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이야기를 하자 공연히 딴소리로 변죽 올리지 말고 진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선악이니 정의니 도덕이니 평등이니 박애니 하는 공허한 관념타령에 넘어가지 말자. 그딴 것들이 어떤 주장의 궁극적인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이런 관념들은 일일이 따지기 피곤하니까 대충 이 선 이상은 건드리지 말자고 사회가 암묵적으로 합의해놓은 규칙들이다. 시덥잖은 소리들이다. 무시해도 좋다. 선악, 정의, 도덕, 평등 따위가 사회를 규율하는 관념이라면 행복, 자유, 사랑, 명예 따위는 개인의 행동을 규율하는 관념이다. 역시 무시하자. 애들한테나 먹히는 사탕발림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니 내세니 윤회니 해탈이니 하는 것도 있다. 역시 바보 같은 이야기다. 글자 아는 사람은 그런데 넘어가지 않는다. 인간의 행동을 규율하는 최후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단 주먹이다. 물리적 힘이다. 돈의 힘도 그러하다. 물리적인 제압에는 데는 당해낼 장사가 없다. 날이 춥거나 배가 고프다면 어쩔 수 없다. 질병이나 고통이나 죽음도 같다. 역시 물리적 환경이다. 항우장사라도 죽음 앞에서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당해낼 수가 없다. 출신성분도 포함된다. 피부색이나 성별도 같은 거다. 성적 매력이나 타고난 재능도 같다. 역시 물리적 환경을 구성한다. 그러나 지사는 극복해낸다. 독립지사라면 식욕도 견디고 성욕도 넘어서고 죽음마저도 이겨낼 수 있다. 게다가 요즘은 문명의 발달로 인해 다들 팔자가 좋아져서 먹을 것도 많고 질병도 상당히 해결된다. 겨울 추위는 수입산 외투로 막고 여름 더위는 에어컨으로 막는다. 돈의 비참은 최저임금제로 막고 주먹의 침해는 법의 힘으로 막는다. 더 센 것은 없는가? 있다. 그것은 일 자체의 치고나가는 논리다. 그것은 관성력이다. 작용반작용은 피해도 관성력은 못이긴다. 기어이 사건은 벌어졌다. 거기에 흐름과 기세가 있다.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을 멈춰세우지 못한다. 이미 탄력을 받아버렸기 때문이다. 애초에 시작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하다가 중단하기는 어렵다. 담배도 잘 끊지 못하는게 인간인데 말이다. 성욕을 극복하기는 쉽다. 스님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다가 중간에 끊기는 어렵다. 이게 가장 세다. 무엇인가? 지금까지 말한 선악, 정의, 도덕, 평등과 같은 사회적 참견이나 행복, 자유, 사랑, 명예와 같은 개인적 바램이나 식욕, 성욕, 죽음, 두려움과 같은 생물학적 본능이나 천국, 내세, 윤회, 해탈과 같은 종교의 언설은 모두 인간 바깥에서 선택을 기다린다. 그곳은 작용 반작용의 영역이다. 인간은 선택할 수 있다. 선택을 잘하면 된다. 예컨대 행복이 문제라고 치자. 행복하다고 믿으면 된다. 산속의 자연인들처럼 말이다. 너무 쉽잖아. 선악? 이명박은 악도 선으로 믿으니 문제가 안 된다. 정의? 조금만 치사하면 인생이 즐겁다. 평등? 노예제 폐지하면 됐지 뭘 더 바래? 사랑?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는 거라구. 이런 식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것은 물리적 환경이다. 물리적 환경은 인간 내부로 침투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엮여버렸다는 말이다. 아프리카에서 더위를 피할 수 없고 알래스카에서 추위를 피할 수 없다. 아니다. 아프리카에도 에어컨 있고 알래스카에 난로가 있다. 문명의 이기로 인해 인간은 물리적 환경마저도 제법 극복해 버렸다. 그렇다면? 확실한 것은 그 엮임이다. 물리적 환경이 중대한 이유는 인간 내부로 들어와 엮여버렸기 때문이다. 