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에 임하면서 자신과의 전쟁이 더 큰 문제인가 봅니다...
2차대전때 소련군 전사자중 백만명이 전쟁터에서 뒤로 빼다가 죽은 숫자라고 들었는데...,
참 현대전 양상이 한 세대후에도 이럴지... 강제와 자율과 고민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짚어봐야할지...
오호. 축하하오.
올해는 서점가를 정복해야 하겠소.
추카하오. 본좌도 빨리 와꾸잡고 책을 내야겠소.
오 멋진걸
멋진 보이~ ㅋ
축하!
대박 축하!!
오...축하드려요!!!
시사 리트윗 보면서.... ㅋㅋ
양모님 축하하오!
도서관에서 대출 1위가 아니라
서점에서 판매 1위로 가자! ㅎㅎㅎ
박그네가 죽인 거죠.
세상은 좁아도 박그네는 많소.
도처에서 출몰하오.
그만큼 많은 아론들이 죽는 거군요.
마음이 아프다.....
aron곁에 없던건 우리 모두의 죄...
50년일까?
아론 슈와츠의 죽음을 슬퍼해야 하는 까닭 | Bloter.net
2013년 1월 11일, 불과 26세(한국 나이로는 27세)의 나이로 아론 슈와츠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삼촌 마이클 울프가 밝힌 바에 따르면 사인은 자살이다. 슈와츠는 국내에는 오바마가 지난 대선에서 국민과의 대화에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유명한 소셜 뉴스 사이트 레딧의 초기 개발자다. 그는 정치 개혁에도 관심이 높아 정보통신기술을 사용해 정부 투명성을 제고하고 시민 참여를 높이는 방안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데 노력했다.
인터넷 자유의 강력한 옹호자이자 위대한 해커
아론 슈와츠는 크레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라는, 지금은 광범위하게 쓰이는 저작권 디지털 라이선스가 처음 만들어질 때 기술적 부분에서 크게 기여했다. ‘변화를 요구하라’(Demand Progress)란 단체를 설립해 지난해 초 전세계적으로 문제가 됐던 미국의 지적재산권 보호 강화 법안인 온라인 해적행위 방지법안(SOPA), 지적재산권법안(PIPA)에 적극적 반대 활동을 벌였다. 최근까지도 그는 더 자유로운 인터넷, 더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의회 개혁 단체인 루트스크라이커와 온라인 시민 운동 네트워크인 아바즈와 같은 재단에서 활동했다.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유수의 언론들이 보도한 것처럼 신년 벽두부터 인터넷 세계는 그들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21세기의 가장 위대한 해커 중 한 명을 잃어버렸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행사에 참여한 아론 슈와츠. Fred Benenson의 사진. (CC BY)
개인적 자살? 제도적 타살!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정치적 천재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흔히 천재의 요절에서 생각하기 쉬운 광기나 병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아론은 그가 너무 아론다웠기 때문에 죽었다. 그의 이력에서 보듯, 14세부터 개발자로서 두각을 드러낸 아론은 기술적으로만 해박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민감했고, 실제로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행동했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시대를 앞서가려 하고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그에게 항상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자기 노트북으로 세계 최대의 논문 포털인 제이스토어(JSTOR)의 자료를 불법 유출해 소장했다는 혐의로 아론은 연방법원에 최대 50년 감옥형을 받을 수 있는 중범죄로 기소됐다. 아론은 무죄를 주장하며 항소했으나, 법원의 저작권 보호에 기운 성향을 알고 있기에 자신의 미래에 대해 암울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물론 현행법에 따르면 아론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도 없다. 그가 한 행동이 가장 바람직한 행동이었는 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하지만 법원이 제이스토어가 자신들의 정당한 재산을 “훔쳤다고” 주장했으나 그 자료를 토대로 아무 상업적 활동도 하지 않은 아론을 테러리스트 취급해 최대 50년 감옥형을 기소한 것은 더 회의적이다. 아론의 어머니가 해커뉴스에 쓴 바에 따르면 아론은 이 문제로 지속적으로 우울증에 시달려왔다. 유족들은 이것이 그의 죽음의 결정적 계기였다고 주장한다. 아론의 죽음은 개인적 자살이 아니라 제도적 타살이었다.
