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깨달음의 길 깨달음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면서, 모든 면에서 소승적 태도로 변하고 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마음수련을 주장하는가 하면, 한국특유의 간화선을 버리고 위빠사나로 되돌아가는 경향도 있다. 이는 일정부분 퇴보를 수반하는 필연적인 전개과정이다. 구조론은 원래 질에서 양으로 간다. 당연히 퇴보하게 되어 있다. 외부에서의 에너지 공급 없는 닫힌공간에서는 퇴보하는게 정상이다. 깨달음이 ‘세상을 바꾸는 기획’이라는 본질, 신과의 소통이라는 우주적 스케일의 본질에서 벗어나, 질병의 치료나 스트레스 해소 따위 개인적인 관심사에 속하는 무면허 의료행위로 변질되고 있다. 이는 더 많은 사람들의 참여에 의한 필연적인 전개다. 불교는 소승에서 대승으로, 교종에서 선종으로, 과학에서 미학으로 발전해 왔다. 점점 어려워진 것이며 점차 고도화 된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자신의 머리를 만들어 왔다. 상부구조를 건설한 것이다. 원래 손발만 있었는데 대승이 일어나 몸통을 얻고, 선종이 일어나 두뇌를 얻고, 미학으로 전개하며 피가 돌아 완성되었다. 그러나 딜렘마다. 대승으로, 선종으로, 미학으로 갈수록 성철스님 정도 되는 한 두명의 큰 스님에게 의지하게 된다. 대중으로부터 멀어진다. 산중불교가 된다. 대중은 성철의 화두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필연적이다. 작은 보트를 탈 때는 누구나 선장 노릇 할 수 있다. 대승의 배는 크다. 거함으로 발전하면 뛰어난 리더만이 선장이 될 수 있다. 당연히 깨달음은 어려워지고 난해해진다. 석가의 제자 오백비구는 모두 깨달았다. 소승의 작은 배라 누가 선장이 되어도 항해에 무리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60억 인류 모두가 타는 큰 배가 되어 깨달을 확률은 1/60억로 줄었다. 세상 이치가 그렇다. 닫힌계가 있다. 울타리를 넘어 외부로 확대하면 난해해지고 고상해진다. 반대로 울타리 안에서 대중화 하면, 밑변을 넓히면 넓힐수록 점점 유치해진다. 조잡해진다. 진보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전교조가 세를 불리면 점점 우경화 된다. 세상을 바꿀 계획은 사라지고 교사처우 개선 등에 지엽말단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갈수록 유치해진다. 한총련도 마찬가지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하던 기세는 온데간데 없고 교내 자판기사업에나 눈독 들인다. 학생회가 이제는 학생회가 아니라 실로 자판기사업회로 변질된지 오래다. 조직이 건전성을 유지하려면 외부로 뻗어나가야 하며, 외부충격을 주어야 하며, 외부에서 에너지원을 끌어와야 한다. 그 방법으로 상부구조를 건설해야 한다. 그렇게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깨달음과 정치.. 어느 면에서 상반된다. 깨달음은 고요한 내면의 세계, 정치는 시끄러운 시장바닥 세계다. 필자가 고요한 깨달음을 말하면서 동시에 시끄러운 정치이야기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치에 관심끊고 은둔하면 결국 깨달음은 ‘사주, 관상 봐줍니다’로 퇴행하고 만다. 닫힌계 안에 출구는 없다. 절대로 없다. 깨달음은 대승의 노선, 미학의 노선, 돈오돈수 노선으로 가야한다. 세상을 바꾸는 기획이라는 본질에 다가서야 한다. 마음을 다스린다니 병을 고친다느니 하며 유치떨면 끝이다. 이는 말기에 나타나는 현상, 망조다. 무면허 의료행위에 대한 미련 버려야 한다. 구조로 이해하자. 구조는 생명체와 같아서 끝없이 확산되는 동안만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다. 외부에서 더 이상 신규자원이 공급되지 않는 상태에서, 즉 닫혀있는 상태에서 저변을 넓히면 유치해진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가요계가 외국음악과 교류하지 않는 상태에서 음반판매를 늘리려 하면 결국 총체적인 뽕짝화를 피할 수 없다. 수준은 계속 낮아질 뿐이다. 수준이 낮아야 팔리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태권도 단증따듯, 돈 내고 따는 걸로 여기는 독자라면 필자의 견해에 저항감을 느낄 것이다. 필자가 가리키는 방향이 결국 더 어려워지고, 대중의 접근이 불가능한 방향이기 때문이다. ‘나는 깨달을 수 없다’는 절망적인 결론으로 간다. 그러나 대승의 배는 크다. 버스 운전사는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 참된 깨달음은 리더 한 명만 도달해도 충분하다. 승객은 운전을 못해도 된다. 리더는 그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어야 깨달음이고, 승객은 그 곳이 버스안이라는 사실을 알기만 해도 깨달음이다. 작가는 그릴 수 있어야 깨달음이고 관객은 그림을 볼줄만 알아도 깨달음이다. 관객이 그림을 잘 그리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몸의 병이든 마음의 병이든 모두 친구가 없고, 그러므로 무대에 오르라는 초대장이 없고 그 무대에서 한 곡조 뽑을 콘텐츠가 없어서 생겨난다. 비참이 만병의 근원이다. 마음의 병은 수련회 가서 눈감고 앉았다 해서 치료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가 진보라는 목적, 문명이라는 방향성을 얻고 이상주의라는 나침반을 얻어 공유할 때 절로 해소된다. 비참의 극복이 진짜다. 깨달음의 본령이라 할 ‘세상을 바꾸는 대승적 기획’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가능하다. 소통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야 하고, 먼 길을 함께 가는 동지가 되어야 한다.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불교가 인도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면서 대승으로 발전했고, 중국 수도 장안을 중심으로 한 북중국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면서 선종으로 발전했다. 또 왕실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면서 미학으로 발전했다. 즉 울타리를 넘어 외부로 확대되어야 고상해지는 것이다. 발달하는 것이다. 문 닫아걸고 닫힌계 안에서 지지고 볶아서는 발전이 없다. 두 가지 진보형태가 있다. 1) 상부구조의 건설 - 닫힌계를 넘어 외부로 확장하며 질적인 고도화 방향. 2) 내부콘텐츠 조달 - 닫힌계 안에서 대중화 되며 접근성이 향상되는 방향. 이 두 가지 진보의 전개는 동시에 일어난다. 외부로 진출하기와 내부에서 살찌우기의 교차 형태다. 그 과정에서 일정한 질적 상승과 반대로 질적 하락을 수반한 콘텐츠 공급 향상이 일어난다. ‘인도에서 중국, 북종선에서 남종선으로의 확대는 불교가 고도화 되는 방향으로의 발전이었다. 