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철학 이름에 어폐가 있지만 익숙지기를 기대한다. 검색해보니 ‘사건의 철학’이라는 말을 쓴 구조주의 철학자가 있나 보다. 같은 구조를 다루다보니 용어가 비슷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다르다. 구조론에서 말하는 사건은 일과성의 이벤트를 의미하는게 아니다. 찰나의 순간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구조론의 사건은 원인에서 결과까지 기승전결의 전개과정을 거치며 계속 진행해 가는 것이다. 에너지의 흐름을 꺼트리지 않는다. 사건철학은 세상을 물질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연결로 본다. 물질은 취사선택하면 된다. 좋은 것을 얻고 나쁜 것을 버리면 된다. 그러나 세상이 그리 만만치는 않다. 우리는 경험해서 안다. 착한 사람만 모아놓으면 정치가 잘 될까? 아니더라. 트럼프나 이명박 같은 나쁜 인간은 왜 무대에 등장하는 것일까? 이유가 있다. 그들은 불을 지를 줄 안다. 사건은 계속 연결시켜 가야 한다. 불씨를 살려가야 한다. 나쁜 사람이 뜨기 전에 좋은 사람이 먼저 불을 질렀어야 했다. 우리는 채집경제에 종사하는 부족민처럼 성공을 채집하고 행복을 채집하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그것은 환경에 대해 약자의 포지션에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포지셔닝이 잘못되었다. 세상과의 관계맺기가 잘못되었다. 배역을 잘못 맡았다. 거꾸로 환경을 지배해야 한다. 강자의 포지션에 서야 한다. 그러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연과 우주로 이루어진 환경이라는 무대가 원래부터 갖추어져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얼떨결에 그 무대에 초청된 것이다. 아니다. 무대는 없으며 이제부터 우리가 무대를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대기업에 취직하려는 취준생이 아니다. 우리는 창업동지다. 우리가 회사를 일으켜야 한다. 우리가 우주를 일으켜야 한다. 우리가 자연을 건설해야 한다. 지금까지 인류의 철학이란 대부분 약자의 철학이었다. 무대를 미리 정해놓고 그 무대에 어떻게 적응할지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회사는 있는데 어떻게 스펙을 쌓아서 그 회사에 취직할까? 목적은 정해져 있는데 어떻게 노력하여 성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것인가? 틀렸다. 회사는 없고 이제부터 우리가 창업해야 한다. 그러므로 행복도 없고 성공도 없다. 목표는 우리가 이제부터 정해야 한다. 세상 앞에서 그대가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주눅들어 있는 취준생의 포지션에 서 있다면 곤란하다. 구조론은 세상을 사건의 통제가능성과 의사결정구조로 본다. 사건을 조직하려면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에너지를 조직하게 하는 것은 시스템이다. 구조가 고도화된 것이 시스템이다. 구조를 넘어 그리고 시스템을 넘어 사건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근원의 대결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건이 먼저다. 사건은 대결이기 때문이다. 무대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시스템이므로 이에 맞선 인간도 시스템이어야 한다. 문명이라는 시스템, 진보라는 시스템으로 대결해야 한다. 시스템과 시스템의 충돌이 사건이다. 사건을 일으켜 놓으면 다음은 시스템 자체의 관성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다. 우리 사건을 철학해야 한다. 환경과의 대결이어야 한다. 게임에서 이겨보여야 한다. 에너지로 이긴다. 사건이 진행하는 각 단계의 의사결정구조에서 에너지의 통제가능성에 답이 있다. 시스템은 의사결정구조의 연결이다. 