그러한 엮임의 논리야말로 막강한 것이다. 최후의 근거가 될 만 하다. 그것은 관성력이다. 작용반작용의 힘은 엮이지 않았으므로 회피기동이 가능하지만 관성력은 이미 내 안으로 들어와 버렸으니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차이는 선택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이다. 저울에 달아보자. 선이 좋냐 악이 좋냐? 정의가 좋냐 불의가 좋냐? 천국이 좋냐 지옥이 좋냐? 선택가능한 것은 모두 똥이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 회피할 수 있다. 선택할 수 없는 것은 탄생과 죽음이다. 이건 어쩔 도리가 없다. 탄생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음이라 해도 얼마간은 선택할 수 있다. 건강검진 받아보자. 식욕이나 성욕이라면 선택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래도 식욕이라면 메뉴 정도는 선택이 가능하다. 성욕이라면 파트너를 선택할 수 있다. 타이밍과 장소도 선택할 수 있다. 적절히 운동을 해서 기대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 선택할 수 없는 것에 파워가 있다. 인간을 움직이는 근원의 힘은 인간의 선택권 밖에 있는 것이다. 피부색이나 성별은 인간의 선택권 바깥에 있다. 그래서 예민한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네 잘못이야. 불평하지 말고 노력해서 서울대 붙으면 되잖아.’ 하고 설득할 수 있지만 피부색은 건드리면 안 되는 거다. 그건 노력해도 안 되기 때문이다. 인간을 지배하는 모든 논리의 최종근거는 일 자체의 전개하는 논리다. 관성력이 작동하는 구조 안에서 선택할 수 없으므로 막강하다. 타고난 신분도 선택을 할 수는 없다. 인간은 노력하여 왕이 되는 것보다 원래부터 왕자로 태어나는 것을 좋아한다. 왕자 신분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징기스칸은 자신이 선택해서 왕이 된 것이다. 별거 아니다. 조금만 더 악랄하면 왕이 될 수 있다. 한 명을 죽이면 강도가 되고 100만 명을 죽이면 황제가 된다. 나폴레옹 이야기다. 욕 먹는다. 그러나 왕자신분은 참으로 근사한 것이다. 진짜는 무엇인가? 인간의 모든 논리 위에 군림하는 최후의 논리는 거기서 탈출할 수 없음 그 자체이다. 날아가는 화살을 멈출 수는 없다. 자신이 날아가는 화살에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때 인생이 바뀐다. 삶이 바뀐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필자가 한때 사회를 떠난 것도 그 때문이고 다시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다. 달리는 호랑이 등에 타고 있었던 거다. 난폭한 호랑이 등에서 내리고 싶어 사회를 떠났다. 내릴 수 없음을 알고 사회로 돌아왔다. 그건 내게 주어진 선택지가 아니었다. 한 번 붙은 불은 자체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할 때까지 계속 가는 수밖에 없다. 중학생 때는 중이병이었던지 허무주의자였다. 삶도 허무하고 죽음도 허무하고 모든 것이 허무하다. 허무하다고 떠들고 다니는 것조차도 허무하기 짝이 없다. 의미있는 것은 무엇인가? 없다. 그렇다면 진짜는? 거기서 탈출할 수 없음 그 자체다. 라퐁텐의 우화다. 전갈이 개구리 등을 타고 강을 건넌다. 강을 건너는 도중에 전갈이 독침으로 개구리를 찌르면 개구리도 죽고 전갈도 죽는다. 그 사실을 아는 개구리가 전갈을 믿고 등에 태웠더니 결국 전갈은 개구리를 찔렀다. 개구리가 물었다. ‘왜지? 너도 죽잖아.’ 전갈이 말했다. ‘그러니까 전갈이지.’ 그것은 애초에 전갈의 선택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있다. 어떤 얼간이가 썼는데 서로 모순 되는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를 묻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멍청하긴! 