그 정점에 육조혜능의 미학이 있다. 완성이 있다. 반면 태국이나 티벳, 라오스 등의 남방불교는 다르다. 국민의 90프로가 불교를 신앙하는 불교국가에서는 점점 유치해져서 민간신앙화 되었다. 불교가 타락한 것이다. 그곳에서 진정한 깨달음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콘텐츠 공급의 증가는 긍정적 측면이다. 대중화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이러한 구조의 양면성을 잘 이해해야 한다. 단선적인 구조, 흑백논리의 사고, 이항대립적 사고를 버리고 수준높은 입체적 사고로 조망해야 전모가 보인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에서도 나타난다. 초기 유대인 집단이라는 작은 울타리를 넘어 로마로 확장되면서 고상해졌다. 유대민족의 민족신앙이라는 유치함을 넘어 보편종교로 발달한 것이다. 교세가 외부로 뻗어갈 때는 고상해지고, 충분히 정착한 단계에서 내부적으로 확산되면 점점 미신이 되어간다. 오늘날 교회의 부흥회라는 것이 무당의 푸닥거리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러나 카톨록에서 기독교로 대중화 하면서 질적 수준이 낮아진 만큼 콘텐츠 공급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신부님 혼자서 다해먹던 카톨릭과 달리 개신교에서 신도의 쌍방향적 참여가 증가한 것이다. 진보운동 안에서도 그러하다. 외적확산≫질적상승≫한계봉착≫질적하락≫콘텐츠 공급 증가의 사이클이 작동하고 있다. 이는 일시 퇴보의 부정적 측면과 잠재적 진보의 긍정적 측면을 동시에 가진다. 소수의 지식인 집단이 진보를 독점하다가 노무현 세력이 가세하면서 큰 폭의 질적 상승이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상승할 배후지를 확보하지 못하면서 점점 유치해져서 꼴이 우습게 되었다. 대신 노무현세력의 가세로 콘텐츠 공급량이 절대적으로 증가했다. 딱딱하던 진보가 상당히 부드러워졌고, 촛불축제 등으로 즐거워졌고, 대중과 교감할 수 있는 접촉면이 상대적으로 넓어졌다. 국가 전체적으로도 그러하다. 우리가 FTA를 해야하고 문호를 개방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큰 폭의 수준상승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문을 닫아걸고 건희와 몽구가 독점하면 보시다시피 최악으로 유치해진다. 노무현 당선은 한국이 인터넷 붐을 타고 외국으로 뻗아나가는 흐름이었다면, 이명박 당선은 인터넷 거품이 꺼지면서 문을 닫아걸고 내부에서 김정일과 지지고 볶으며 자위하는 흐름이다. 이는 구조의 문제이므로 어느 정도는 필연적이어서 우리가 노력해도 타개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부시와 김정일의 태클, 인터넷 거품의 퇴조, 공룡 삼성과 현대의 발호 등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밸런스 원리가 작동하므로 잘 찾아보면 그 안에 맥이 있고 급소가 있고 키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조만간 대승의 큰 배를 띄울 밀물은 다시 몰려온다. 그 기세를 탈 준비 갖춰야 한다. 한국의 문제는 구조의 문제다. 지식이라는 손발은 있는데, 세력이라는 몸통이 없고, 미학이라는 두뇌가 없다. 우리가 외부로 뻗어나가 충돌할 때, 맨땅에 박치기 하면서 그것은 만들어진다. 구조의 외부가 외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치만 보지 말고 경제와 문화도 보라는 말이다. 지식인 집단만 보지 말고 대중도 보고 사회의 여러 측면으로 시선을확장시키라는 말이다. 바깥은 안에도 있다. ∑ |
김영민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진리'는 인간의 몫이 아니고 우리는 진리를 찾아 비상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일리'에 천착해야 한다는 것이죠. 다시말하면 '진리'와 '무리'를 가로지르는 '일리'로 세속을 통과하고자 산책하는 것.
아래는 고들빼기님 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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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배의 <한국사상과 불교>를 열심히 읽었다.
애매 모호하던 생각들이 조금씩 정리가 되었다.
원효의 一心과 一味라는 말들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만유불성에 의하면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단다.
이 불성으로 만나는 것이니 衆心과 衆味가 아니라 一心과 一味 아닌가.
불교에서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불성으로 문제를 해결해 간 원효의 천재성에 몇 번이고 무릎을 쳤다.
박성배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논쟁을 창조적으로 해석하였다.
돈오는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이요, 점수는 부처가 중생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성철은 돈오돈수를 주장하였다. 그는 돈오점수를 설파한 지눌의 책을 읽지 말라고까지 하였다.
박성배는 깨달음과 깨침은 다르다고 하였다. 깨달음은 학문적 차원이요, 깨침은 종교적 경지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나는 돈오점수하겠다. 말하자면 처녀나 총각이 첫 사랑을 하는 것을 돈오라고 볼 수 있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음과 온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아니던가.
이 체험을 하게 되면 그 이전과 다르다. 그래서 이를 돈오라고 하자.
돈오를 하였으니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을 것인가. 그래도 된다.
그러나 사랑을 한 이후에 계속해서 사랑을 해도 된다. 이는 점수漸修 아닌가.
하여간 불교인들은 왜 그렇게 복잡한 논쟁을 하였는가.
돈오돈수와 돈오점수 논쟁에서 궁극적 목표 또는 목적 결과는 돈오이다.
그런다면 수단이나 과정에 불과한 修를 두고 수백 년 심지어 천여 년 이상 논쟁을 할 필요가 있을까.
頓悟頓修는 열반이 목적이고 끝이므로 그 깨침은 닫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頓悟漸修는 열린 열반이라서 열반 이후에 다시 열반으로 나아갈 수 있다.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이들은 돈오점수적 열반은 무명이지 깨침이 아니다. 왜, 더 수행할 것이 있다면 깨침이 아니라는 거다.
이는 서구 철학에서 변화성과 불변성을 두고 벌인 논쟁과도 같다. 서구에서는 이데아. 즉 불변성이 주류였다고 보아도 될 듯하다.
