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먼저 국가먼저 - 팟캐스트 모임 때 나온 이야기입니다.- 구조론은 사건으로 본다. 사건으로 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그것은 에너지의 결이다. 에너지가 진행하여 가는 루트다. 세상은 마이너스다. 에너지는 언제나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엔트로피다. 에너지는 일방향성을 가지며 그 역은 없다. 에너지는 닭에서 달걀로 간다. 그러므로 닭이 먼저다. 달걀이 스스로 닭이 될 수 있다면 외관상 달걀로 보여도 사실은 그게 닭이다. 유전자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언어의 함정이다. 언어는 고무줄이라 의미를 늘리거나 줄일 수 있다. 달걀의 의미를 늘리고 닭의 의미를 줄이면 된다. 그래서 맥락이 있다. 맥락으로 보면 이런 식의 궤변은 털린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전체에는 부분의 합에 없는 질서가 있으므로 전체가 부분에 앞선다. 그러므로 국가가 국민에 앞선다고 생각하기 쉽다. 역시 언어의 함정이다. 국가가 뭐지? 자의적으로 국가의 의미를 확대해석하고 있지 않은가? 역시 맥락을 살펴 틀어진 언어를 바로잡아야 한다. 국가는 소집되어야 국가이고 평시에는 그냥 인간이 존재하여 있는 거다. 우리는 국민이 아니고 사람이다. 국민이라는 표현은 소집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소집되어 있는가? 소집되었다는 말은 예컨대 전시상황과 같다. 전시에 여자는 소집되지 않으므로 괜찮다고 여긴다. 천만에! 적의 포탄이 낙하하는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소집될 수 있다. 심지어 외국인이라도. 징발권이다. 지휘관은 전시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징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소집을 피하고자 한다면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잽싸게 외국으로 튀어야 한다. 근데 김정은이 미사일로 쫓아온다. 징발가능한 소집범위가 터무니없이 확대되었다. 전시에 전장 안에서 지휘관은 무제한적으로 징발할 수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병역법이라든가 기타법률로 제한되지만 원리적으로 그렇다. 구조론은 원리를 봐야 한다. 소집되어야 국가이며 동원되어야 국민이며 그전에는 그냥 사는 거다.
구조론은 말한다. 세상은 마이너스다. 태양이 깨져야 지구가 살고, 지구를 파먹으며 인간이 살고, 인류가 깨지면서 국가가 살고, 국가가 깨지면서 가족이 살고, 가족이 깨지면서 개인이 산다고. 밑으로 내려가면서 계속 깨지는게 마이너스 원리다. 국민이 국가를 위해 희생한다는 논리는 반대다. 국가가 있어야 국민도 있다는 논리다. 이는 전쟁과 같은 특수상황 곧 소집된 상태에서 유의미한 말이며 구조론으로 말하면 국민이 질이고 여기서 국민은 대표성 있는 국민이며 국민이 소집되어 대표성을 행사할 때 국가는 성립되는 것이며 개인은 다른 거다. 국민 다음 국가 다음 개인 있다. 우리는 부모가 자식을 돌본다고 믿는다.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반대다. 자식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눈빛공격으로 부모의 뇌를 자극해 호르몬을 끌어내는 거다. 아기가 부모를 통제한다. 부모가 살아야 자식도 사는게 아니고 부모가 희생되고 자식은 산다. 이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아기가 울고불고 뒹굴고 떼를 쓰는 것은 가족을 소집하는 것이다. 가족이 소집되어야 가족과 내가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알고 안심한다. 국민 누구든 소집권이 있다. 그것이 대표성이다. 물론 근거없이 소집하면 양치기 소년이 된다. 누구든 마을사람을 부를 수는 있다. 늑대가 나타나면 말이다. 국가는 그냥 있는게 아니고 늑대가 나타났을 때 양치기 소년이 정부를 소집하면 작동하는 것이다. 과거 프랑스의 3부회처럼 소집되어 일하고 해산한다. 지금은 1년 내내 국회가 소집되지만 이는 일이 많아서 그런 것이고 이는 국가라도 마찬가지다. 소집절차가 있다. 우리는 일년내내 국가가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간주하는 거다. 어쨌든 소집된 상태에서는 국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전시상황에서 적진을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하면 따라야 한다. 