선택하면 안 되는 거다. A를 선택하면 관련자 두 명이 죽고 B를 선택하면 제 3자 한 명이 죽는다. 그 상황에서 당신에게 권력이 있다면 누구를 살릴 것인가? 선택하면 안 된다. 사전에 매뉴얼로 정해놔야 한다. 그런 판단은 시스템에 맡겨야 한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다. 당신은 지휘관이다. 부하 중에 한 명은 목숨을 던져 적의 토치카를 공격해야 한다. 누구를 지목할 것인가? 지목된 병사의 생존확률은 0이다. 그 상황에서 지휘관의 선택은 어떤 것이어야 하고 재수없게 지목된 부하의 선택은 어떤 것이어야만 하는가? 핵잠수함의 미친 함장이 핵버튼을 누르려고 할 때 부관인 당신의 선택은? 멍청한 짓이다. 전투의 발발과 동시에 소집된 병사는 모두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 지휘관은 적의 총알이 떨어지는 범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징발할 수 있다. 적의 대포알에 맞아 재물이 파괴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미리 정해놓는다는 말이다. 왜 하필 나의 집을 징발하느냐고 따지지를 말라. 그런 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대책을 세웠어야 한다. 그렇다. 마이클 샌델 바보는 공간의 조건을 논했을 뿐 시간의 조건을 논하지 않았다. 얼빠진 수작이 아닌가? 진정한 세계가 있다. 진짜가 있다. 그것은 공간에서 선택되는 세계가 아니라 시간에서 진행되는 세계다. 현재진행 세계다. 가속도가 걸린 상황이다. 각운동량이 잠복한 상황이다. 부분이 전체를 대표한다. 돌아가는 팽이와 지면이 닿는 접점이 있다. 우주의 무게 전부가 한 점에 걸려있다. 김정은과 회담을 앞둔 문재인이 느끼는 무게감이다. 진정한 세계가 있다. 거기에 선악도 없고 정의도 없고 불의도 없고 도덕도 없고 윤리도 없다. 행복도 없고 불행도 없고 구원도 없고 비참도 없고 천국도 없고 내세도 없다. 우리가 이미 사건 속에 들어와 있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엔트로피에 따른 사건의 방향성이며 그 안에서 일의 일관성과 연속성이다. 일관성은 하나의 결정이 다음번 결정에 미치는 영향이다. 연속성은 앞단계가 뒷단계를 지배하는 힘이다. 당신은 거기서 탈출할 수 없다. 인정해야 한다. 당신은 기관차의 운전을 맡았다. KTX의 속도는 시속 300킬로다. 어마어마한 관성이 걸려 있다. 탈출할 수 없다. 받아들여야 한다. 식욕도 거부하고 성욕도 극복하고 죽음마저도 불사하지만 그 시속 300킬로 고속열차의 무지막지한 관성은 당신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 논리는 참으로 힘이 있다. 막강하다. 의외로 인간이 여기서 무너진다. 그래서? 인간은 대부분 그냥 하던 짓을 계속 한다. 문재인과 김정은이 탈핵회담을 해도 유승민은 하던 짓을 계속한다. 안철수는 여전히 MB아바탑니꽈다. 그 엄중한 관성의 법칙에서 이탈하지 못한다. 도박꾼은 도박을 계속하고 애연가는 담배를 계속 피우고 홍준표는 똘끼를 계속 부린다. 멈추지 못하는 것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뭔가 대단한 일을 벌일 것 같지만 천만에. 인간은 그냥 하던 일을 계속한다. 죽음을 앞둔 말기 암환자에게 한 가지 남길 말이 없느냐고 물으면 무슨 말을 할까? 대부분 옆집 순돌이 집에 빌린 돈 5천 원을 안갚았는데 그것 좀 대신 갚아주라. 이런 말을 한다. 거기에 거창한 복수도 없고 대단한 한풀이도 없다. 죽기 전에 마지막 소원 같은 것은 없다. 그게 인간이다. 당신이라면 안 그럴 것 같지? 천만에. 당신도 똑같다. 그냥 하던 짓을 계속한다. 이왕 죽을 목숨이라면 명박이 목이라도 따고 죽자 하는 거창한 프로젝트는 없다. 반면 인간이 진짜 무너지는 때는 인생의 어떤 일관성을 틀어버리는 사태다. 의외로 인간이 이 부분에서 약하다. 하던 짓을 계속하는게 인간이지만 또 하던 짓을 못하게 하면 화를 낸다. 