포지셔닝에서의 우위를 통해 게임을 지배하는 방법으로 사건을 통제할 수 있다. ◎ 자연의 존재는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연결이다. ◎ 사건은 원인에서 결과까지 기승전결로 진행하며 5단계에 걸쳐 의사 결정구조를 가지고 매개변수를 드러낸다. ◎ 사건철학은 개인적 행복의 추구나 혹은 사회적 성공의 지향이 아니라 사건을 일으키는 주체가 되자는 것이다. ◎ 사건은 일의 성과보다 진행의 과정에서 장악, 제어, 운영, 통제, 조율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유도되는 권력이 진짜다. 성과는 남에게 보여주고 증명하려는 것이며 사건을 지배하는 권력이 인간의 무의식이 추구하는 진짜다. 돈이나 자격증은 남에게 증명하는 수단이며 그 돈과 자격증이 담보하는 권력이 인간이 추구하는 진짜다. ◎ 하나의 사건 안에서 의사결정은 5회에 걸쳐 일어나며 앞단계가 뒷단계를 지배한다. 사건의 앞단계에 위치하려는 것이 인간의 진짜 목적이다. 요리하는 사람이 먹는 사람보다 앞선다. 요리하려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게 인간의 권력의지다. ◎ 인생의 성공은 개인의 행복감을 통한 심리적 보상이나 사회적인 성공을 통한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 일대사건을 일으켜 사건의 다음 단계로 연결시켜 가느냐에 있다. 부모의 사건은 자식에게로 연결되고 스승의 사건은 제자에게로 연결되고 노무현의 사건은 문재인에게로 승계된다. 그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의미다. 허무는 그 의미가 끊어지는 것이다. 사건이 연결되지 않고 단절될 때 인간은 깊은 좌절을 맛보게 된다. 연결가능성이 높은 것은 가치다. 인간은 가치를 추구하고 의미를 달성한다. ◎ 사건의 관점에서는 집단 안에서의 경쟁을 통한 성공이 아니라 공간적 기회를 포착하고 시간적 타이밍을 조절하여 에너지를 끌어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성공은 일의 다음 단계에 얻어진다. 사건을 다음 단계로 연결시켜 가는 것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의미는 충분히 달성된다. ◎ 사건의 철학으로 보면 얼추 비슷한 99개보다 제대로 된 하나가 중요하다. 연결은 한 개의 라인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100대의 정찰기를 띄워 단 한 대만 적군 함대의 위치를 발견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 사건은 이겨서 얻어내기보다 집요하게 맞대응하면서 밸런스를 이루고 그 밸런스의 축을 장악하여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방을 이겨버리는게 아니라 상대방을 달고가면서 게임을 주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보가 보수를 패배시켜 보수를 축출하고 제거할 것이 아니라 보수를 꼬셔서 달고가며 진보의 주도권을 유지해야 한다. 이렇게 상대방을 달고가는 것이 게임의 법칙이며 시합에서의 승리보다 게임체인지를 통해 더 큰 게임판으로 끌고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겨서 돈을 따는 것보다 팽팽한 긴장을 유지해서 판돈을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방이 올인을 할 때까지 계속 판을 키워야 한다. ◎ 사건은 상대성이 아닌 절대성을 추구한다. 선악의 논리나 옳고그름의 논리나 정의와 도덕의 논리는 상대성의 논리다. 에너지의 논리와 완전성의 논리는 절대성의 논리다. 일대일 게임은 상대성의 논리에 지배되나 시스템 게임은 절대성의 논리에 지배된다. 상대를 이기는 것은 상대성이고 스스로 시스템을 완성하는 것은 절대성이다. 상대를 이기면 상대가 그 기술을 배워 재도전을 해오지만 완벽한 시스템을 만들면 무적이 된다. 적은 그 시스템을 배우기 위해 항복해온다. 절대성을 추구하는 오자병법이 진짜다. 상대성을 추구하는 손자병법은 가짜다. ◎ 노력은 상대성이고 팀플레이는 절대성이다. 의리로 맺어진 좋은 팀을 만드는게 인간의 진짜 목적이다. 