그러나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어느 쪽을 이겼다고 보아야 할까.
나는 깨달음인지 깨침인지가 절대적 완결성이라는 견해에 찬성을 표할 수 없다.
한용운은 나룻배가 되어 나그네를 기다린다. 나그네는 나룻배를 타고 가 버린다.
그러면 다시 나룻배는 나그네를 기다린다. 바로 돈오점수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나그네, 나는 당신을 태우고 진리의 강을 건넌 후에 다시 당신을 기다리겠다.
나는 사랑을 맛 본 후에 다시 맛 볼 사랑을 기다리겠다.
그런데 한 번 사랑을 맛보았으니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라, 이보다 더 지고지순 완벽, 절대적 사랑은 없으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돈오돈수 파들아.
성철 종정이 머리가 나빠서 돈오돈수를 주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누구는 머리가 나쁘다 이런 말을 하면 지금까지의 내 글은 모순에 빠진다.
왜 만유불성의 一心으로 만날 수 있으며 성철 같은 자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보아야 하므로.
요즘 어떤 듣보잡이 지적수준 운운 하면서 망신을 자초하고 있다.
성철이나 그 듣보잡이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도대체 진리를 나만 깨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만 깨치는 것이 진리인가. 그래서 나는 사랑으로 돈오점수를 설파코자 하였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누군가 묻는다. 당신은 바람둥이냐고,
글쎄다. 당신이 배우자와 사랑을 나눈 후에 그 사랑의 깨침에 놀라서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으려고 작심했단 말인가.
그건 無明이로다. 당신의 사랑만 지고지순의 열락이 아니다. 선남선녀, 장삼이사 누구나 당신과 같은 무게와 가치로서 사랑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만유불성이라고 한 거다. 잘 끓인 설렁탕은 사해 동포 누가 먹어도 맛 있다. 어떤 듣보잡 수준이가, 그 듣보잡도 설렁탕 맛에 똑 같이 반할 것이다. 그래서 원효는 一味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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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 신기하죠. 제가 돈오점수라는 keyword로 검색을 하다가, 김창준이라는 분을 알게 되었는데요.
혹 시 이 분을 우리가 나중에 우리 홈페이지 프로그램 관련해서 컨설팅 도움을 받을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뭐, 지금 미리 contact해서 의견/도움을 좀 받아도 좋을 것 같고. 미리 contact해서 이것저것 생각을 교환하다보면 우리 주주/회원으로 가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무튼 대단한 프로그래머이면서도 철학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아래는 마소라는 회사와 인터뷰한 내용 중 일부입니다. (www.imaso.co.kr/?doc=bbs/gnuboard.php&bo_table=article&wr_id=3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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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준 스러움’의 실체는 무엇일까? “제가 가고자 하는 길은 개발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보편적 가치로써 추구할 뿐이죠. 아들 아이의 이름을 세연이라고 지었습니다. ‘세’는 세상(World)을, ‘연’은 연결하다(Connect)의 의미입니다. Connect the World!”
그가 본격적으로 다른 학문과의 융합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한 권의 책이 촉매가 됐다. ‘복잡계 과학’이다. 저자가 속한 미국의 산타페 연구소. 그곳에서 다양한 노벨상 수상자들이 모여 공동으로 연구하는 모습에 반했다. 다른 분야의 전혀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끼리 의견을 나눠야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출해 낼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대안언어축제, 르네상스 클럽이 그 실체다. 두 가지 모두 학습이 전제된 활동이다.
소프트웨어 개발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으로 학습을 꼽은 것이다. “기업이나 팀이 오래 존속하기 위해서는 길게 학습하는 구조가 형성돼야 합니다. 현실에선 학습보다는 성과중심주의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하지만 정 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가 몸담고 있는 애자일 컨설팅은 철저하게 학습하는 조직이다. 보통 업무가 끝나면 퇴근하는 모습이 일상적인데 반해 매일 매일 ‘회고’하는 스타일을 정립했다. 퇴근 전에 그날 배운 것을 공유하고 회고하는 시간을 갖는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예전에 함께 일했던 사람 가운데서 인력을 충원한다고 했다. 그 만큼 학습화된 사람들을 신임한다는 뜻으로 보였다. 주당 16시간 근무라는 발언으로 부러움을 사고 있지만, 이는 의도적으로 학습 시간을 확보한다는 의미다. 공부나 책읽기는 시간 날 때 한다는 말과 전혀 다른 개념이다. 그 내막에는 소프트웨어 개발에서도 학습이 최우선이라는 그의 지론이 깔려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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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제가 김창준님을 만나게 해준 돈오에 대한 김창준님의 생각입니다.
(agile.egloos.com/4876792)
저 는 학창시절 늘 궁금했습니다. 왜 점수돈오라고 안하고 돈오점수라고 할까. 점진적으로 수련을 쌓다가 어느 순간 팍하고 세상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 더 논리적으로 잘 맞는 것 같았거든요. 그 순서로 보면 점수돈오라고 해야 하지 않나 이거죠.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것은 불가에는 돈오점수인지 점수돈오인지 (아니면 돈오돈수 같은 다른 조합인지) 등에 대해 여전히 논쟁이 있다는 점이었고, 돈오점수는 말 그대로 갑작스럽게 깨닫고 나서 점진적인 수련을 한다는 뜻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저야 불교에 대해 일천한 지식 밖에 갖고 있지 못하니 어느 쪽이 옳니 그르니 말은 못하겠고, 돈오점수가 제가 하는 "변화를 만드는 일"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 오는지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사티어 변화 모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버지니아 사티어(Virginia Satir)라고 가족 치료 전문가가 만든 변화 모델입니다. 먼저 그림을 보시죠.
이 모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고, 여기에서는 제가 말하려는 돈오점수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모 든 변화는 우선 외부 요인(Foreign element)이라고 하는 것이 들어오고 저항이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저항이 우세하면 원래 상태(Late status quo)로 돌아갑니다. 도저히 외부 요인을 무시할 수 없는 때에 균형이 깨지고 혼란(Chaos)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와인버그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은 명언을 합니다.
위기는 갑자기 오지 않는다. 위기에 대한 인식이 갑자기 올 뿐이다.늘 위기는 조짐을 보였습니다. 계속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는 외부 요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순간에 균형이 깨어지고 위기(혼란)가 찾아오지요.
이렇게 외부 요인을 받아들인 때부터는 퍼포먼스가 예전보다도 못합니다. 한동안 계속되다가 전환점이 옵니다.