그럴 때는 말기암 환자가 벌떡 일어날 정도로 흥분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박근혜에게 한 표 찍어주고 죽는다. 관성에 지배되는 것이다. 이는 뇌의 에너지 효율에 대한 전략 때문이다. 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든 일관되게 한 길을 가야 뇌의 에너지 낭비가 없다. 그래서 한 번 도둑질을 한 사람은 감옥에 갈 때까지 도둑질을 한다. 일의 연속성도 중요하다. 역시 에너지 효율이다. 어떤 일을 하든 큰 것을 먼저 하고 작은 것을 나중 해야 에너지 낭비가 없다. 기승전결에서 기는 크고 결은 작으니 기승전결 순서대로 진행해야 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선과 악은 빠져나갈 수 있다. 정의든 불의든 모른 척하면 된다. 행복이든 사랑이든 자유든 무시하면 된다. 그것은 그냥 언어일 뿐이다. 구실은 잡으면 되고 핑계는 얼마든지 있다. 빠져나갈 수 있다. 회피할 수 있다. 원시 부족민이라 치자. 배고프면 먹고 배부르면 자는데 거기에 무슨 행복이 있고 사랑이 있고 자유가 있겠는가? 그냥 허허로운 삶이 펼쳐질 뿐인 것이다. 사실이지 행복이든 자유든 사랑이든 이미 지켜보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로 말하면 그것은 타인의 가치가 당신에게 투사된 것이지 사실은 나와 상관없다. 그냥 사는 건데 남이 쳐다보니 나 행복해야 해 그러고, 그냥 사는데 남이 쳐다보니 나는 자유를 원해 그러고, 그냥 사는데 남이 쳐다보니 난 사랑해 그러더라. 남의 시선들은 신경 안 쓰면 된다. 불행해도 행복으로 여기면 된다. 자연인들이 그렇게 산다. 다들 행복하다고 우긴다. 사랑하지 않아도 경상도 사람은 이게 사랑이야 하면 된다. 자유가 없어도 나는 회사체질인가봐. 나는 회사에서 일할 때가 가장 자유롭다네 하면 된다. 행복이든 사랑이든 자유든 남들의 참견 때문에 신경 쓰이는 거다. 히키코모리 처럼 짱박혀서 방에서 안 기어나오면 된다. 쉽잖아. 내가 도박장에서 돈을 잃든 말든 어쩌라고? 당신네가 참견할 문제가 아냐. 돈을 잃어도 내가 잃고 돈을 따도 내가 딴다고. 참견은 사절이야. 다만 치명적인 것은 도박을 하다가 중간에 일어설 수는 없다는 점이다. ‘따고 배짱이냐?’ 주먹 날아온다. 도박장에 앉았으면 판돈을 쓸어가거나 오링되거나 둘 중에 하나다. 시합이 시작되었다면 끝날 때까지 선수로 뛰어야 한다. 멈출 수 없다. 이것이 일 자체의 치고나가는 논리다. 무엇인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도중에 나 여기서 내릴래 하고 떼를 쓸 수 없다. 안철수 할애비라도 비행기를 탔으면 공항까지 가야 한다. 인간은 삶이라는 비행기를 탔다. 이러한 어쩔 수 없음의 논리야말로 당신의 삶을 지배하는 궁극적인 근거가 된다. 그래서? 이겨야 한다. 눈앞의 상대방을 이긴다는게 아니다. 주어진 상황을 이겨야 한다. 에너지 공급자가 되어야 한다. 도박판의 설계자가 되고 경마장의 주최측이 되어야 한다. 축구선수는 한 게임을 이겨도 다음 시합이 부담되지만 피파는 언제나 봄날이다. 최후의 막강한 논리는 중도에 그만둘 수 없음의 논리다. 화장실에서 응가를 보다가 이미 나온 왕건이를 도로 밀어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엔트로피 비가역성이다. 공간의 선택을 바꿀 수는 있지만 시간의 진행을 되돌릴 수는 없다. 행복이든 사랑이든 자유든 평등이든 도덕이든 공간의 선택이니 대체재가 있다. 안면몰수하고 카드를 바꾸면 된다. 조금만 뻔뻔하면 인생이 즐겁다. 그러나 시간의 진행은 바꿀 수 없다. 엎어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다. 거기서 당신은 패배한다. 이기려면 주최측이 되어 탑포지션을 차지해야 한다. 인생게임의 첫 번째 규칙은 피아구분이다. 모든 철학사상의 근본 사유는 피아구분의문제다. 누가 내 편인가다. 아이들은 도둑과 경찰 이야기를 좋아한다. 딴전을 피우다가도 도둑과 경찰 이야기만 나오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집중한다. 