래는 일어난다. 매점매석을 하면 그 균형점이 사라진다. 구조가 망하는 것이다. 시장이 망한다. 시장이 항상 옳은게 아니고 균형범위 안에서만 옳은 것이다. 우리는 최악을 방지하는 균형있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개개인이 의사결정이 가능한 사회를 지향해야만 한다. 옳든 그르든 간에 본인이 판단하고 납득하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강제로 떠밀리면 안 된다. 강요당하면 안 된다. 본인이 잘못해서 빚을 졌다고 해도 신용불량으로 몰아서 생매장하면 안 된다. 본인 잘못이라도 선택하고 빠져나갈 길 하나 정도는 열어두어야 한다. 자립의 가능성은 있어야 한다. 자살로 몰아가면 안 된다. 좋은 쪽으로 몰아붙여도 좋지 않다. 사회가 최선을 지향하여 엄격하게 가면 모든 사람이 힘들어진다. 모두에게 충성을 요구하고 애국을 요구하고 봉사를 요구하고 희생을 요구하고 근검절약을 요구하고 도덕을 요구하면 안 된다. 모든 사람을 성인군자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참을 수 있는 한계선만 지켜주면 된다. 이익균형이 작동하는 바 개인의 의사결정이 가능한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각자의 이익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상대적인 에너지 낙차다. 예컨대 이런 거다. 사기꾼에게 속아넘어가는 자도 이유가 있다. 사기치는 기술을 배워 자기도 남을 사기쳐먹을 속셈 때문에 사기를 당하는 거다. 사기꾼 두목은 말한다. 저 사람이 만만한 호구인데 우리 같이 작업하자구. 자신이 호구인줄 모르고 낚이는 것이다. 아 이것이 이중설계다 하고 배운다. 배우는 것이 있으므로 가담하는 것이다. 나름대로 이익이 있고 에너지 낙차가 있다. 다단계도 비슷하다. 다단계를 하면 대인관계가 좋아지고 언변이 늘어난다. 어색한 친구와도 편하게 말을 걸 수 있을 정도로 화술이 늘고 뻔뻔해진다. 그런 은밀한 이익을 탐하다가 덫에 걸리는 거다. 먹이사슬의 피식자에게도 포식자에게도 나름대로 이익과 리스크가 있다. 리스크는 회피하고 이익만 탐하다가 덫에 걸린다. 종교가 대표적이다. 교주는 큰 리스크에 큰 이익을 먹고 신도는 작은 리스크에 작은 이익을 취한다. 거기에 균형이 있다. 자발적 의사로 종교에 가담하거나 혹은 빠지거나 결정하게 하는 균형점이 있다. 십일조를 십이조나 십삼조로 올리면 신도는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다. 그런 의사결정의 균형점이 있다. 사회는 그런 균형을 위주로 조직되어야 하며 우리는 균형있는 사회, 사람을 막다른 절벽으로 몰아붙이지 않는 사회, 개개인이 주어진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고 결정할 수 있으며 강제적으로 내몰리지 않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이익균형이 완전히 무너지는 지점은 인도의 카스트제도나 아랍의 명예살인이나 한국 남자의 군대나 여성의 성차별을 들 수 있다. 노조를 만들지 못하도록 억압한다든가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살펴보면 도처에 균형이 무너지고 강제로 떠밀리고 덫에 걸리고 빠져나올 수 없도록 잘못 설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유주의니 시장경쟁이니 하는 이름으로 그러한 난폭함을 정당화 한다. 한 번 비정규적으로 출발하면 헤어날 수 없는 나쁜 미끄럼틀로 빠져버린다든가 하는 것이 그러하다. 이익균형이 최소한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설사 나쁜 길로 가더라도 본인이 선택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강요하지는 말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