전환적 착상(Transforming idea)이 생깁니다. 생각이 바뀌고 세상이 달라져 보이는 시점이지요. 이 때가 일종의 돈오입니다. 갑작스러운 깨달음이죠. 만사 척척 해결될 것만 같습니다. 게임 다 끝난 것 같습니다. 실제로 가끔 퍼포먼스가 기가 막히게 나오기도 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멈춰버리는 조직과 개인을 너무도 많이 봤습니다. "아 이제 되나 보다"하고 거기에서 멈춥니다. 그러면 그 조직과 개인은 자동으로 이전 상태(Late status quo)로 돌아가게 됩니다. 변화(외부 요인)를 받아들이지 못한 겁니다. 여러가지에 대해 두루 아마추어인 사람과 조직이 갖는 공통점입니다.
진 정 변화하는 곳에서는 돈오 이후에 점수를 계속합니다. 바로 통합과 수련(Integration/Practice)의 단계입니다. 자기가 얻은 깨달음을 실제로 실천해 보고 부족한 부분은 더 다듬고 또 가끔씩 실수하면 뭐가 부족한지 연구하고 다시 보충하고 등 점수가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새로운 안정적 상태(New status quo)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외부 요인이 들어오고, 혼란을 겪고, 돈오를 하고, 또 점수를 해야 합니다.
개 인적으로 자기가 정말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학습한 과정을 잘 생각해 보세요. 분명 돈오의 순간이 있고 또 그 뒤에 점수가 이어졌을 겁니다. 예컨대, 생소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우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언어의 모든 개념을 한 실에 꿰찰 수 있는 듯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초등학생으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 깨달음을 갖고 실제 프로그래밍을 하다 보면 잘 될 때도 있고 형편 없을 때도 있습니다. 지속적인 수련을 하다보면 비로소 내 몸에 그 깨달음이 익고 체화되는 것이죠.
조 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애자일을 도입한다고 칩시다. 처음에 애자일을 도입해서 퍼포먼스가 팍 내려갑니다. 헤매다가 아! 이러면 되겠다!를 외칩니다. 그러면서 실제로도 뭔가 성과가 좋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시작입니다. 수련의 시작.
--김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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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짧은 제 생각 단편 몇 개를 모아 본 것 입니다.
<단상 1>
종 교는 이미 비지니스가 된지 오래죠. 자신이 이미 깨달아 있는 부처라는 사실을 모르고, 그래서 '점수'를 통한(부처가 중생으로) 보살행을 걷지 못하는 우매한 중생들에게 '진리'로 포장된 설교로 영혼을 사고 파는 비지니스... 그래도 몇몇 성직자분들은 참사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가령, 로메로라는 영화의 신부님처럼, 미션의 로버트 드니로처럼, 혹은 아래 기사에 나오는 신부님 처럼.
"북잉글랜드의 한 신부가 좀도둑질 행위가 때로는 상황에 따라 용인될 수 있다고 주장해 논란을 빚고 있다. 영국 성공회 소속의 팀 존스 신부는 지난 20일 요크에 위치한 세인트로렌스 성당에서 신도들을 상대로 설교하던 중 절박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대형상점에서 생존에 꼭 필요한 만큼 물건을 훔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연합 2009년 12월 23일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도 위와 비슷한 대사가 나오죠. 위 신부님께서 혹시 '괴물'을 시청한 것은 아닐까요? ^^;
<단상2>
"모든 종류의 개입(engagement)은 양날의 칼이다."
-지난주(12/10) 북한 과학자들을 만나고 온 스튜어트 토슨 美 시러큐스대 교수
토슨 교수는 정치/경제/학문 교류라는 측면에서 개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겠지만,
이 문장을 인문학으로 들여다 보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김영민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죠.
"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상처는 예감되지만, 그 상처의 길을 막을 수 없다는 게 인간의 운명이다. 마치, 어두운 방 안에서 깨달은 것을 밝은 길 위에서 놓치듯, 말이다. 구조와 패턴의 인과성은 환하게 보이더라도, 개인의 이치를 설명하는 인과율은 어디에도 없는 것; 아, 개인은 영원히 어리석다. 실은, 너를 만나는 일이 재난인 줄 알고 만난다. 그리고 그 재난이 어떤 종류의 반복인 사실도 환하게 안다. 정작 내가 모르는 것은, 그 재난을 회피할 정도로 내가 내게 행복을 허락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
결국 산책(참여와 개입)이 양날의 칼이라는 것인데요. 그래서 제가 예전에 다음과 같은 짧은 글을 쓴적이 있습니다.
"As 김영민 said, taking a walk always involves a risk. But, If you are not willing to take a risk, you have no growth, no change, and no freedom. And when that happens, you are no longer involved in living. In a sense, you are dead. So, Let's take a walk. We can not enjoy swimming without getting wet. Don't be afraid of getting wet. It is a part of wonderful life.
There is, however, one caveat though. Whether it is going to be a part of wonderfule life or ugly one totally depends on how you walk. In other words, we have to take a 동무-like walking not like a power-walking."
김영민 선생은 결국 타자라는 심연을 조심스럽게 건너가는 방법은(산책은) 배워야 하는 것이지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며 다음과 같이 말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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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고통받는 사실은 배워야 하는 일인데도 결코 완전하게 배울 수 없다"(니체)
니 체는, 타인이 고통받는 사실은 어렵사리 배워야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인간의 본성으로 전제한 맹자류의 성선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타인의 고통을 학습의 대상으로 여긴 니체의 생각은 상식적으로 낯설어 보인다...(중략).. 우리가 근원적 이기심 속에서 늘 잊고 있는 사실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심연(深淵)을 건너가듯 조심스럽고 지속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이다.근년의 내 생각에는, 이 심연을 통과하는 일상성이 바로 '동정적 혜안'과 '극진'이라는 개념 속에 집약되어 있다. 마치 하이데거가 존재에 대한 '삼감(Verhaltenheit)'을 권면하는 기분으로, 나는 오히려 그 모든 타자들에 대한 '극진'을 주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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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야 한다...
그 렇죠. 개인이나 조직이나 계속 배우고 학습해야만 하겠죠. 그 과정에서 아프고 상처받기도 하지만, 그 것이 삶의 속성이며 피할 수 없는 성장의 과정이라면 '산책'은 우리의 운명일수 밖에 없다는 것. 내가, 혹은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단상 3>
이웃을(타자를) 사랑하라.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 타자와 소통하고 산책하라. 스스로를 구원하기는 힘들 것이나, 소통과 산책으로 구원받을 것이다.