로렌스 레식, “아론의 죽음은 아론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아론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이며, 하버드 로스쿨 교수이고, 인터넷 관련 법·정책에 관한 국제적 권위자인 로렌스 레식은 그의 블로그에 아론의 죽음에 대한 장문의 추모글을 썼다. 변호사이자 친구로서 아론이 어떻게 소송에 연루됐는지, 그로 인해 그의 개인적, 사회적 삶이 어떻게 피폐해져갔는 지 지켜본 당사자로서 레식은 ‘아론의 죽음이 아론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라고 썼다. 레식은 아론이 추구한 방법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목적에는 전적으로 동감했다고 했다. 인터넷 산업과 사회 정의를 위해 그토록 무수한 노고를 그렇게 짧은 시간에 열정적으로 다한 젊은이에게, 원고가 ‘훔쳤다고’ 주장한 자료로 아무 상업적 활동도 하지 않은 ‘피고’에게 최대 50년 감옥형을 기소하는 사법 시스템은 부정의하며 수치라고 지적했다.
사실, 레식이 지적한 것처럼 애초부터 상업적 목적으로 대규모 투자 유치를 통해 제작된 할리우드 영화도 아니고 논문은 상업적 동기도, 가치도 그렇게 높지 않다. 대부분의 교수나 연구자들이 중시하는 것은 논문으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명성을 얻는 것이고, 그러려면 해당 논문이 최대한 확산되는 것이 더 이상적이다.
▲Lawrence Lessig and Aaron Swartz (2002) / Rich Gibson / CC BY
나아가 레식은 그런 시스템을 만드는 미국 정치의 로비 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웹2.0 패러다임을 창시한 오라일리 미디어의 팀 오라일리, 유명 SF 소설 작가인 코리 닥터로우, 하버드 버크만 센터에서 글로벌 보이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에단 쥬커만, 월드와이드웹(WWW)의 창시자 팀 버너스 리도 비슷한 시각에서 각자의 블로그 혹은 트위터를 통해 아론에 대한 추모와 아론을 죽음으로 내몬 현실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
왜 우리는 아론 슈와츠의 죽음을 슬퍼해야 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론 슈와츠는 무명이다. 그의 죽음은 자신이 살아왔던, 살아가고자 하는 삶과 많은 부분에서 무관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아론이 싸워왔던 현실은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아론은 새로운 기술이 기존 사회의 이익과 권력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혜택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기회를 주는 것이라 믿었다. 아론은 사회에 부정의와 부조리가 있을 때 그것을 관망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기술의 발전이 사회의 부정적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이바지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그 믿음을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했다.
물론 아론은 복잡한 인물이었다. 아론은 때로는 극단적인 방식을 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기술이 더 발전한 세상이 더 사람이 살만한 세상이 되기 위한 비전과 열정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헌신했다는 점이 과소평가되서는 안 된다. 각종 법률과 정책을 이용해 어떻게든 신기술을 자유보다는 통제로, 평등한 기회의 확산보다는 불평등한 구조의 지속으로 이끌려는 산업 이해관계자들과 현명하지 못한 정책결정자들 사이에서 아론은 우리가 다음 세대에 대해 희망을 품게 하는 보석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를 죽인 시스템은 사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도, 혁신 경제와 민주 정치를 21세기에 지속해나가는 데 있어서도 큰 도전이고 위협이다. 그것이 우리가 아론 슈와츠의 죽음을 슬퍼해야 하는 이유다. 이젠 더 이상 그는 우리 곁에 없지만, 그의 유지는 잊혀져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에.
존재불안.
구조론게시판 일본과 같은 넘이오.
나를 좀 알아보고 친하게 대해 달라고 자기 소개하고 싶어하오.
늙은 수컷 침팬지 증후군.
맞소.
의사결정권을 상대방에게 넘기는 건데
친한 사이에는 저 수법이 먹힙니다.
안 친한 데 저런 수법 쓰다가는 개망신 당하지요.
근데 같은 기자들끼리 모여 있으면
우리끼리 다 아는 사이인데 하고 어물쩡 넘어가는 일이 많습니다.
