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내게는 할 이야기가 있다. '신은 있다. 기적은 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오래 묵혀둔 이야기다. 해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이건 진지한 이야기다. 종교의 관점은 배제해야 한다. 그러나 21세기 이 개명한 시대에 왜 여전히 종교가 기능하고 있는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그 부분에 대응해야 한다. 종교의 근본은 신이고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경로는 기적이고 인간이 기적에 대비하는 방법은 기도이다.
'신'이라는 표현이 못마땅하다면 ‘의사결정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구조론으로 보면 세상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그러므로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의사결정의 중심이 있다. 사건을 끌고 가는 에너지의 원천이 있다. 수염난 할아버지의 모습을 한 그런 신은 없어도 인간으로 하여금 그런 상상을 하게 만든 근본이 있다. 모든 것의 연결의 중심이 있다. 원리적으로 있다. 의사결정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그 중심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기적'이라는 표현을 받아들이기 싫다면 ‘기적적’이라고 하면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수학적 확률과 자연에서 실제로 사건이 일어나는 방식은 다르다. 에너지의 각별한 성질 때문이다. 사물이냐 사건이냐다. 우리는 사물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세상은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연결이다. 사건의 작동방식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사건을 지배하는 것은 에너지다. 일반의 상식과 다른 에너지의 성질이 기적을 연출한다. 사물은 공간에 펼쳐지고 사건은 시간을 타고 간다. 공간은 폭넓게 흩어져 있으나 시간은 한곳에 극적으로 몰려 있으니 타이밍이다. 그러한 차이에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도'라는 표현이 싫다면 '호르몬'으로 바꾸면 된다. 본질에서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환경과의 관계다. 그 관계를 바꾸어야 한다. 환경에 종속되면 실패다. 그 경우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 환경을 극복해야 한다. 환경과의 관계는 호르몬으로 나타난다. 이성이 아니면 본능이다. 본능은 가만 놔두면 퇴행한다. 인간이 환경에 종속된다는 말이다. 위축되고 길들여진다.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반면 이성은 힘이 없다. 지식인도 위기에 몰리면 생존본능으로 퇴행하기 마련이다. 아는 것을 실천으로 옮기게 하는 방아쇠가 없기 때문이다. 호르몬이 바뀌어야 인간이 환경을 이겨서 생각이 바뀌고 삶이 바뀐다. 호르몬을 바꾸는 방법은 기도다. 인간에게는 지식의 축적만으로 부족하고 그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한다. 에너지를 증폭시켜 환경에 대해 지속적으로 우위에 서는 방법은 기도를 하여 호르몬을 끌어내는 것이다.
신의 증명
이런 주제는 오해되기 쉽다.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건드리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타고난 종교적 본성이 있다. 극복해야 한다. 기를 쓰고 오해하고야 말겠다는 분은 강퇴다. 오해할 사람은 얼른 오해하고 냉큼 꺼져주기 바란다. 오랫동안 글을 쓰다보니 그동안 별 해괴한 꼴을 다 보게 되었다. 좋지 않은 경험이 누적되니 피곤하다. 그래서 이런 경고를 때리는 거다. 진지 빨고 무겁게 가자.
신의 증명은 법정의 증거나 수학적 증명과 다른 거다. 성경책에서 단어나 문장 따위를 발췌해서 증거댄다는 식으로 나오는 박진영 초딩들은 일단 꺼져주기 바란다.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수학적 증명과도 다르다. 수학은 전제와 진술의 전개구조에서 전제를 충족시킨 다음 진술을 해명한다. 연역의 출발점이 되는 제 1 전제는 원래 증명되지 않는다. 이를 공리나 공준이라고 한다. 그런데 증명된다. 진술에 대한 메타진술이 나오고 최초의 진술이 그 메타진술의 전제로 유효하게 기능할 때 공리나 공준을 증명된 것으로 간주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공식을 적용해서 현장에서 실제로 문제가 풀리면 그게 증명된 것이라는 말이다. 어떻게 치료되는지 몰라도 환자가 치료되면 일단 약효를 인정한다는 말이다. 그 공식을 써서 달나라까지 로켓이 가주면 소숫점 끝자리가 의심되더라도 공식을 인정하는 거다.