<단상 4>
조 금 부끄럽지만 저는 우리가 추진하는 사회적 기업의 목표를 조금 크게 잡고 있습니다. 사회변화의 주도적 세력으로 성장하기 위한 "기본엔진"의 역할. 우리가 추진하는 시민단체운영이 후원금/성금 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본엔진"으로 굴러가는 것. 누군가의 희생/헌신, 누군가의 도덕적 각성으로 사회변화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긍정적인 사회변화가 이루어지도록 유도하는 기업. 결국 사익이 대의와 일치되도록 하는 기업이 제가 생각하는 사회적 기업의 목표 입니다.
왜냐? "인류역사는/인류는 언제나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그것이 불의와 타협하는 길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같이 잘 살 수 있는 세상이란 불의와 타협하지 않을 때 더 많은 인센티브(더 생존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김대중 대통령/노무현 대통령처럼 스스로를 버리고 헌신하라고 할 순 없지 않는가?"
<단상 5>
산책과 파워워킹의 차이점:
산책은 text를 둘러싼 context를 살피며 세속을 '통과'해 나가는 우리가 '동무'를 지향하며 '참여와 개입'을 통해 조심스레 걸어나가는 것이지만
파워워킹은 text에 빠져 context를 무시하며 세속에 '갇혀'사는 사람들이 '친구/동지'로 뭉쳐 '간섭과 참견'을 통해 급하게 뛰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급진주의는 기회주의와 같은 말이라는 것.
<단상 6>
급진주의 = 기회주의
" 좌익' 급진주의는 말로는 무척이나 혁명적인 듯이 굴지만 실제로는 기회주의이다. 이들은 이론적,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사이비혁명적인 용어를 구사하면서 실천적으로는 근로대중의 조직화된 계급투쟁을 모험적이고 테러적인 개인행동으로 대체한다. 이런 행동은 아무런 사회변화를 야기하지 않는 대신 제국주의 반동 세력에게는 혁명적 노동운동을 박해, 억압하고 테러하는 데 좋은 구실을 준다." - <철학사전>
우연히 위 구절을 인터넷에 봤는데요. 폭력적 시위를 유도하는 듯한 자칭 진보세력의 시위문화 문제점을 바라보는 제 입장과 같아 공감이 가더군요. 그래서 "철학사전"이라는 책이 어디서 출간된 것인지 인터넷 검색을 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위키피디아 한글 버전에 나와 있는 link를 따라 철학사전 pdf 버전을 열어 봤더니, 북한에서 출간한 주체철학관련 사전이더군요. 얼른 문서를 닫고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는데, 역시 저는 국가보안법에 주눅들고 친일매국수구세력이 심은 가짜 반공에 멍든 세대인것 같아 마음이 좀 씁슬했습니다....
<단상 7>
산책과 구원:
내 일과 남의 일, 그리고 신의 일이 있는데, 우리는 내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던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서 어떤 일이 누구의 일인지에 대한 판단을 누가 하느냐는 것이지요.
당연히 각자가 하는 것일 겁니다.
저는 매트릭스의 일을 혹은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일을 남의 일이 아니라 제 일로 보고 있습니다.
지구가 아프니 저도 아프고, 한국이 비명을 지르니 저도 비명을 지르게 됩니다.
제 내부로 들어가 해결할 수도 있고 통렌 수행으로 서로를 도울 수도 있겠지만, 저는 '산책'을 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는 인간으로 영원히 단독자(천상천하유아독존)일 수 밖에 없겠으나,
깊이 내부로 들어가면 '산책'은 아이러니하게도 존재 내부의 근원적 요청이라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죠.
언젠가 제가 "Style is everything."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아속에서 하나다. (All is one, one is all.)
진아속에서 나는 신이고 따라서 당신도 신이다. 타인을 잘 응대함으로써 당신은 당신의 마을로 내려온 신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저는 "One is all. All is one."이라는 문장이 내부로 들어가라는 말임과 동시에 타자를 잘 응대하라, 다시말해 '산책'을 나가라는 말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둘 다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할 수 없습니다.
둘다 필요하고 서로 유기적으로 피드백이 이루어져야할 한 몸이라 분리될 수 없다고 봅니다.
물론 어느쪽에 방점을 두고 갈것이냐는 각자의 선택과 결정의 문제이겠지만 외부와 내부의 소통은 필수적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구원은 내 안에 혹은 당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당신사이의 틈에(소통에) 있는 것이고 따라서 '산책'을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런지...
<단상 8>
Style is everything.
에고와 진아를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려는 강박적 태도에도 나름의 일리가 스며 있겠으나
대개의 경우 이는 미성숙의 징후로 보인다. 에고란 진아가 세속에서 나투는 자기인데
, 다시말하면 결국 에고는 진아가 세속에 응해서 드러내는 진아의 모습 중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에고는 진아의 일부로서 이해 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우리는 못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하며
끔찍하기도 한 자신의 에고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전과 같지 않다고 했던가?
있는 그대로 에고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진아를 발견하는 것이다.
여기서 응해서 드러낸다는 것이 중요한데, 세속을 어떤식으로 응대하느냐에 따라 에고의 모습과
삶의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개개인의 발현업에 따라 응하는 방식이(습이) 정해지고
그 방식이(습이) 개개인의 운명이 된다. 그런데 수행이란 이 습을(응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고
이를 통해 발현업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진아를 찾기 위한)
어떤 특정한 습이(응하는 방식이) 딱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각 개개인의 발현업에 맞는,
각 개개인의 단계에 맞는 나름의 sytle(습, 응하는 방식)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각 개개인의 발현업이 다르듯이 수행을 통한 각자의 style도 천차만별인 것.
알다시피, 세상엔 선악도 없고, 진위도 없으며, 옳고 그름도 없다.
그러한 분별은 많은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야하는 세속의 피치못할 사정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세속의 잣대에 맞추어 혹은 세속에서 교육 받은대로의
분별에 빠져 살고 있다. 이를 넘어서면 무분별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이 무분별의 세계또한 우리가 함께
살아내야할 세속에 뿌리를 내리기 어렵고 따라서 style로 받아드리기 어렵다. 왜냐하면 style이란 세속에
응하는 나름의 방식인데 무분별은 응한다기 보다도 그냥 동일하게 반응하는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결국 무분별을 인식하면서도 무분별을 뛰어넘는 지혜로운 분별이 필요한데, 이 지혜로운 분별은 다름아닌
내가 발딛고 살고 있는 세속의(인간의, 자연의) 역사성을 차분히 살피는 진아에서 나온다.
