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로 질문을 하거나 의견을 보내오는 분이 더러 있는데 짜증나는 것은 일단 문장구성이 안 되고 있다는 거다. 주어와 목적어와 술어를 갖추지 않았다. ‘신과 1대1도 권력욕구? 통제가능성?’ 게시판에는 요렇게 써도 좋지 않은데 이메일로 질문을 한다는게 이런 식이면 패버리고 싶다. 편지를 써도 서식이 있는 것이다. 자기소개서를 쓸 때도 그딴 식으로 쓰는지 궁금하다. 워낙 글을 안 써봐서 그렇다면 변명은 되겠지만 지금부터 연습하기 바란다. 이게 되어야 다른게 된다. 글을 매끈하게 잘 쓰라는 말은 아니다. 문장을 이루려면 적어도 주어와 목적어와 술어가 제 위치에 가 있어야 한다. 전제와 진술이 호응되어 명제를 갖추어야 한다. 더하여 조건문과 반복문이 배치되어야 하는데 이건 구조론에서 하는 이야기다. 그런거 없이, 맥락이 없이, 생뚱맞게, 뜬금없이, 두서없이, 맞춤법도 안 맞게, 줄 바꾸기도 하지 않고 개판으로 써서 보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더라. 상대방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무례하게 행동하는지 모르겠다. 정조임금이 다섯 살에 쓴 편지도 인사를 제대로 차리고 있는 판에 말이다. 다섯 살 꼬마도 해내는 것을 스무 살이 넘어도 못한다면 문제가 있다. 상투적이고 형식적인 글을 쓰라는 말이 아니다. 21세기에 격식을 갖춘 인사말 따위는 없어도 된다. 그러나 최소한 읽어지게 써야 한다. 중요한건 그러다가 깨닫게 되는 거다.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알게 되면 구조론은 저절로 알게 된다. 글 안에 호흡이 있다. 소설가처럼 예쁜 글은 못 써도 호흡있는 글은 써야 한다. 대칭과 호응이 있으므로 호흡이 있는 것이다. 완전성이 있으므로 대칭과 호응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 필자의 칼럼도 글자수를 맞추고 있는 판에 말이다. 문장이 기승전결의 순서대로 가지 않고 갑자기 점프하고 그러면 안 된다. 전제 없이 진술하면 안 된다. 이게 이렇게 되어서 저게 저렇게 되었노라고 써야지 그냥 저렇습니다 하고 선언하면 안 된다. 노방전도사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대략 필자가 하는 말의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들은 특이한 예수쟁이체를 쓰더라. 예수쟁이들이 하는 말은 전제와 진술의 갖춤이 없이 선언+선언+선언으로 되어 있다. 생뚱+뜬금+엉뚱+고함으로 되어 있다. 그건 언어가 아니다. 똥이다. 문장 안에 검증 가능한 구조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문장의 기초적 형식이 제대로 갖추어졌는지만 살펴봐도 거짓말의 90퍼센트는 일단 거기서 걸러지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형식을 갖추지 않으면 필자가 읽어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전에 이야기했지만 대입실기 채점관으로 온 피아니스트는 고등학생의 연주를 딱 1초 들어준다. 2초 이상 듣지 않는다. 잘 치면 끝까지 들어주는데 이는 선발될 5명의 순서를 매기기 위함이다. 다섯 명 안에 들지 않으면 일단 들어주지를 않는 거다. 신춘문예 심사위원도 마찬가지다. 투고된 원고의 90퍼센트가 아침에 늦잠 자고 일어났는데 간밤에 마신 술의 숙취로 개고생 어쩌고라고. 읽지 않고 쓰레기통에 던진다. 원고 첫 페이지를 읽어주는게 극소수라고. 왜? 똑같거든. 똑같은 걸 왜 읽어주냐고? 일단 문장이 되어야 한다. 왜? 문장이 안되면 일단 생각을 못 한다.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의 생각을 왜 들어주느냐고? 그래서 완전성이 중요하다. 완전성의 의미는 처음부터 답을 알고 사전에 빈칸을 치고 각 포지션에 들어갈 내용을 채워넣는 것이다. 대칭성으로 사유하면 안 된다. 상대가 높다고 말하면 나는 낮다고 말하든가 하는 식으로 받아치기 수법의 말하기는 곤란하다. 그거 초딩들이나 쓰는 수법이다. 전제를 찾고, 전제의 전제를 찾고, 전제의 전제의 전제를 계속 추구하여 토대의 공유를 발견하였을 때 비로소 언어가 선다. 편지를 써도 날씨를 먼저 말하고 다음 문안을 올리고 다음 내 안부를 전한다. ‘이제 봄이 완연하군요. 형님은 건강하신지요. 저도 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수순이다. 너와 나의 공유하는 토대>상대방>나로 연결시킨 다음에 용건이 나오는 것이다. 계절의 날씨를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 순서가 있는지 생각을 해보시라. 물론 요즘은 이 순서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 고리타분한 거다. 그런데 왜 이 규칙이 동양과 서양에 공통되는지 생각을 좀 해보라는 말이다. 다 이유가 있다. 그냥 막 들이대면 안 된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어도 고향이 같다거나 혹은 취미가 같다거나 뭐라도 같은게 하나라도 발견이 되어야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데이트를 하는데 상대방이 ‘저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난 영화 싫어하는데요.’ 이런 패턴이면 대화할 수 없다. 나를 싫어하는가 보다 하고 인상 쓴다. 상대방이 질문했을 때는 나도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답변만 하면 곤란하다. 필자 역시 말주변이 없어서 그렇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질문은 절대로 안 하고 있는데 그게 좋은 버릇은 아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관심이 있다는 표시다. 궁금해서 묻는게 아니고. 너와 나의 연결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려는 것이다. 인류 중에 나만큼 생각을 많이 한 사람은 없다. 생각을 하려면 툴이 필요한데 그 툴을 가진 사람이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분야에 깊이 생각한 사람은 많을 것이다. 수학자나 물리학자라면 머리에 쥐가 나도록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근본문제에 대하여 필자가 던지는 의문들을 말한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지금 하고 있는 말도 그렇다. 사실 이거 중요한 이야기다. 그런데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간단하다. 애초에 완전하게 시작해야 한다. 문장이 완전하면 모두 이루어진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면 된다. 내용과 상관없이 형식만 갖추어도 된다. 토대를 공유하고 있는게 완전하다. 그럴 때 북은 소리가 난다. 반응하는 것이다.
에너지가 되돌아온다. 작용에 반작용한다. 에너지가 통제될 수 있다. 강약을 조절할 수 있다. 질문을 하면 답이 와야 한다. 북을 치면 소리가 나야 한다. 둘은 하나의 토대를 공유하고 있으며 묶여 있다. 그 묶여있음이 전제가 된다. 편지를 쓰든 인사를 하든 뭐를 하든 묶여있음을 먼저 제시하고 본론을 들어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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