그러다가 죽잖아? 아니다. 이미 죽었다고 간주한다. 전쟁발발과 동시에 병사는 이미 죽은 상태로 간주된다. 그런데 지휘관이 미쳤다면? 역시 지휘관이 죽었다고 간주한다. 지휘관이 미쳐서 민간인 학살을 지시하거나 쿠데타를 명령하거나 이유없이 잠수함에서 핵미사일을 발사하라고 요구하면 지휘관은 사망상태로 간주하고 사망확인을 한다. 그 상태는 소집이 깨진 것이다. 뭐든 절차가 있는 거다. 우리는 절차도 없이 그냥 국가가 존재하고 국민이 있다고 여긴다. 있긴 개뿔! 국가가 어디 있냐고? 그것은 약속으로 존재하며 약속은 지켜질 때 의미가 있는 것이며, 약속은 부단히 재확인되어야 하는 것이며, 누구든 국가를 소집할 권리가 있는 것이며 누구든 늑대를 발견하면 소집할 수 있다. 소집할 권리를 가진 대표성 있는 국민이 질이고 그렇게 소집된 국가는 입자이고 그렇게 소집된 개인은 힘이거나 운동이거나 량이다. 공군 1호기에 동승하고 문재인을 따라 베트남을 다녀온 신의현 선수 부부는 개인이 아니라 대표로 간 것이다. 개인자격이 아니라 국민대표 자격으로 간 것이다. 그러한 대표성을 획득해야 한다. 누구든 늑대를 발견한 양치기 소년 입장이 되면 대표성을 획득한다. 스스로 대표성을 부여해야 한다. 당신은 국가를 소집할 수 있어야 한다. 아기는 울고 뒹굴어서 가족을 소집한다. 소녀는 뱀을 보고 비명을 질러서 동료를 소집한다. 그렇게 동원되어야 사회다. 그러한 소집과 동원의 시스템 안에 권리가 있고 권력이 있다. 국민이 먼저고 대표성이 먼저이며 대표성 있는 국민이 정부를 소집하고 국가를 소집한다. 그다음에는 국가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소집에 응하지 않으면 스티브 유가 된다. 이때 배신자는 공민권을 박탈당하므로 죽여도 된다. 물론 형법이 있으므로 스티브 유를 죽이면 안되지만 원리적으로 그렇다. 공민권이 박탈되면 사물로 간주한다. 돌이나 흙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 당신이 인간으로 대접받는 것은 당신이 대단히 잘나서가 아니라 당신이 소집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연권으로 부여된 소집권을 발동해서 저기에 늑대가 있다고 외치며 나를 고발한다. 그러면 나는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늑대로 간주되어 사냥당한다. 내가 사냥당하지 않으려면 당신을 인간으로 보고 존중해야 한다. 하일지 교수를 보더라도 그렇다. 강의실 안에서는 교권이 우선이다. 소설가라면 이혼녀에게도 욕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게 소설이니까. 거기까지는 문제없다. 사건은 그다음이다. 한 학생이 소집권을 행사했다. 이건 2차가해인데요? 그 즉시 하일지는 해명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 순간부터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아니라 소집된 국가와 개인의 관계이니까. 그 학생이 대표성을 가져버린 것이다. 하일지는 졸지에 늑대로 몰려 사냥당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학생이 양치기 소년이라서 허위고발을 했다면? 생사람을 잡았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철학이 필요하다. 중요한건 맞대응이다. 하일지는 해명하건 사과하건 즉시 대응해야 한다. 그냥 나는 교수니까 내맘이야 학생이 왜 까불어 하고 똥고집을 피운다면 교양이 없는 사람이다. 교양인이라면 즉시 대응해야 하며 그러한 대응과 맞대응이 맞물려 돌아가며 균형지점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사회는 작동한다. 하일지가 위험발언을 하면 학생이 대응하여 소집권을 발동해야 한다.
학생이 무리한 늑대사냥을 시도하면 역시 맞대응하여 교권을 행사해야 한다. 누가 옳은지 따져보자 하는건 얼빠진 행동이다. 따질거 없고 대응하는게 중요하다. 해명하든 사과하든 전선을 만들어야 한다. 대응하지 않으면 통제되지 않는 자로 간주한다. 즉 공민권이 박탈되어 늑대로 취급된다.
서로 맞대응하면 피아간에 전선이 만들어지고 그 전선의 존재가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며 그것으로 신뢰를 생산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선의 존재를 알고있는게 중요하다. 누가 옳은지는 상관없다. 말하다보면 선을 넘을 수도 있고 그런 거다. 긴밀하게 대응하지 않고 묵살하다가는 사냥당한다. |
참 명문입니다! 구조 정치론이라고 명명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