그걸 노린 거죠.
왜 안 물어본 이야기를 하겠소?
1) 아무도 안 물어봄
2) 아무도 안 물어보니까 이야기 할 데가 없음
3) 이야기 할 데가 없으니까 답답함
4) 답답한 마음에 시도 때도 없이 자기 얘기를 늘어놓음.
그렇다면 왜 아무도 안 물어볼까?
원래 개인사 따위는 알 바 없고 물을 것도 없소.
사람들도 실제로 궁금해하지도 않고
연인끼리 서로의 개인사를 시시콜콜 묻는 것은, 지금 연인사 1막 1장을 공저하고 있는 중이라 그런 거고
가족끼리 서로의 개인사를 묻는 것은 지금 가족사를 집단창작하고 있으니까 그런 거고
위인전기에서 개인사를 쓰는 것은 집단지성이 어떻게 한 개인의 몸을 빌어 구현되었나를 추적하는 차원에서 쓰는 것에 불과하오.
연예인의 사생활이 기사거리가 되는 것은 사람들이 정말로 그 연예인의 사생활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안주삼아, 그것을 대화의 거리로 삼아 사람들과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때문인 것이고 결국 관심은 그것을 빌미로 서로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데 있지 않겠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론 사이트에서 혹은 다른 사이트에서, 혹은 사람들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개인사를 맥락 없이 떠드는 것은, 그것을 보다 큰 공동체의 역사와 연결짓지 못했기 때문이오.
개인사를 떠벌이는 것은
무리에서 퇴출당하게 된 수컷이
마지막으로 결정권을 암컷들에게 넘겨서 최후의 베팅을 하듯이
상대방에게 결정권을 넘겨서 동정심을 구하는 방법인데
친한 사이에는 먹히는 방법입니다.
퇴물 침팬지는 암컷들과 친하니까 먹힐거라고 기대하지만
암컷의 마음은 이미 차갑게 돌아섰습니다.
제가 여기서 잘못했군요 . 조심하겠습니다 .
제목보고 윤창중인 줄 알았소.
그 인간 마음 속에는 '내가 니들 보다 선배야'
'나도 기자했으니, 니네 맘 알어. 적당히 넘어가줘...'
자꾸 엥길려는 윤창중. 구역질나서 이제 그 사람 기사는 클릭 안함.
대변인 시킬 놈이 그리도 없시까
.
꼴통들 대변인은 꼴통 중에서도 최꼴통이라야 한단 말인가!
암튼 잘 골랐다 카이!
일본에서는 바지를 즈봉 또는 판츠라고 부르는데
판츠는 두가지 뜻이 있음. 바지와 팬티.
바꿨소.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
혼자 팬티바람으로 나갔다가 다른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나만 개쪽이니까...
그건 중요한 이유가 아닐듯하오.
한국인도 놀 때는 잘 놀지 않소?
말춤도 잘 추고.
여성의 신체는 부모, 남편, 애인이든 누군가의 소유물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남자만 참여한다면 별 문제 안삼을지도 모름
상당히 그럴듯하지만 핵심적인 이유는 아니라고 보오.
이유는 국경이 없어서,
국경이 없다는 건 팬티만 입고 다닐 때 개나 소나 참견한다는 것이오. 왜? 개인을 보호할 국경이 없으니까. 대한민국에서 개인의 사생활보호는 독재자 개때 때문에 사라졌소.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이 놈들이 대한민국에서 개인의 사생활 보호라는 개념을 없어버렸소. 왜? 독재의 본질이 노예화이고. 노예에게는 주인 모르는 사생활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오. 그 유구한 사생활 침해의 전통으로 인해 부모님부터, 선생님, 지하철 할배, 직장 상사, 길가던 행인1, 길가던 행인 2의 참견은 이어지고 참견=폭력이기 때문에 폭력도 이어지오. 다구리에는 장사없소. 한국인들은 뭇매맞기 싫어서 팬티 위에 바지를 입는 거고, 뉴요커들은 뭇매맞을 일 없으니까 하는 거고.
맞는 말씀이오만
더 핵심적인 정답은 한국인의 뇌는 저런 이벤트에 반응하지 않는다고 보오.