경찰은 내 편이고 도둑은 나쁜 편이다. 아이들에게는 이게 중요한 문제다. 피아구분을 통해 자신이 사건 속의 존재임을 알아챈다. 자신이 사회의 진보라는 비행기에 타고 있음을 알아채기다. 비행기에서 태어난 아이는 자신이 비행기에서 태어난 사실을 모른다. 누가 말해줘야 한다. 이 진보의 비행기에서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공항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누가 내 편인가? 당신은 어떤 비행기를 타고 있나? 당신은 어쩌다가 재수 없게 이 비행기를 타버렸다. 그 비행기는 하필 헬조선 비행기였다. 이 우주, 이 지구, 이 한국, 이 집단, 이 가족이 당신이 타버린 비행기 주소다. 되물릴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나의 가족은, 나의 친구는, 나의 직장은, 나의 국가는, 나의 세상은 내 편이 맞는가? 아니다. 그것은 잠정적인 것이다. 조건이 붙어 있다. 숨은 전제를 찾아내야 한다. 엄마는 언제나 내 편이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갑자기 냉정해진다. 선이 그어져 있다. 언제나 내 편이던 부모가 갑자기 냉정하게 등을 돌리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권력이다. 자식이 부모의 권력을 존중할 때 부모는 내 편이 된다. 특허권, 저작권, 선점권, 소유권과 같은 보이지 않는 권력들이 집단의 숨은 전제다. 시골의 텃세도 그 권력 중의 하나다. 전통이나 관습 등의 형태로 그것은 존재한다. 그래서? 내가 나서서 선제적으로 그 권을 벌어와야 한다. 자기 권이 없으면서 남의 권에 이의를 제기하며 뒷북을 치거나 떼를 쓴다면 곤란하다. 보통은 남의 행동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권을 찾지만 허당이다. 내가 가만 있는데 누가 나를 때렸다. 복수하겠다. 주로 이 수법으로 권을 조달하려 한다. 가만있는데 노무현이 나를 때렸어. 북한이 먼저 남침했어. 복수할거야. 보수꼴통의 수법이다. 그러나 가짜다. 거기에는 권이 없다. 나의 작품, 나의 창의, 나의 아이디어, 내 소유, 나의 투자한 지분이 있어야 나의 사회적 발언권이 있다. 그 권력의 작동이야말로 인간이 중간에 내릴 수 없는 KTX 열차라 하겠다. 왜 촛불인가?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비행기에서 내릴 수 없다. 이미 민주주의는 공항을 이륙해 버렸다. 박근혜는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창문 열고 쇼핑을 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미 발진했으므로 되물릴 수 없다. 그렇다. 행복이건 사랑이건 평등이건 선택되는 것은 내가 안 하면 그만이지만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난 미국 안가 하고 투정부릴 수 없다. 안철수가 떼를 써도 안 되는건 안 되는 거다. 그 비가역성을 다른 말로 권력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비가역을 거역하면 반역이고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며 그러다가 촛불을 맞는다. 아기는 엄마를 믿는다. 순진하게 말이다. 엄마가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아기를 구워먹는다든가 하는 일은 없다.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기르던 돼지를 구워먹는 일은 있지만 말이다. 왜? 사랑하기 때문에? 아니다. 사랑이니 정의니 도덕이니 선악이니 그런 개소리는 집어치워라. 초딩이냐? 여기서는 진지한 이야기를 한다. 사실은 아기에게도 권력의 지분이 있었다. 이미 투자해놓고 있다. 