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말한 사람은 화이트헤드다. 사실이지 플라톤 읽어보면 황당하다. 뜻밖에 장자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많다. 그런데 다르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질서를 말했고 장자는 혼돈의 무질서를 말했다. 질서냐 무질서냐? 오늘날의 양자역학을 연결시키면 장자의 혼돈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문제는 혼돈의 죽음이다. 혼돈은 일곱 구멍의 질서를 얻고 죽었다. 세상의 근본은 에너지의 무질서인데 물질의 질서로 바뀌면서 죽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직 혼돈이 살아있다. 에너지다. 엔트로피 원리는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서 결국 죽는다. 혼돈의 죽음과 비슷한 느낌이다. 장자가 감으로 때려잡았지만 제법 있어보인다. 구조론은 에너지로 설명한다. 에너지는 최초 확산방향이니 무질서다. 수렴방향으로 바뀌니 질서를 얻되 그 상태를 유지하지는 못하니 5회에 걸쳐 질서는 자체모순으로 붕괴한다. 정확히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전개하면서 상부구조가 붕괴하면서 하부구조를 건설하는 패턴을 반복하다가 질서를 뱉어내고 죽는다. 사실은 꽤 복잡해서 질서와 무질서라는 두 단어로 설명할 수 없다. 어쨌든 에너지는 확산>수렴>확산>수렴을 되풀이하다가 최후에 확산하여 죽는다. 그러나 이는 인식론의 피상적 관찰이고 존재론으로 보면 에너지는 수렴만 하고 확산은 없다. 엄밀하게 보면 질서만 있고 무질서는 없다. 정확히는 질서의 감소만 있다. 장자의 접근이 상당히 구조론적 관찰이겠으나 이런 겉보기 유사성에 현혹되면 곤란하다. 장자가 구조론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대략 느낌을 말한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라도 마찬가지라 멋모르고 그냥 하는 소리다. 구조론으로 말하면 최고의 것은 사건의 완전성이며 그 완전성은 에너지의 질서라 할 혼돈보다 높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낮은 단계에서 대상을 제압하는 물질적 질서로 볼 것인가 아니면 더 높은 단위에서 사건을 이끄는 내적 에너지의 질서로 볼 것인가 아니면 더 위로 올라가서 사건을 복제하는 사건의 완전성으로 볼 것인가다. 어차피 상관없다. 플라톤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들었을 뿐이다. 화이트헤드로 돌아가 보자. “유럽의 철학 전통을 가장 일반적이고 무난하게 규정하자면 그 전통이 플라톤에 대한 잇따른 각주들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저작에서 마구 발췌하여 꿰맞춘 학자들의 도식적 사고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나는 플라톤의 저작에서 퍼져나간 일반 개념의 풍부함을 말하는 것이다.-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우리는 플라톤적 사유의 풍부함에 주목해야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복제된다. 완전한 세계 유토피아도 있고, 완전한 숫자도 있다. 4를 더하면 1+2+3+4=10이니 완전하다는 말도 있다. 정수가 완전하다거나 그렇다면 무리수는 뭐냐거나 하는 논쟁도 있다. 완전한 미녀가 아프로디테라면 완전한 인격자는 영웅 헥토르다. 완전놀이 재미지다. 그걸 가만두고 볼 기독교도가 아니다. 완전한건 보나마나 신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훔쳐서 신을 각색한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다. 동양은 반대로 혼돈놀이에 빠져 뭐든 적당히 중용과 중도를 지키며 조화를 중시한다. 주역사상이다. 역은 변화이니 불변의 태양보다 변화무쌍한 달을 좋아했다. 달이 변해야 농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달력에 의존하지만 그때는 달을 보고 날짜를 헤아렸다. 동양과 서양의 완전성에 대한 개념의 차이 때문에 서양은 뭐를 하든 끝까지 갔고 동양은 실용주의적 일탈에 빠져 순수한 열정의 아마추어리즘을 버리고 돈이 되고 벼슬이 되는 실용학문을 했다. 그러다가 망했다. 동양은 이데아를 충분히 사유하지 않아서 망한 거다. 왜 이데아인가? 왜 플라톤인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복제가 된다. 대량생산된다. 뭐든 이데아에 때려맞추면 밤새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혼돈에 때려맞추면 수호지나 서유기처럼 되어 이야기가 파편화된다. 이야기가 한 갈래로 모아지지 않고 산만해져 버리는 것이다. 천일야화처럼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중심이 되는 한 가지 주제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3일치의 법칙은 완전성의 반영인데 황당하지만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이야기의 완결성이다. 옴니버스가 되면 안 된다. 수호지나 서유기나 천일야화는 옴니버스다. 이것저것 끌어모아서 단편집으로 되어버렸다. 하나의 주제로 일관되게 밀어붙이지 못한다. 다양한 에피소드가 뒤죽박죽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발전이 없다. 그걸로는 셰익스피어가 못된다. 셰익스피어는 3일치의 법칙을 보기좋게 깨버렸지만 대신 이야기의 완결성을 부각시켰다. 하나의 강렬한 주제로 모아내는 것이다. 3일치의 본질을 진정으로 이해한 거다. 영화가 지루하게 가다가 마지막에 반전 한 방으로 뜨듯이 센 거 하나는 있어줘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완전성을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다. 