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수와 점수 그리고 희망의 형식 네이트 오늘자 대문 기사.. 베플 만들어주면 명동 한 복판에서 삼겹살을 굽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 옆에서 노래부르겠다는 사람도, 또 그 옆에서 탬버린 치겠다는 분도 다 함께 약속 지켰다. http://news.nate.com/view/20091228n00845 어떤 교포분의 리플은.. 한국사람들이 이 불경기에 먹고 살기도 힘들텐데 그딴 쓸데없는 짓거리 왜하냐며 핀잔이다. 뻘짓할 시간에 공부나 열심히 하란다. 과연 네티즌의 쓸데없는 장난인가? 과연 예술은 쓸데없는 것인가? 명동 삼겹살 퍼포먼스는 먹고사는데 도움이 안 되는가? 그분들은 적어도 아이디어를 냈다. 그리고 그 기사를 보고 흐뭇해 한 모든 네티즌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 아이디어를 비웃으면서 어떻게 스티브 잡스 아저씨의 아이폰을 따라잡을 것인가? 허접한 옴니아 만드는 삼성이 세계시장을 가꿀 배포가 있다면 당장 그 세 사람에게 아이디어상으로 수억 줘야 한다. 그래야 이 나라에 S급인재가 탄생한다. 아이디어가 돈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창의적인 인재가 나타난다. 물론 삼성에게 진짜를 알아보는 눈이 있을 리 없으니 그런 쓸모있는 일은 결코 안 한다. 이 시대에 중요한건 안목이다. 스티브 잡스와 보통 사람의 차이를 알아채는 안목 말이다.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는 눈이다. 미국에서 이정도로 주목받았다면 TV토크쇼에 나와서 수억 벌었을 거다. 하긴 토크쇼 한번 나와보려고 자기 아들을 다락방에 숨겨놓고 아들이 기구타고 하늘로 날아가서 실종되었다고 사기친 자도 있다고 하니. ### 지난번 글, 돈오돈수 강조. 당연히 반발하는 분 있다. 점수주장 이해한다. 그러나 타협은 없다. 대화도 없다. 쳐다보지도 않고 쳐버린다. 그것이 돈수의 전략이다. 이건 명백히 의도있는 행동이다. 누가 이기고 지는지는 정해져 있다. 주먹질 하는 자는 쉽게 칼로 쳐버리고, 칼 쓰는 자는 쉽게 총으로 쳐버리고, 점수 쓰는 자는 쉽게 ‘셛업’ 한 마디로 쳐버린다. ‘닥쳐!’ 이 한 마디가 필요할 뿐. 깨달음은 소통, 소통은 돈오, 돈오면 돈수. 본질은 소통, 소통에서 시작하여 소통으로 끝난다. 진실로 말하면 깨달음은 오직 오(悟)로 끝나고 수(修)는 그 존재가 없다. 돈오가 있을 뿐 돈수도 불필요. 빛은 그 에너지 입자가 실재하여 있고, 그림자는 그 실체가 없이 남의 존재에 빌붙어 있음과 같다. 그림자는 빛 주변을 따라다니지만 빛과는 상관없이 별개로 빛과 만나는 사물에 의하여 있다. 감기는 겨울을 따라다니지만 겨울과는 상관없이 별도로 있다. 그건 다른거다. 겨울과 감기는 형제가 아니다. 그래서 남극에는 감기가 없다. 점수는 돈오를 따라다니지만 깨달음과 상관없이 있다. 소통 자체는 스위치가 켜지듯이, 남녀가 포옹하듯이 단박에 전광석화처럼 일어난다. 물론 삼년동안 씨루다가 겨우 포옹했을 수 있고, 포옹한 후로 3년동안 찌질댔을 수도 있지만 그건 딴 이야기. 깨달음의 본의는 어떻게 수억 혹은 수십억 인류로 하여금 단 한 방에 하나의 방향을 일제히 보게 만드는가다. 김연아 선수는 이번에 그것을 해냈고, 예수 아저씨나 석가 형님도 왕년에 그걸 해냈다. 수천년간 수백억, 수천억 인간이 단 하나의 지점을 바라보도록 했다. 해냈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진정한 희망이 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세종 할아버지의 창제하신 스물 네자를 빌어 쓰고 있다. 수천만, 수억 인구가 수천년, 수만년 동안 물려가며 쓸 것이다. 무수한 세월 무수한 눈동자들이 세종 할아버지가 기준 세운 하나의 지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에너지의 원천이 있다. 