김영민 선생의 말을 빌리면 text(선악/진위)가 아니라 text를 둘러싼 context를 잘 살펴보아야만 한다는 말.
우리는 진아속에서 하나다. (All is one, one is all.)
진아속에서 나는 신이고 따라서 당신도 신이다. 타인을 잘 응대함으로써 당신은 당신의 마을로 내려온 신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무한한 잠재성을 가진 진아가 발현하는 방식, 발현된 진아의 모습은(에고는) 같지 않다.
진아는 세속에 응해서 자신의 모습을 아주 조금 보여 주는 것이고, 응하는 방식, 즉 style 선택을 통해 우리는 진아와
에고의 화이부동을 추구해 나가는 것.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안과 밖이 시원하게 통풍되는 그런 style!
그래서 김영민 선생은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Style is everything이라고...
<단상 9>
중도님께,
중도님께서는 또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셨는데요.
"메트릭스를 벗어나는 길은 메트릭스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내가 메트릭스를 넘어서는 초월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바깥이 아닌 내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재화는 인류 전체에게 충분하다해도 골고루 분배되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불가능하지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가만 두지 않을테니까요."
그렇습니다. 불가능하죠. 그러나 매트릭스에 의해 부추겨지고 증폭되어진 가짜 욕망의 power level은 줄일 수 있습니다. 매트릭스에서 벗어난다면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자기만 벗어나면 되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데요. "One is All."이기 때문에 내부로 들어가 매트릭스를 초월해 버리고 자기만 벗어나면 되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All is one."은 어떻게 하죠? 물론 이것도 전적으로 각자의 선택과 결정에 달렸겠죠. '산책'을 나가던 내부로 들어가 초월하던 말이죠.
중요한 것은 타자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저렇게 하지 않으니 비난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중도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평화하고 자유하고 행복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 "하나님 앞에 가장 작은자"가 되는 것 아닐까요?"
그렇죠.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가 "복리이자의 마술과 금융붕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이구요.
"하루세끼 먹을 것이 있고 비를 피하고 쉴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행복한지를 절감하는 요즘입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시길....."
그러니 저도 "하나님 앞에 가장 작은자"로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다만 한가지 더 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평온하게 '산책'하는 것이지요.
<단상 10>
중도님께,
중도님, 저는 운명을 45% 믿습니다. 누구의 자식으로, 어느 나라에서 태어 나느냐에 따라 한 개인의 운명은 완전히 다른 길로 가게 되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운명일 뿐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운명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45%만 믿습니다.
왜냐하면 주어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후에) 인생의 길을 가다 보면, 각자의 선택과 결정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니 말입니다.
다시 말해 운명에는 변동의 진폭이 55% 정도 있다고 할까요.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구의 자녀로 어느 나라에 태어나느냐는 다시 말해 누구와의 인연으로 태어나느냐와 같은 말이지요.
게다가 태어난 이후의 운명은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책을 통한 만남도 포함해서)가 가장 크게 좌우되는 것으로 보이고요.
결국 운명이란 인연의 다른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의미에서 당신은 내 운명 혹은 나는 당신의 운명, 결국 우리는 인생이라는 스크린에서 정해지지 않은 시나리오로 '연극적 실천'을 하는 '진아'의 배우들이라 믿습니다.
물론 영화가 끝나면 육신을 벗고 각자 자기자리로(해탈 혹은 윤회) 가겠죠.
아무쪼록 이번 생의 제 영화가 끝나면, 이번에야말로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 해탈하고 싶은데 잘 될런지... ^^;
블로그 : http://blog.naver.com/pdnote99
중간계들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리더는 길을 열고 대중은 그 길을 가며 리더는 단박에 되고 대중은 단박에 그 길을 가며 중간계들은 쓸데없이 그 중간에서 시험이라는 관문을 만들어놓고 라이선스 장사를 하며 점수따라고 하지만 저는 안 합니다. 왜냐면 1초에 안 되는 일은 익억년에도 안 되니깐. 대화 안한다 이게 본질입니다.
중간계들이 점수를 하고 앉았는 이유는 콘텐츠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용을 채워야 하는데 채울 내용이 없으니까 뭐라도 있어보이는 척 하려고 점수 핑계대고 절에서 안나가고 앉아서 버티는 거죠. 미학이라는 콘텐츠가 없으니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도발적 질문 앞에서 어쩌지 못하고 우물쭈물.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까?
=> '산책' 하자구요.
하여간 산책은 입이 아닌 발로 하는거.
우리사회에는 일정한 숫자의 점수마니아들이 있소.
기독교에도 피정이 있고 수피즘에도 있고
그양반들은 죽을때까지 수행을 할 것.
왜냐하면 마니아니까.
보편적이지 않다는 말씀.
마니아들은 수행이 취미니까 수행을 하시고 우린 우리대로 진도 나가주시고.
우리는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데 관심이 있고 그것은 대중의 참여를 끌어내는 광범위한 소통으로 가능하며 깨달음이 그 촉매가 되고
이상주의라는 명목에 미학이라는 콘텐츠를 더함으로써 개개인 모두의 삶을 바꿈에 따라 그 소통은 가능할 것.
점수할 사람은 하시고 취미생활 하시고 세상을 바꾸는 모험을 할 사람은 계속 진도나가주시고.
점수는 개인적인 관심사일 뿐 대중이 참여하는 보편적인 목표가 될 수 없소.
대중이 참여하는 광범위한 소통은 가능한가?
이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오.
대중이 참여하는 미디어는 구텐베르크 이후, 티비 영화 등 대중미디어의 등장 이후, 인터넷의 등장 이후
새로 일어난 현상이니까 석가는 구경도 못해본 것, 달마도 구경 못해본 것.
위의 내 글을 읽어 보지 않았다고 했으니 당연히 봉창 뚫는 소리를 하는 것 아니겠소.
'점수'를 취미생활로 보고 세상을 바꾸는 기획이 아니라는 것은 당신의 오해요(혹은 실패).