구조론의 증명은 이와 다르다. 동치임을 보이는게 아니다. 개념을 정립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 내가 게임 속의 아바타가 아니란 보장은 절대로 없다. 아니다. 내가 게임 속의 아바타라도 상관없다. 의사결정단위가 존재하면 나는 존재한다. 나는 타자에 대해 나이기 때문이다. 나와 타자를 가르는 대칭과 호응의 구분선이 존재하면 설사 내가 게임 속의 아바타라도 나는 있다. 무슨 뜻인가? 내가 게임 속의 아바타라 치고 나는 나의 존재 이전에 작동하는 프로그램과 그 게임을 하는 게이머와 무관하게 나에 종속된 것들 곧 나의 마음, 나의 육체, 나의 직업, 나의 재산, 나의 권리에 의해 나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이다. 즉 내가 전제일 때 진술에 해당하는 나에 종속된 여러가지 것들을 내가 컨트롤 하는 데서 내가 증명되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나의 재산과 권리를 통제하지 못하면 나는 없는 것과 같다. 이건희는 죽은 것과 같다. 자신의 육체와 정신과 권리를 통제하지 못하면 그는 없는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자.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간다면 천국에 간 그 사람은 과연 나일까? 아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일은 절대로 없다. 만약 천국이 있다 해도 당신은 죽고 누가 당신 티켓을 훔쳐서 대타로 가는 거다. 환생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죽어서 소로 태어나든 개로 태어나든 부자로 태어나든 그렇게 태어난 사람은 당신이 아니다. 또 이런 것을 생각해보자. 마술사가 자신을 복제하여 둘로 만든 다음 하나를 죽였다. 영화 프레스티지에 나오는 이야기다. 나는 죽은 것일 것일까 살아있는 것일까? 죽었으면서 살아있는 것일까? 또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5억년 버튼이라는 만화가 있다. 당신이 버튼을 누르면 어느 별나라로 가서 5억년간 유폐된다. 5억년 후에 돌아오면 그동안 지구 시간은 정지해 있고 당신의 뇌에서 5억년 간의 기억이 지워지며 당신은 알바비로 1천만원을 챙긴다. 이때 당신은 5억년 동안 어느 별에서 개고생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버튼을 눌러야 할까? 그렇다. 5억년간 다른 사람이 나 대신 고생한 것이다. 5억년의 고생은 당신과는 관계없다.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교도소에는 5만 명의 알바들이 적은 보수를 챙기며 일하고 있다.
나라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며 사건은 사건의 단위가 있고 사건단위 안에서만 유의미하다. 내가 나인 것은 내가 복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칭과 호응이다. 대칭의 작동범위 안에서만 나다. 내가 호응하는 부분이 나에 해당하며 호응이 끊어지면 그것은 나가 아니다. 사건이 거기서 끝났기 때문이다.
신의 증명은 허무하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구조론의 신이다. 수학을 모르는 사람에게 수학적 증명은 의미없다, 구조론을 모르는 사람에게 구조론적 증명은 의미없다. 구조론의 제자에게만 유의미하다. 신이 당신이 믿는 그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염난 할아버지 신은 기독교의 것이며 공자와 노자와 석가의 신은 다르다. 신의 개념은 문화마다 다르고 종교마다 다르다. 또 신이 희미하기 때문이다. 개미에게 신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신의 사이즈는 사건의 사이즈와 같다. 큰 사건 앞에서 신은 크고 작은 사건 앞에서 신은 작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은 사건에 속하므로 신의 존재여부가 유의미하지 않다. 역사단위 그리고 문명단위의 큰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에게 혹은 일대사건에 가담한 사람에게 신의 존재는 유의미하다. 이 글을 읽는 다수의 독자들에게 신은 있든 없든 상관없다. 그런데 신은 있다. 당신에게는 어쩌면 안된 일이지만. 신의 존재가 과연 당신에게 좋은 소식인지는 의문이지만.