모두에서 말한 명동 삼겹살 퍼포먼스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그 분들은 아이디어로 여러 사람의 이목을 끄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네티즌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참여하게 한 것이다. 사람 마음 읽는게 어디 쉬운가 말이다. 사람을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기가 어디 쉬운가 말이다. 홍보비 수억 들여도 안 되는 일이다. 그게.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우리의 희망은 거기에 있다. 지름길이 있는데 둘러가는 자를 두고 참으로 미련한 자라고 한다. 점수주장 참으로 미련하다. 미련한 자는 계속 그렇게 미련하게 살도록 놔두고 아는 사람끼리 진도나가는 수 밖에 없다. ‘그거 해서 쌀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그 시간에 공부나 해라’는 식의의 핀잔 던지며 공부할 분은 계속 공부나 하게 놔두고 ‘아이디어 번뜩이는 네티즌’들은 뜻을 모아서 벤처 창업하는 것이 맞다. 그런 아이디어 속에서 스티브 잡스가 나온다. 돈오돈수에 인류의 희망이 있다. 실로 말하자면 오(悟) 안에 수(修)가 포함되어 있다. 구조론은 통짜덩어리 인식이다. 입체적 사고의 일원론이다. 선형적 사고, 이분법적 사고, 이원론은 일단 배척한다. 오(悟)와 수(修)를 구분하여 굳이 칸을 나누고 분별하며 차별하는 망상이 선형적 사고의 한계, 이분법적 사고의 병폐, 흑백논리의 실패다. 세상의 모든 차별과 편견과 아집과 죄악이 바로 거기서 생성하는 것이다. 구조론은 세상의 모든 2가 1 안으로 수렴되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룬다는 견해다. 물론 음양으로 남녀로 나누어져 있다. 안밖으로 좌우로 상하로 군신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있는 변화를 탄생시키는 변화의 지점에서는 항상 1이어야 한다. 남녀가 아기를 맹글더라도 난자와 정자가 수정하는 지점에서 1이다. 변화의 시점에는 시공간상에 전개하여 펼쳐진 하부구조가 제자리로 환원되어 상부구조에 포함되어 본래의 1을 회복하는 것이며 거기에 우리의 추구해야할 완전성이 있고 미학이 있고 깨달음이 있다. 들판에서 뛰놀던 아이도 해가 지면 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듯이. 여름에 줄기와 잎으로 무성하게 전개하던 풀꽃도 겨울이 되면 작은 씨앗 안에 웅크리고 숨어들듯이 그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조직된 좌파 지식인 수 만명이 10년 동안 매우 노력했지만 이루지 못한 것을 노무현이 혼자 단번에 해냈다. 삼성이 10년 동안 못한 것을 스티브 잡스 아저씨 혼자 아이폰대박 해냈다. 혼자 순간에 해내는 것이어야 1억명이 단번에 호응하여 마침내 세상을 밑에서부터 완전히 바꾼다는 사실. 100만명의 지식인이 힘을 합쳐 100년 동안 열심히 해낸 것이 세상을 바꾼 일은 없다는 거. 누구나 아는 세상의 법칙이 그거다. 르네상스도 거의 미켈란젤로 혼자 힘으로 해냈다. 물론 혼자라고 말은 했지만 아주 혼자서 해낸 것만은 아니어서 다빈치 형님도 꼽살이 끼어줄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의문점은 여럿이 힘을 합쳐서 일하는게 당연히 더 나을텐데 왜 결국 스티브 잡스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하게 되는 걸까 하는 점이다. 실제로 그렇게 된다. 도무지 왜? 