당신은 모르고 있지만 당신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우주에, 지구에, 한국에, 당신의 가정에 투자해놓고 있으며 지분을 소유하고 있으며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인권이 있다. 그것은 조부모로부터 부모를 거쳐 자녀로 이어지는 관성의 법칙이다. 내가 탄생하지 않을 상황이라면 내 부모의 결합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아기가 비행기를 발진시켰다. 가족들은 아기가 이륙시킨 비행기에서 내릴 수 없다. 자녀가 태어난다는 전제로 부모가 맺어졌기 때문에 이미 자녀에게 지분이 있다. 그러한 숨은 전제, 숨은 약속, 숨은 권리를 우리는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이 우주를 방문하기 전에 나는 이미 투자해놓고 있는 것이다. 비행기에 태워져 있었던 것이다. 깨달아 내 몫의 마일리지를 챙겨가지 않으면 바보다. 우리가 막연히 주워섬기는 언어들 있다. 식욕, 성욕, 불로장수, 성공, 출세, 명성 따위다. 그 언어들은 대개 주변의 감시와 압박에 따른 무의식의 표현이다. 식욕이나 성욕도 주변의 욕망이 투사된 것이다. 그것들은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들이다. 내 밖에 그것은 진열되어 있고 내가 그것을 선택하거나 말거나다. 나의 선택에 남들이 뭐라고 하겠지만 그들의 언어다. 내 안에 깊숙이 들어와서 나와 긴밀하게 엮여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진짜는 하나뿐이다. 그것은 나의 지분이요, 권리요, 소유요, 힘이요, 에너지다. 내가 존재함으로써 달성되는 에너지 효율성이다. 내가 이 우주에 발을 디디고 있음으로 해서 이 우주가 조금 효율적으로 세팅된 것이며 그만큼 내게 발언권이 있다. 그것은 일의 기승전결로 가는 계속성이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에게로 내게로 이어져 왔고 내 자식들에게로 이어져가는 계속성이다. 나는 그 몫을 찾아 먹어야 한다. 숨은 지분을 찾아먹을 때 내게 힘이 주어지는 것이며 그 힘으로 나는 게임에 이길 수 있는 것이며 그 힘은 진보에만 있고 보수에는 없다. 진보는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하고 보수는 두 손에 쥔 떡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려고 한다. 그 떡을 둘 다 버려도 상관없다. 둘 다 선택해도 무방하다. 선택하거나 말거나 의미없다. 선택되는 작용반작용의 논리는 상대성이 지배하므로 상대적이다. 그것은 허무한 거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탈출할 수 없음의 논리는 강력하다. 엔트로피의 비가역성이야말로 강력하다. 관성의 법칙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길을 가는 이유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조론이라는 비행기가 이륙해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나의 소관을 떠났다. 계속 가는 거다. 구조론이 스스로의 관성으로 항해한다. 진보는 자동차가 가듯이 관성을 유발시키므로 지분이 주어지지만 보수는 자동차를 멈추게 하므로 지분을 상실한다. 하던 일을 계속하는게 멈추는 것보다 효율적이라는게 모든 논리의 최종근거이며 선악이나 도덕이나 정의나 평등이니 하는 것들도 인류가 하던 일이다. 인간의 하던 일이 옳다는 전제 하에 만들어진 관념이다. 예전부터 벌여놓은 일이기 때문에 굳이 그것을 멈추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아니다. 박정희가 하던 일은 옛날에 하던 일이요 오래 전에 끝났다. 그거 계속하면 망한다. 많은 경우 시효가 지난 일이고 유통기한이 지난 일이며 끝난 일이다. 인간이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진짜 하던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 하나 내 편을 찾는 것이다. 