재미를 못 느낀다는 거죠.
오늘의 유머 사이트를 보면 네티즌들이 매우 열심히 개드립을 치고 있는데
기성세대는 절대 하지 않습니다.
왜?
재미가 없으니까.
뇌의 차이가 있다고 보오.
제가 생각한 정답은
한국인들은 저게 재미있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오.
재미 있으면 합니다.
재미가 없으니까 안 하는 거죠.
일본인들은 강남스타일 말춤이 재미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 좋아하지요.
재미없어서?
재밌을 것 같은데용 ㅎ
현대성을 이해하는 사람만 재미가 있습니다.
저 놀이에 현대성이 어떤 점인지? 도통...
미국 유학한 친구가 사진을 보여줬는데,
걔들은 양복입고 졸업파티한 다음에 기념사진을 찍었던데,
한손엔 음료수들고,
죄다 바지를 바닥까지 내리고 팬티(트렁크) 차림으로 찍었더라구요.
근데 이게 재밌나????
이태리가구와 핀란드가구의 차이는 재미의 차이입니다.
김기덕 영화가 재미없는 사람은 진짜 재미가 없는 거에요.
영화 보다가 중간에 나갑니다.
예전에 극장에서 김기덕 영화를 보는데
저하고 아무님과 둘이서만 웃더군요.
아무도 안 웃는데 혼자 웃으려니까 미안하더만요.
나는 우서워 죽겠는데 다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더만요.
지하 주차장 기둥 뒤에 공간있다놀이에
열심히 참여한 33만 조회수는 거기에 재미를 느낀 겁니다.
근데 아직 한국인은 김기덕 영화에 재미를 느낄 수준이 못 됩니다.
언젠가 (50년후?) 한국인의 수준이 높아져서 저런 이벤트에 재미를 느끼게 될지 확신하지 못하오.
10년 안에는 절대 불가능하다는데(이벤트가 아니라 재미를 느끼는 수준) 내 손모가지를 걸겠소.
낸시랭이 실패하고 있기때문
재미가 있어서 했겠지만
영국의 경우는 일조량이 적은 관계로
평소에 아무데서나 옷 벗고 일광욕하던 습관이 있어서
하의실종에 거부감을 덜 느끼는 것도
조금은 작용했을 듯
유튜브에 올라온 플래시몹 영상을 보면
대합실이나 백화점 같은데서 각자 준비한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나 춤을 피로하거나 하는 걸 보면
하는 사람들도 보는 사람도 흥미를 느끼는데
어떤 비계획성, 우연성, 돌발성 같은데에 신선함이 있는 것 같음.
뭐 우연이란 없지만 단 사람들은 그런 돌발성을 애초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계속 거론할 일은 아닙니다.
그렇군요...-_-
조금 있다 삭제하겠습니다.(__)
조성민의 죽음보다
최진실의 죽음이 더 중요한 사건이고
조성민을 죽인 사람들은 최진실을 죽인 사람들과 정확히 같은 사람입니다.
그때 이미 결정된 것.
남탓하는 사람들이 죽인 거죠.
존재불안에 빠진 사람들이
공연히 불안해서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들이 작은 문제를 큰 문제로 증폭시킵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죠.
자신의 쓸데없는 참견이 문제를 증폭시켰다는 사실을.
그래서 양심에 찔리고
찔리니까 아프고
아프니까 화나고
화나니까 남탓하고
남탓하면 그 에너지가 쌓여있다가 어딘가로 터지는 거죠.
그리고 사람이 죽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내가 제일 내막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나쁜 사람입니다.
왜 남의 가정사를 시시콜콜 알고 있지?
그 자체가 범죄임을 왜 모르지?
공적인 일에 대해서는 알 권리가 있듯이
사적인 일에 대해서는 모를 의무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의 세세한 부분을 다 알고 있다면 범죄입니다.
자식의 일기장을 훔쳐본 거죠.
인권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사생활 보호입니다.
삭제하려고 했는데...