신은 공리와 같다. 그 공리를 적용해서 문제가 풀리면 공리는 인정된다. 이건희의 양자적 죽음과 같다. 신에 속하는 많은 영역들을 통제하지 못하면 신은 없다. 이건희는 없다. 법적으로는 이건희가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되겠지만 말이다. 법은 법이고 구조론은 다른 거다. 구조론은 그 통제되는 부분과 통제되지 않는 부분의 경계를 밝힌다. 사건이 결정한다. 존재도 사건이요 나도 사건이요 우주도 사건이고 신도 사건이다. 어쨌든 당신은 자기 자신의 존재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증명은 전혀 안 되겠지만. 이와 같다. 아니다. 사실은 당신의 존재도 증명된다. 당신의 행위에 의해 그것은 확실히 증명된다.
증명의 문제
증명한다는 것은 동치임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사물의 동치와 사건의 동치는 다르다. 사물은 같은 것을 하나 더 가져오면 된다. 사과가 사과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사과를 하나 더 가져와서 비교하면 된다. 그런데 사건의 동치는 조금 복잡하다. 공간의 사물에서 동치를 확보하기는 쉽다. 시간의 사건에서 동치를 확보하기는 쉽지 않다. 일단 시간이 걸린다.
존재의 근본은 사건이며 사건은 전부 연결되어 있다. 궁극적으로는 갈래가 하나이니 일원이다. 그러므로 일원론이 옳다. 그 하나에 도달하면 증명된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계통이다. 족보다.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것은 아버지를 데려와야 증명된다. 신분증을 조회해보면 동치를 확인할 수 있지만 이는 사물의 증명이고 사건의 증명은 다르다. 왕자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아버지가 왕이어야 한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가의 마지막 왕자라는 사람이 미국에 나타났다. '네가 왕자라는 증거를 대라.' 형을 데려와서 '형이 왕자니까 나도 왕자지.' 이런 식으로 엉기면 피곤하다. '아버지를 데려오라니까?' '아버지는 죽었다니깐.' 증명이 안 된다. 그런데 어떻게든 아버지를 데려왔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아버지도 가짜일 수 있다. 할아버지까지 데려와야 한다. 보통은 괜찮다. 아버지가 왕이라는 사실을 증언할 목격자들이 다수 있기 때문이다. 그 목격자들이 말하자면 할아버지다. 즉 어떤 것을 증명하려면 그 어떤 것과 그 어떤 것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증언을 검증할 제 3자까지 포지션 3이 필요한 것이다.
삼단논법이다. A=B, B=C, 고로 A=C에서 A,B,C는 잊어버리고 =와 =의 =를 확인하려면 = 셋이 정립된다. 사과가 사과임을 증명하려면 사과나무를 가져와야 한다. 그러나 사과나무와 사과의 관계가 의심될 수 있으므로 사과나무의 사과나무를 가져와야 한다. 계통수로 말하자. 종을 증명하려면 과와 속을 들이대야 한다. 어떤 동물이 호랑이임을 증명하려면 포유강 식육목 고양이과 표범속 호랑이종의 연결고리들에서 고양이과 표범속 호랑이종의 연속성을 보여야 한다. 개체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둘을 놓고 판단하는게 아니라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놓고 판단한다. 두 사람을 놓고 각각 판단하는게 아니라 둘 사이의 관계가 부자냐 부부냐를 판단하므로 둘이 있으면 연결고리 1이 있는 것이다. 연결고리가 구조다. 구조로 보면 둘이 엮여서 대칭 1을 조직한다. 족보에 마디 한 개로 부자 1촌을 구성하는 것과 같다.
'A=B, B=C, 고로 A=C'라고 하면 뭔가 3이 나왔지만 실제로 2가 나왔다. =가 둘 나온 것이다. 세번째 '고로 ='는 그 =에 대한 =이므로 층위가 다르다. 족보로 보면 부자관계를 표시하는 작대기가 둘이다. 부자는 1촌이고 할아버지까지 가야 2촌이다. 즉 증명은 어떤 둘의 동치를 확보하는 것이며 둘을 이루려면 셋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방법을 쓰더라도 족보의 맨 꼭대기는 증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다. 아담의 아버지는 누구냐? 없다. 이 경우는 자손으로 증명한다. 닭이 닭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달걀을 낳는지 봐야 한다. 그런데 닭이 실수로 꿩알을 낳았을지도 모르므로 달걀의 달걀까지 3대를 수립해야 한다. 황우석이 뭔가를 만들었는데 알고보니 꿩알이었다. 씨 없는 수박도 있고 노새도 있고 라이거도 있는 세상이다. 수상한 것이 잔뜩 있다. 1대만 가지고는 동치를 확인할 수 없다.