'산책'은 세상을 바꾸는 기획의 핵심이오. 천천히 뚜벅뚜벅. '산책'과 '점수'가 왜 세상을 바꾸는 기획의 핵심인지는 내가 위에서 설명을 해 놓았는데 읽어 보지 않았다니 안타깝소. 우리는 진도를 나가는 것이오. 대중의 참여를 근원적인 측면에서 유도하면서 말이오. 위의 글 중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가장 쉽게 쓴 글은 아래와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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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부끄럽지만 저는 우리가 추진하는 사회적 기업의 목표를 조금 크게 잡고 있습니다. 사회변화의 주도적 세력으로 성장하기 위한 "기본엔진"의 역할. 우리가 추진하는 시민단체운영이 후원금/성금 등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본엔진"으로 굴러가는 것. 누군가의 희생/헌신, 누군가의 도덕적 각성으로 사회변화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긍정적인 사회변화가 이루어지도록 유도하는 기업. 결국 사익이 대의와 일치되도록 하는 기업이 제가 생각하는 사회적 기업의 목표 입니다. 왜냐? "인류역사는/인류는 언제나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그것이 불의와 타협하는 길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같이 잘 살 수 있는 세상이란 불의와 타협하지 않을 때 더 많은 인센티브(더 생존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김대중 대통령/노무현 대통령처럼 스스로를 버리고 헌신하라고 할 순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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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가만히 보니 돈오점수 화두가 리트머스 시험지같소. 읽어 보지 않고도 격렬하게 타자를 모욕하는 행태는 당신이 당신의 매트릭스에 빠져 자위하고 있는 자들 중에 하나라는 소리니 하는 말이요. 혹시 님은 어디엔가 크게 정신적 상처를 타자에게 받은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되오 . 당신도 모르는 깊은 곳의 근원적 상처.
부디 "나는 깨달음인지 깨침인지가 절대적 완결성이라는 견해에 찬성을 표할 수 없다." 혹은 "돈오는 중생이 부처가 되는 것이요, 점수는 부처가 중생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혹은 "돈오돈수는 열반이 목적이고 끝이므로 그 깨침은 닫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돈오점수는 열린 열반이라서 열반 이후에 다시 열반으로 나아갈 수 있다.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이들은 돈오점수적 열반은 무명이지 깨침이 아니다. 왜, 더 수행할 것이 있다면 깨침이 아니라는 거다. 이는 서구 철학에서 변화성과 불변성을 두고 벌인 논쟁과도 같다. 서구에서는 이데아. 즉 불변성이 주류였다고 보아도 될 듯하다." 라고 말씀하신 위 고들빼기님의 글을 꼭 읽어 보길 권하오. 아마도 도움이 될 것이라 믿소.
여기서 수행이라는 말을 개인적 차원의 것으로 쳐다보면 아니되오. 당신의 실패는 여기에 있소이다.
수행은(점수는, 혹은 보살행은 혹시 또 님이 오해/실패 할까봐 첨언하면 세상과의 소통과 개입은) '산책'이라는 말이오.
어찌되었던 타자를 '극진'하게 대접하지 않고 모욕하는 행태는 꼭 고쳐보길 바라오.
남의 집에 찾아와서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꺼내놓고
자신의 얘기를 듣지 않았다고 얼굴 붉히고 있지 않소.
분위기파악 같은 거 안하고 사는 사람이랄까...
학교 다닐 때 선생들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소.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에 우쭐해서 저 혼자만 떠들어대는... 애들은 다 자고... 그러다가 나중에 애들 수준 안 된다고 나무라기만 하지.
선생은 자기 학교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무데서나 선생질을 하려고 하면 안되죠.
점수니 산책이니 누가 물어봤냐고...
대화를 하려면 상대를 배려하는 적절한 제스쳐를 취하는 게 기본적인 센스인데...
하여간 오해니 뭐니 말하기 전에 오해를 유도하는 당신의 태도를 먼저 생각해볼 일이오.
남에게 자신을 홍보하려면 먼저 남이 하는 말을 충분히 들어주고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며 한마디 꺼내야 한다는 건 애들도 감각적으로 아는 거요.
무차별적인 반대분위기에서, 조심스럽더군요.
약자들의 반대분위기는 이해가 갔지만,
그 분위기를 이용한 진보신당이나 민노당의 모습은 대안으로여겨지지
않았습니다.
파고(외국세력)을 넘으면서 함선의 수압 (내부역동성)을 유지시키는
일이 필요하죠.
프랑스 구좌파의 몰락을 보고, 영국 신노동당의 노련함을 봅니다.
역사는 순환하는법.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참패는 당연.
삿된 길 버리고, 뚜렷한 길로 갈것.
하여간 뻘쭘한 아저씨가
번짓수 못 찾고 어문데 와서 또 뭐라고 써놨는가 본데 읽을 가치 없고
점수 하는 아그들은 보지도 않고 쳐버린다는 것이 돈수의 전략이오.
이건 적을 타격하기 위한 의도있는 전략이오.
그런데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는 정해져 있소.
주먹질 하는 자는 쉽게 칼로 쳐버리고, 칼 쓰는 자는 쉽게 총으로 쳐버리고
점수 쓰는 자는 쉽게 셛업으로 쳐버리오.
닥쳐!
깨달음은 소통, 소통은 돈오, 돈오면 돈수.
본질은 소통, 소통에서 시작하여 소통으로 끝나오.
진실로 말하면 깨달음은 오직 오로 끝나고 수는 그 존재가 없소.
빛은 에너지 입자가 실재하여 있고 그림자는 그 실체가 없이 남의 존재에 빌붙어 있음과 같소.
소통 그 자체는 스위치가 켜지는 것처럼, 남녀가 포옹하는 것처럼 단박에 전광석화처럼 일어나오.
물론 포옹하기 전에 삼년동안 씨루다가 겨우 포옹했을 수도 있고 포옹한 뒤에 또 3년동안 찌질댔을 수도 있지만 그건 딴 이야기.
깨달음의 본의는 어떻게 수억 혹은 수십억 인류로 하여금 단 한 방에 하나의 방향을 일제히 보게 만드는가이오.
어쨌든 김연아 선수는 이번에 그것을 해냈고, 예수 아저씨나 석가 형님도 왕년에 그걸 해냈소,
수천년간 수백, 수천억 인간이 하나의 지점을 바라보도록 했소.
지금 우리 모두는 세종 할아버지의 창제하신 스물네자를 빌어 쓰고 있소.
수천만, 수억, 수십억인구가 수천년 수만년 수억년 동안 물려가며 쓸 것이오.