숨은 전제를 찾는 것이다. 내 편이 있고, 그 내 편의 내 편이 있고, 그 내 편의 내 편의 내 편이 있으니 계속 추구해 들어가면 최종적으로 만나는 것은 신이다. 그것을 추구해 들어가는 과정에 당신은 무수히 많은 상속재산을 만난다. 아버지와 조부와 증조부와 고조부까지 유산을 남겼다. 친함이 있다. 계속성이 있다. 연결되어 있다. 벌여놓은 가문의 사업이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류의 사업권을 상속받을 일이다. 왜 우리가 신분에 집착하고 피부색에 집착하고 성별에 집착하고 동성애자만 보면 눈에 쌍심지를 켜는가? 그 친함을 찾으려는 것이다. 감추어진 자기 상속지분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권력은 아버지나 증조부가 아니라 모든 일의 시초인 신에게서 상속된다. 자연과 진리와 역사와 문명과 진보에 신의 상속이 있다. 당신은 그것을 알뜰하게 챙겨 먹어야 한다. 그래서 얻는 것은 발언권이다. 그때 가서 당신은 비로소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럴 때 당신은 비로소 선과 악 사이에서, 정의와 불의 사이에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다.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사랑과 증오 사이에서, 자유와 억압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다. 그전에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 태어날 때부터 인권이 있다고? 말이 그러할 뿐 개미에게 없는 권력이 그대에게 있을 리 없다. 당신에게는 당연히 인권이 없다. 깨달아야만 주어진다. 상속을 선언해야만 그것이 있다. 당신은 과연 그것을 상속했는가? 그것은 내편에게만 상속된다. 당신이 부모를 거역하면 상속지분은 사라진다. 자식이 부모와 한 편이 아닌데 부모재산이 상속될 리 없다. 인류의 편에 선 진보에게만 상속지분이 있다. 당신이 진보를 거역하면 당연히 그것은 상속되지 않는다. 진보는 1만 년 전부터 진행해온 인류의 큰 사업이다. 대형 프로젝트다. 인류의 가업을 승계해야 인권이라는 권력이 상속된다. 개나 고양이에게는 상속되지 않는다. 개나 고양이는 인류편에 가담하지 않고 진보편에 가담하지 않고 그 비행기에 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간 사람 몫은 있어도 자는 사람 몫은 없다. 피아구분 들어가준다. 당신은 과연 게임에 가담했는가? 진보에 가담했는가? 신의 사업에 가담했는가? 인류의 편에 들었는가? 관성의 법칙 속으로 들어와 있는가? 관성력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는가? 당신은 저울로 계량하여 선택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주식을 사야 권리가 있다. 팀에 들어와야 권리가 있다. 사건에 들어와야 권리가 있다. 적이라면 권리가 없다. 신의 사업을 승계하는 자에게만 권리가 있다. 한 번 권리를 찾아먹게 되면 방아쇠는 격발하고 마는 것이니 탈출할 수 없다. 완전히 엮여버린 것이다. 공간에서는 빠져나갈 방법이 있겠지만 시간의 계속성에 갇혔으니 빠져나갈 수 없다. 필자는 하던 구조론을 계속한다. 행복도 사랑도 평등도 도덕도 자유도 우습지만 이 탈출불가의 논리 하나만은 존중해줘야 한다.
왜 사는가? 기어이 일은 벌어졌고 긴밀하게 엮여버렸고 탈출구는 없다. 이전 단계가 있고 다음 단계가 있으니 중간에서 나는 연결한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임무다. 나의 일이라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신의 일이라서 어쩔 수 없다. 남의 일이라면 모른척 하겠는데 신은 남이 아니라서 어쩔 수 없다. 뇌가 벌인 일을 손발이 막지 못한다. 끝날 때까지는 일단 가보는 것이다. |
신과의 족보와 친함을 알면 속도가 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