왜냐하면 그것은 기준을 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 필연의 구조가 숨어있다. '진정한 스마트폰이라면 마땅히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기준의 제시. 스티브아저씨 이전에도 스마트폰 있었다. 아이패드 이전에도 킨들이 있고 비슷한 크기의 전자사전도 나와 있었다. 그러나 도량형을 통일한 것은 진시황 혼자였다. 현대회화의 지평은 거의 세잔 아저씨 혼자서 뚝닥뚝닥 해서 열어젖혔다. 둘이서 한다면 그게 통일이 아니라 통이가 되고, 셋이서 한다면 그게 통일이 아니라 통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진정한 것은 혼자 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만인이 함께 하는 것이다. 통이, 통삼, 통사, 어중간한 것은 안 쳐준다. 나도 스마트폰이나 아이패드 형태의 어떤 상품이 언젠가는 대박날줄 무려 10년 전에 알았다는 사람 지구에 일억명 이상 있지만 그딴거 안 쳐준다. 어느 그룹을 가더라도 챔피언은 하나고 관전은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이다. 물론 점수도 필요한 사람에겐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깨달음이라는 소통의 본질과 동떨어져서 핀트가 안 맞는 다른 이야기다. 바둑이라는 게임을 발명한 것은 혼자 돈수한 거고 그 룰을 발전시킨 것은 여럿이 점수한 것인데 그건 다른 이야기다. 그 어떤 위대한 바둑 챔피언에 국수라도 바둑을 발명한 사람보다는 단이 낮다. 점수할 분은 점수하시라.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과 무관한 것이니 깨달음 팔지 말고 그냥 하시라. 사랑은 돈오돈수고 연애는 돈오점수다. 사랑은 사랑 연애는 연애다. 그것은 별개의 이야기다. 자동차가 시동을 거는 것은 돈오돈수. 그 차를 몰고 어데로 가는 것은 돈오점수다. 춘향과 몽룡이 어사출도 현장에서 시동이 걸렸다. 둘이 그 후에 잘먹고 잘살았는지 아니면 곧 헤어졌는지는 별개다. 그 현장에서 사랑은 완성된 것, 그 완성이 그 후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으며, 신분의 차이를 넘지 못하고 결국 불행해졌다 하더라도 그건 사랑이라는 성스러운 본질과 무관한 별개의 것이다. 점수가 돈수에게 말 거는 것은 빌 게이츠가 스티브 잡스 고용하려는 것. 언어도단이다. 장사꾼이 예술가를 모욕해도 유분수지. 왜 누군가의 분노를 살 것을 알면서도 유독 이 점을 강조하는가? 그것이 희망이라는 것의 존재양식이기 때문이다. 점수는 난망 돈수는 희망. 학습은 난망 소통은 희망. 계몽은 난망 미디어 선점은 희망. 기준의 제시는 하나, 진도는 발맞추어 다 함께. 우리가 그저 눈빛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거기서 더 나아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다면? 바로 그것이 소통이다. 바로 그것이 깨달음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이명박이 천 마디 말해도 사람의 마음을 읽지 못하므로 소통이 아니다. 그것은 지럴옘병이다. 그딴거 안 쳐준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 기성세대는 모르고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사람 마음 움직이는 방법을. ∑ |
문득, 모든 것이 달라졌다오.
땅 위를 달리며, 활로 사냥을 하고, 집을 지었다오.
하늘을 날며, 폭탄으로 울타리를 만들고, 우주로 채집을 다니오.
컴을 하오, 넷을 만나오. 모든 것이 달라졌다오. 그렇게 발견하고 만나고 달라졌다오, 문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