무수한 세월 무수한 눈동자들이 세종 할아버지 기준 세운 하나의 지점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오.
지름길이 있는데 둘러가는 자를 두고 참으로 미련한 자라고 하오.
미련한 자는 미련하게 살도록 놔두고 아는 사람끼리 진도나가는 수 밖에 없소.
돈오돈수에 인류의 희망이 있소.
실로 오(悟) 안에 수(修)가 포함되어 있소.
구조론은 통짜덩어리 인식, 입체적 사고의 일원론이라 선형적 사고, 이분법적 사고의 이원론은 일단 배척하오.
오와 수를 구분하여 나누고 분별하며 차별하는 망상이 바로 이분법적 사고, 흑백논리의 병폐요.
세상의 모든 차별과 편견과 아집과 죄악이 바로 거기서 생성하는 것.
구조론은 세상의 모든 2가 1 안으로 수렴되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룬다는 견해요.
물론 남녀로 나누어져 있고 안밖으로 좌우로 상하로 군신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어떤 의미있는 변화를 탄생시키는 변화의 지점에서는 항상 1이어야 하오.
남녀가 아기를 맹글더라도 난자와 정자가 수정하는 지점에서는 1이어야 하듯이.
변화의 시점에는 반드시 하부구조가 상부구조에 포함되어 1이 되는 것이오.
들판에서 뛰놀던 아이도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듯이
줄기와 잎으로 무성하게 전개하던 풀꽃도 겨울이 되면 작은 씨앗 안에 웅크리고 숨듯이 그것이 세상의 법칙.
조직된 좌파의 무리 수 만명이 10년 동안 노력했지만 못한 것을 노무현이 혼자 단번에 해냈소.
삼성이 10년 동안 못한 것을 스티브잡스 아저씨 혼자 아이폰대박 해냈소.
누구나 다 아는 세상의 법칙이 그것이오.
혼자 순간에 해내는 것이어야 1억명이 단번에 호응하여 마침내 세상을 완전히 바꾼다는 사실을.
100만명이 지식인이 힘을 합쳐서 100년 동안 열심히 해낸 것이 세상을 바꾼 일은 한번도 없소.
르네상스도 거의 미켈란젤로 혼자 해냈소.
물론 혼자라고 말은 했지만 아주 혼자서 해낸 것은 아니어서 다빈치 형님도 꼽살이 끼어줄 수 있소.
여기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의문점은 여럿이 힘을 합쳐서 하는게 당연히 더 나을텐데
왜 결국 스티브 잡스 아저씨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하게 되는 걸까 하는 점이오.
왜냐하면 그것은 기준을 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오.
그 안에 필연의 구조가 있소.
'진정한 스마트폰이라면 마땅히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기준의 제시.
도량형을 통일한 것은 진시황 혼자였소.
현대회화의 지평은 거의 세잔 아저씨 혼자서 뚝닥뚝닥 해서 열어젖혔소.
둘이서 한다면 통일이 아니라 통이가 되고, 셋이서 한다면 통일이 아니라 통삼이 되는 것이오.
그러므로 결국 진정한 것은 혼자 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만인이 함께 하는 것이고
통이 통삼 통사 통오 통육 따위 어중간한 것은 될 수 없는 것이오.
어느 그룹을 가더라도 챔피언은 하나고 관전은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이오.
물론 점수도 필요한 사람에겐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깨달음이라는 본질과 동떨어진 다른 이야기요.
바둑이라는 게임을 발명한 것은 혼자 돈수한 거고 그 룰을 발전시킨 것은 여럿이 점수한 것인데 그건 다른 이야기요.
점수할 분은 점수하시오.
그러나 깨달음과 무관한 것이니 깨달음 팔지 말고 그냥 하시오.
사랑은 돈오돈수고 연애는 돈오점수요.
사랑은 사랑 연애는 연애, 물론 사랑이 연애고 연애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그 사람 마음.
자동차가 시동을 거는 것은 돈오돈수 그 차를 몰고 가는 것은 돈오점수요.
춘향과 성춘향이 암행어사 출도 현장에서 시동이 걸렸는데 둘이 그 후에 잘먹고 잘살았는지 아니면 곧 헤어졌는지는 별개요.
그 현장에서 사랑은 완성된 것, 그 완성이 그 후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으며
신분의 차이를 넘지 못하고 결국 불행해졌다 하더라도 그건 사랑이라는 본질과 무관한 별개의 것이오.
점수가 돈수에게 말을 거는 것은
빌게이츠가 스티브잡스를 무려 고용하려는 것과 같소.
언어도단.
장사꾼이 예술가를 모욕해도 유분수지.
왜 누군가의 분노를 살 것을 뻔히 알면서도 유독 이 점을 강조하는가?
그것이 희망이라는 것의 존재양식이기 때문이오.
점수는 난망 돈수는 희망.
기준은 하나, 진도는 다 함께.
완전성 - 미학의 기준과 방향을 제시하고 그 기준을 이해하고 또 응답하고..
소통이라는 것은 참으로 숨통트이는 통쾌함입니다.
아카데미 오프모임 가야 되는데 ㅠㅠ..
사람이 살다보면..
뭔가에 합류하면 자신의 세상도 커지나 합류하지 않을 때는 자신의 세상도 그만큼 쪼그라드는 것 같습니다.
합류를 해야하는데 어디에 합류를 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개인 스스로의 몫이겠지만
스스로 촉수가 발달하여 합류할 지점이나 그런류의 사람들을 잘 발견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고
또는 운이 좋아서(?) 다행히 주변에 그런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것이 있을 수 있고
그도저도 되지 않아서 주구장창 망해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경우들도 있겠지요.
자신의 세상이 커진다는 것은 어떠한 사회적인 집합체가 눈으로 확인하는 척도가 되겠지만,
이상주의와 미학이라는 것을 가슴에 품었을 때는 자신의 세상이 그야말로 확대되고 증폭되어 도약된다고 생각됩니다.
사람이 살면서 가치에 눈을 뜨지 못하고 그것이 스스로 정립되지 않은 세상은 그야말로 초라하고 비참하기 그지 없는것 - 무의미해지는 것.
어떠한 것도 가치없음이라고 판단하고 무의미해진다고 느끼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 되지만 가치를 찾고 의미를 찾으면 이미 그안에서 충만해지고 풍요로워짐을 체험하게 되는것 - 가야할 길이 저절로 선명해지는 것이고 보면 길이 보인다는 의미도 될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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