이기는 팀에 들어야 한다. ◎ 운명적인 만남을 추구하고 이기는 편에 드는 것이 절대성이며 완전성이다. 이를 위해서는 확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진하며 천하의 에너지 흐름에 편승해야 한다. 남들 가는 데로 가야 만날 확률이 높다. 첨단에 있어야 운명적인 만남의 확률이 높다. 말단에 있으면 쓰레기를 만나게 된다. 당신이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시대의 첨단이 아닌 말단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실패는 당신이 잘못 만난 어떤 사람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말단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포지셔닝에서 이겨보여야 한다. 첨단에 서야 이긴다. ◎ 선악이나 옳고 그름은 선택되지만 다음 단계의 계획은 계속 진행된다. 져주고 이기는게 다음 단계의 계획이다. 어떤 사람이 옳으냐 혹은 착하냐보다 그 사람이 다음 단계의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로 평가해야한다. 지금 나빠도 다음 계획이 있으면 좋은 것이다. 장기전을 추구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올바른 방향을 정하고 확률을 계속 올려가면 언젠가는 정상에서 모두 만나게 된다. ◎ 에너지의 방향은 확산이냐 수렴이냐다. 방향을 따라가면 흥한다. 이때 일관성이 중요하다. 변덕을 부리면 방향을 상실하고 호흡이 맞지 않고 동료와 틀어지고 환경과 불화하여 결국 파멸하게 된다. 모든 일이 어긋나게 된다. 재수가 없게 된다. 반대로 동료와 호흡이 맞고 환경과 조화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주변환경과 어우러지는 방향을 선택해야 하며 그 방향은 에너지가 공급되는 방향이고 역사의 진보 방향이다. ◎ 갈림길에서 선택하지 말고 환경을 자기편으로 만들어서 맞대응하라. 인간은 갈림길에서 선택하려 하지만 하나를 선택할 때 하나를 상실한다. 확률은 감소한다. 결혼파트너를 한 명을 선택하면 평균 친구 두 명과 멀어진다. 진보가 보수를 이겨버리기 보다 맞대응하며 긴장된 접점을 유지하는게 중요하다. 적은 가까이에 두고 긴밀하게 상호작용해야 한다. ◎ 올바른 지식과 판단이나 노력보다 밀어붙이는 추진력과 뚝심, 결단력, 동료와의 호흡, 환경과의 긴밀함, 천하와의 방향성이 중요하다. 시행착오를 통해 오류시정하며 체력을 길러 계속 전진하기 때문이다. ◎ 정상에서 전모를 보고 완전성에 도달하여 완전한 하나를 무한복제한 다음 널리 전파하는 것이 포지셔닝의 정답이다. ◎ 이상주의는 언제라도 유효하다. 그 이상에 도달하지 않으므로 더욱 유효하다. 이상주의는 등불과 같아서 방향을 제시하고 길을 안내한다. 이상주의는 이상주의자를 끌어모으기 때문이다. 진정한 이상주의 완성은 이상주의자와의 운명적 만남에 있다. 좋은 세상은 이래야 한다거나 좋은 정치는 이래야 한다거나 좋은 작품은 이래야 한다거나 하며 이상주의를 진열하는 것은 이상주의자를 만날 확률을 높여가는 방법이다. ◎ 운명적 만남을 위해 팀에 헌신하는 의리가 필요하다. 의리는 복제되며 의리가 룰이 될 때 만날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하나의 천하를 만나는 것이며 환경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 문제의 답을 찾기보다 시행착오를 하면서 오류시정을 통해 계속 진화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답은 일회용이지만 진화는 환경을 바꾸기 때문이다. 환경과의 밀당을 계속해야 한다. 환경과의 접점을 늘려가야 한다. ◎ 정적환경보다 동적환경을 찾고 역동적인 사건 안에서 동적균형을 따라야 에너지를 유도할 수 있다. ◎ 천하에 큰 사건을 일으켜 에너지를 조달한 사람이 진짜다. 에너지는 자체의 방향성을 갖고 있으므로 일으켜두면 스스로 진화해 간다. 노무현은 지역주의 덫에 갇혀 있던 비엘리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여 민중의 원초적인 에너지를 끌어낸 인물이다. 그것은 유교적 질서에 억압된 대중의 신분상승 욕구다. 