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란 무엇인가? 어떤 A와 B를 연결하는 길은 무한대가 있지만 가장 빠른 길은 하나뿐이다. 그 하나를 찾는 것이 창의다. 당신이 전시회에 이상한 것을 가져다 놓는다고 해서 창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1917년 마르셀 뒤샹이 화장실 변기를 출품했을 때 그 하나는 이미 손을 타버린 것이다. 첫 번째 가는 것은 창의지만 두 번째 가는 것은 창의가 아니다. 창의는 천장을 뚫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지 밀가루 반죽을 주무르는 게 아니다. 보통은 이색적인 것이나 기괴한 것으로 어떻게 해보려고들 하지만 그것은 창의가 아니다. 남의 눈길을 끌려고 애쓰는 순간 실패다. 저절로 눈길이 가야 창의지 눈길을 끌어보겠다고 용 쓰는 것은 창의가 아니다. 그것은 애처로운 몸부림이다. 창의력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창의가 안 되고 있는 것은 큰 틀에서의 목표와 방향이 없고 에너지와 추진력이 없어서지 기발한 아이디어가 없어서는 아니다. 이상주의야말로 창의하는 자궁이라 할 것이다. 동양화가 허접한 이유는 이상주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림은 그저 보기에 좋으면 된다는 식이다. 동양의 그림은 산수화 아니면 화조도나 인물화 따위인데 그게 다 고객의 마음에 드는 그림이다. 관객에게 아부하는 그림들이다. 애초에 그림에 대한 철학이 다른 거다. 신에게 도달하려는 고귀한 이상이 없었다. 원래부터 동양은 인간중심적 사유였고 서양은 신중심의 사유였다. 인간중심적 사유라는 방향성에서 이미 어긋나버린 것이다. 고객의 마음에 들려고 하는 태도에서 이미 실패해 있는 것이다. 반면 서양예술은 인간을 제압하려는 야심이 앞서 있다. 웅장한 바로크식 교회 건축물은 신도들을 놀래켜서 꺼벅 죽게 만들겠다는 의도가 있다. 관람객의 경탄을 끌어내겠다는 의도가 있다. 거기에 에너지가 있다. 일단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엉뚱한 사람은 창의하지 못한다. 창의란 CEO가 마구잡이로 밀어붙여서 겨우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돌이를 갈아 넣어서 되는 것이다. 파라오의 야심과 체자레 보르지아의 후원과 피렌체의 넉넉한 부가 예술의 밑받침이 된다. 진시황이 무슨 대단한 창의력이 있어서 매우 사실적인 병마용을 만든 게 아니다. 춘추시대나 한나라 때 토용은 조잡하다. 신이 되고 싶었던 진시황의 야심에서 대단한 창의가 나온 것이다. 에디슨의 창의력도 마찬가지다. 수학문제 풀듯이 공식에 대입하여 풀어낸다. 천재는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에서 나온다는 에디슨의 말이 빈말이 아니다. 일전에 독일식 접근법과 소련식 접근법을 AK소총과 M16소총의 차이로 비유한 적이 있다. 미국의 총기에 대한 철학도 기술을 높이 치는 독일식이다. 그런데 에디슨의 방법은 소련식이다. 높은 기술수준보다 호환이 되는 범용성을 강조한다. 포드 자동차의 헨리 포드도 같다. 컨베이어 시스템은 수학적 접근이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당연한 것을 다들 엄두가 나지 않아서 주저하고 있는데 힘 좋은 포드가 끝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인정사정없이 밀어붙였다. 그런 식의 대량생산 개념은 중국 송나라 시절부터 있었다. 간이 큰 사람이 창의한다. 헛간에서 바늘을 잃어버렸다면 테슬라는 전문가답게 고도의 추리력을 동원하여 바늘의 위치를 가늠하고 자석을 동원하여 30분 만에 찾아낸다. 에디슨은 지푸라기를 하나하나 뒤져서 찾아낸다. 누가 돈을 버는가? 당연히 에디슨이 돈을 번다. 에디슨은 자동기계를 투입한다. 지푸라기를 초당 10만 개씩 헤집는 기계를 만들어온다. 3분 만에 5천만 개의 지푸라기를 뒤져서 바늘을 찾아낸다. 누가 이길까? 바늘찾기는 테슬라가 저비용 고효율로 이기지만, 자동차나 전쟁에 댄다면 무조건 에디슨의 승리다. 현대의 빅데이터나 AI도 방법은 마찬가지다. 고도의 추리 필요 없고 단순반복을 대량으로 해치운다. 인간은 몇 번 보고 고양이와 개를 구분하지만, AI는 1억 장의 사진을 보고 개와 고양이를 구분한다. 얼핏 생각하면 인간이 빠를 것 같지만, 인터넷에는 수억 장의 개사진과 고양이사진이 있기 때문에 AI는 금방 학습한다. 창의는 절대로 뚝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방향이 틀려버리면 헛일이다. 예술이 신의 완전성에 도전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인가? 여기서 어긋나면 답이 없다. 백날 해도 창의가 안 된다. 그건 원래 구조론적으로 안 되도록 세팅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의 뇌가 바라보는 방향이 귀납인가 연역인가에서 사유가 제한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의도와 야심이 없이는 예술이 안 된다. 뒤샹은 애초에 예술판을 엿먹이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렇게 깽판을 치고 예술은 망했다고 선언하고 미술계를 떠나서 프로 체스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추종자들에 의해 뒤샹을 뛰어넘어 예술은 전진했다. 방향이 그쪽으로 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식이다. 분명한 의도가 있어야 한다. 한국의 예술이 안 되는 것은 그럴듯한 야망이 없기 때문이다. 재벌가 사모님들이 예술을 후원하고 있는데 이분들 원래 야망이 없다. 이부진이나 홍라희나 이런 사람들에게 맡겨놓으면 예술은 망한다. 그나마 박정희 때 웅장한 공구리 건물이 제법 들어섰는데 그게 다 독재자 박정희의 야심 때문이었다. 야심이 없으므로 예술이 죽는 거다. 세상을 통째로 털어먹겠다는 야심이 없이는 명함도 내밀지 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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