이데아를 빼놓고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 내가 당신에게 이런 주문을 한다고 치자. 아무 주제나 하나 던져주고 그것을 주제로 칼럼을 쓰든 뭐라도 하나 글을 만들어봐라. 어떻게 할 것인가? 완전성을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데아가 없으면 당신은 애초에 생각이라는 것을 시작할 수 없다. 예컨대 소총에 대해서 썰을 풀어보자. 총에서 중요한건 뭐지? 그건 신뢰성이야. 전투 중에 총이 고장나면 패닉에 빠진다고. 전멸하는 거지. 그렇다면 AK가 짱이지. M16은 고장이 많아서 믿을 수 없다구. 이런 썰을 풀 수 있는 것이다. 자동차라도 마찬가지다. 신뢰성이 생명이다. 고속도로에서 엔진이 잠겨버리면 어쩔라구? 아냐. 디자인이 중요한 거야. 아냐. 자동차는 강성이 중요하다구. 하체가 단단하고 커브를 잘 돌아야 해. 하여간 뭐든 완전성을 기초로 이야기를 풀어가기 마련이다. 자기 자신의 이데아가 있어야 한다. 총의 이데아는 뭐다? 자동차의 이데아는 뭐다? 커피의 이데아는 뭐다? 뭐든 각자 자신의 이데아가 있는 것이며 그게 없으면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당신이 어떤 의사결정을 앞두고 있다면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이데아는 작은 개념이다. 완전성을 떠올려야 한다. 신을 떠올려야 한다. 거기서 연역적 사유를 하는 거다. 귀납은 일단 사유가 아니다. 귀납은 자료수집이다. 진짜 사유는 연역이며 연역은 이데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이데아는 완전성의 표상이 된다. 왜 우리가 신을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의사결정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인간의 이데아를 사유할 수 있다. 완전한 인간은 헥토르다. 아킬레스는 불완전하다. 헥토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약하다. 당신은 이미 불완전한 아킬레스에게 끌리고 있다. 히어로 영화만 봐도 무결점 헥토르형 히어로보다 번뇌하는 아킬레스형 히어로가 대박을 내고 있지 않은가? 히어로도 약점이 있어야 한다. 아킬레스건이다. 인간적이다. 근원의 완전성을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우주 전체의 완전성을 그것도 과거의 죽은 완전성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응답하는 살아있는 완전성을 그대는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결정적으로 그것은 있다.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 어떤 의사결정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우주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면 그 우주가 현재진행형의 사건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의사결정의 중심은 있다. 전쟁이 있다면 국가는 있다고 봐야 한다. 부족민이 전쟁을 벌이되 아직 국명을 정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단 있는 것이다. 임시정부가 타국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없다고 하면 일베충이다. 다른 사람의 인정은 인식론 관점이며 존재론 관점에서 그것은 있다. 의사결정단위가 기능하고 있다면 국가는 있는 것이다. 신은 있다. 완전성은 있다. 사건은 있다. 에너지는 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의사결정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있는 것이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나 민족이 나의 필요에 의해 있다는 말인가? 가족은? 엄마 아빠는 내가 필요해서 만들었나? 아니다. 당신이 부모를 부정해도 그것은 있다. 탄생과 동시에 헤어져서 죽는 날까지 얼굴 한 번 못봤다고 해도 그것은 있다. 그리고 끌림이 있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신이 나는 아빠도 없고 엄마도 없어 하고 부정한다 해도 어떻게든 뒤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부재면 부재로 영향을 미친다. 영향이 있으면 있다. 누구도 신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희미하게 있느냐 강렬하게 있느냐의 차이는 있다. 개미나 벼룩에게 신은 희미하다. 사건이 작기 때문이다. 우리가 큰 사건을 벌이면 신은 크게 존재하는 것이며 반면 쇄말주의에 빠져 지엽말단에 지리멸렬한 관심을 가진다면 그것은 작게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은 신의 크기만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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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입자>힘>운동>량
무질서>질서>무질서>질서>무질서
확산>수렴>확산>수렴>확산
부재>존재>부재>존재>부재
혼돈>이데아>혼돈>이데아>혼돈
인식론 - 질 힘 량 - 무질서 -확산 - 부재- 혼돈(자동차 혼자 있음)
존재론 - 입자 운동-질서 - 수렴 - 존재- 이데아(자동차도 있는데 사람도 같이 있음)
짝을 잃으면 옴니버스
짝이 되면 셰익스피어
신은 부정할 수 없다.
당신은 신의 크기만 정한다.
신을 키우려면 자존감을 높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