김동렬 선생님의 이 댓글 덕분에 삭제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ㅎㅎ
'존재불안에 빠진 사람들이 쓸데없이 남의 일에 참견하고' = 왠지 귀가 간질간질....-_-;;
구구절절공감갑니다
이것절반만실천해도 성인군자되겠네요ㅎ
그런데 오히려 사회가 이것을 왜곡하게 함.
혼란함. 다시 생각하고 볼 필요를 느끼게 함.
다시 제대로 볼려면, 왜곡되지 않게 봐야 하는데...기존의 틀로는 잘 안됨.
그래서 구조론 하고 있는 것임....내생각.
그런데 아란도님 말씀대로 왜곡이..
결국 인간존엄 한방으로해결됨
문제는 저 백가지를 알고 있고
이미 담임과 교사에게 친구에게
충분히 받고 경험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낯설게 느껴진다는점
개인에게는 충분히 경험된 것들이 사회는 충분하게 경험되지 않고 축척도 못해놓았음. 그러니 지금 그 작업을 해야 하는데 못하게 됐고계획이 변경된거 아니겠는지요. 개인을 교육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가 그 정도 존엄을 축척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네요.
잔소리꾼이 되어 왕따가 되고,
47번대로 진실을 말하면 더 혼난다.
위의 제언은 그 자체로만 보면 좋지만
구조론적으로 재구성을 해야함.
상호 모순적인 어구를 상황을 중심으로
풀어가야함.
가르치면 안 되는.
아니면, 가르치지만 그대로 하면 안 되는.
세줄만 읽어도
벌써 마음이 답답해져오는..
어린 딸에게 이런 걸
가르쳐주고 싶진 않군요.
100가지가 다 `위하여 ` 아닌가요?
`의하여 살아가라`
한줄로 대신하고 싶소.
내용은 뭐 다 동어반복이고
본은 놔두고 지엽말단을 강조하는거.
근데 학교에서 안 가르치는건 본이고
이런 지엽말단은 다 가르쳐주지 않습니까?
다 쌤한테 들은 이야긴데.
내가 학교에서 못 배운 것은 '생각하는 방법' 이런거죠.
보통 '왜?' 라고 물으며 생각을 시작하는데 안 좋소.
'왜?' 를 구사해서 제대로 답이 나오는 꼴을 못봤소.
뻔한 소리.
책에 있는 소리.
남의 소리.
.
.
훈장질 소리
하나마나한 소리.
바다가 있다는 것.
목포항에서 출발할 수 있는 바다가 있고,
존엄항에서 출발할 수 있는 바다가 있고,
존엄항 안에 평등항, 평등항 안에 자유항, 자유항 안에 사랑항, 사랑항 안에 행복항 있다는 것.
싸이는 행복항에서 K팝호를 타고 출항하여 YG팀과 콘텐츠로 엮은 그물을 던져 10억뷰를 낚은 것.
풍작은 셀레는 소식이오.
그리하라고 해.
훈장없는 세상에 살고싶다.
역시 인간의 한계를 넘어신 분(糞)이야~
대단하오.
기발하군!!!
저는 사람이 아니므니다.
체면, 염치는 필요가 없는 앞바퀴, 뒤바퀴.
분리된 세상...
가카 뭔들 못하겠어..
가카는 그러실 분이?
훈장도 셀프, 사면도 셀프, 가카는 워프
조까튼 세상, 생각보다 빠름 빠름 빠름~
울랄라 세션이 나왔던 슈스케3를(2011년) 첫회부터 마지막 결승전까지 다 봤습니다.
개인적으로 작년 슈스케4는 별로 재미없었고 가장 재미있었던 시즌은 허각이 우승한 시즌2(2010년) 였는데요.
슈스케3에서 임윤택이 보여준 모습은 한마디로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준우승한 버스커 버스커도
좋았지만 슈스케3는 울랄라 세션 때문에 빛났었다라고 말할수 있을거 같습니다.
임윤택이 보여준 뛰어난 리더십, 강한정신력, 센스있는 음악감각, 패션감각, 통찰력, 뛰어난 언변등은 정말 놀라웠죠.
음악을 하는 그룹에서 팀이란 이런것이다.. 리더의 역할이란 이런것이다 라는걸 보여줬다할까요.
임윤택에게 정말 기적이라는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픈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