현대의 수학과 논리학은 사물의 증명이지 사건의 증명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쪽으로 연구가 진척되지 않고 있다. 신은 사건의 출발점이므로 그 자체로 증명이 안 된다. 신의 신을 데려올 수 없다는 말이다. 신을 재판하는 법정에 신의 신을 초치할 수단이 없다. 구신장을 발부한다고 해서 순순히 인간법정에 출두해줄 신의 신이 아니다. 그렇다면? 신의 낳음으로 증명하는 것이며 신이 낳은 인간이 또다른 무엇을 낳았을 때 3대의 연속이 확보되어야 동치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결구조가 통제가능성 속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신이 인간을 통제하고 인간이 문명을 통제할 때 신의 존재는 증명된다. 통제가 안 된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신이 희미하다고 하면 되고 통제가 된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신이 명확하다고 말하면 된다. 사건이 존재하므로 신은 부정할 수 없으나 희미한지 명확한지는 사건의 규모에 달렸다. 큰 사건은 명확하고 작은 사건은 희미하다. 인간은 큰 사건에 가담하는 방법으로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 구석에서 틈새시장 열지 말고 문명단위의 큰 흐름에 가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것을 증명한다는 것은 인간에 의해 지목되어 가리켜지는 어떤 대상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관계를 증명하고 계통을 증명하고 족보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신의 증명은 역시 신과 피조물인 인간 그리고 인간의 피조물인 문명까지 3대가 하나의 계통을 이룬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신이 인간을 만들고 인간이 AI를 만들고 AI가 또 무언가를 만들어 계속 간다. 계통이 존재하므로 신은 존재한다.
신은 권력이다
신은 권력이다. 권력은 위임된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집단의 의사결정을 대표자에게 위임한다는 말이다. 반대로 대표자가 집단의 구성원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는 것이 대표성이다. 의사결정이 있는 모든 곳에 권력이 있고 대표성이 있다. 의사결정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는 외부에서 들어와 사건을 진행시킨 후 다시 외부로 빠져나가며 그 에너지의 진행경로에 위치하는 누구든 브레이크를 걸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은 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계의 구성원들은 모두 의사결정에 가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권력이 있다. 권력의 작동은 기승전결로 가는 사건 진행의 각 단계에서 의사결정에 필요한 공간의 연결과 시간의 우선순위로 성립된다. 의사결정하여 연결고리의 공간적 방향을 바꿀 수도 있고 시간적 순서를 바꿀 수도 있다. 그 과정에 집단의 구성원들이 사건의 진행을 방해하거나 협조할 수 있는 만큼 권력이 있다. 하나의 사건은 5회의 방향전환 곧 5회의 의사결정을 필요로 한다. 그때마다 권력의 위임과 대표가 일어난다. 그래서 인간도 할 말이 있다. 철학의 최종근거다.
신이 있다는 것은 사건 안에서 공간적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며 기적이 있다는 것은 시간의 우선순위에 따라 적절한 타이밍이 있다는 것이며 기도가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그러므로 준비된 상태로 대기타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사건 안에서는 누구든 대표자가 될 수 있다. 축구선수는 누구나 패스를 받을 수 있고 야구선수는 누구나 타석에 설 수 있다. 사건의 진행을 방해할 수도 있고 협력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권리가 있고 권한이 있고 인권이 있다. 선점권, 소유권, 특허권, 참정권, 기득권 등의 다양한 형태로 권력은 작동한다. 다양한 형태로 방해와 협력이 가능하고 그만큼 권력의 위임과 대표가 가능하다.
그동안 인간은 권력을 지도자에게 위임하는 부분에 대해서만 말해 왔다. 권력의 위임에 의해 사회가 유지된다는 말이다. 특히 종교가 그러한 기능에 충실했다. 반대로 개인이 집단을 대표하여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부분은 말하지 않았다. 공자가 유일하게 그 부분을 무게있게 언급했고 니체가 그 언저리를 핥고 지나갔다. 구조론은 말한다. 집단을 대표하라고. 에너지를 끌어내라고. 사건을 일으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