노무현이 끌어낸 에너지가 문재인의 운전솜씨에 의해 스스로 진화해 간다. ◎ 노무현은 지역구도로 분열되고 엘리트와 비엘리트로 분열된 대한민국에 엘리트와 비엘리트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일대사건을 일으켰다. 노무현의 성공에 고무되어 흥분한 비엘리트의 배반과 폭주로 일시 분열되었으나 문재인이 승계하자 다시 봉합되었다. 돈이냐 의리냐에서 비엘리트가 돈을 선택하지 않고 의리를 선택하여 엘리트로 심리적인 신분상승을 하려고 한 것이다. 비엘리트는 조금만 방심하면 그 신분상승이 노무현이 제안한 천하의 질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목표가 쉬웠는데 자신이 몰랐을 뿐이라고 착각한다. 그 정도는 이명박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목표가 쉬운게 아니라 사실은 노무현의 제안한 신질서가 가치있는 것이었다. ◎ 세상은 엔트로피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렴된다. 사건 안에서 확산과 수렴을 반복하며 정반합으로 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지속적으로 수렴된다.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 수렴되나 환경과의 관계는 확산과 수렴을 반복한다. 세상은 진보와 보수가 확산과 수렴으로 교대하지만 곧 정동과 반동이 교대하지만 에너지로 보면 언제나 수렴된다. 역사의 진정한 반동은 없다. 정동의 하부구조이며 배후지의 확대로 저변이 넓어지는 과정이 반동으로 연출될 뿐이다. ◎ 연역으로 보는 것이 사건의 관점이며 그것은 모두 한 줄에 꿰어 하나의 통짜 덩어리로 보는 관점이며 반대로 귀납은 개별적인 사물로 보므로 4차산업혁명을 논하면 드론이니 VR이니 3D프린터니 알파고니 무인운전이나 블록체인이니 로봇이니 하며 자꾸 무언가를 주워섬긴다. 플랫폼 하나로 한 줄에 꿰어 설명하는 것이 사건의 관점이다. 4차산업혁명은 간단히 전체과정을 하나로 집약하는 플랫폼의 등장이다. AI가 그 플랫폼을 완성한다. ◎ 사건을 장악, 제어, 조율, 운영, 통제하려면 권력을 가져야 한다. 광장권력, 정치권력, 경제권력, 문화권력, 도덕권력의 다섯 가지 권력을 단계적으로 조직하는게 중요하다. 자연의 권리에서 사회적 권력을 유도하기다. 사건의 중심점을 지배하면서 정동과 반동을 하나의 추진력으로 수렴하여 차차로 진화시켜 가는 것이다. 공자의 인지의신예로 가능하다. ◎ 사건으로 보면 뱀의 머리와 꼬리는 한몸이다. 공자와 노자는 하나다. 공자는 정동이고 노자는 반동이며 공자는 사상이고 노자는 안티다. 공자는 모더니즘이고 노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모더니즘은 스스로 존재할 수 있어도 포스트 모더니즘은 조롱하고 야유하고 풍자할 뿐 스스로 건축, 음악, 미술, 문학을 작성하지 못한다. 있다 해도 아류다. 이상의 시는 모더니즘 성격과 포스트모더니즘 성격을 동시에 갖지만 큰 틀에서는 모더니즘이다. 사건으로 보면 둘은 하나의 사건으로 작용과 반작용의 연속선상에 있다. 관성의 법칙이다. ◎ 공자의 철학은 강자의 철학이며 노자의 철학은 약자의 철학이다. 공자의 철학은 시스템의 건설이며 노자의 사상은 완성된 시스템의 운영에 대한 고민이다. 공자는 차를 만들고 노자는 운전기술을 익힌다. 공자는 절대적이고 노자는 상대적이다. 주류가 있는 곳에 언제라도 비주류가 있고 정론이 있는 곳에 반드시 안티가 있고 모더니즘이 있는 곳에 곧 포스트모더니즘 따라붙는다. 모더니즘만이 유일한 철학이며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모더니즘이 재구성될 뿐이며 모더니즘은 영원하다. 사건으로 보면 모더니즘이 불을 붙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불을 옮긴다. 둘은 하나다. 모더니즘이 뱀의 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뱀의 꼬리다. 꼬리는 안쳐준다. 사건을 지배하는 권력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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