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솔직해지자. 인간은 누구나 특별해지고 싶어 한다. 다만 남들이 욕할까봐 이러한 속내를 밝히지 못하는 것이다. ‘난 특별해.’ 이러면 남들이 비웃는다. 유태인들만 꿋꿋하게 ‘우린 특별해.’를 외치고 있다. 그런데 집시도 만만찮은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설이 있다. 히틀러는 혼혈이라는 이유로 피가 더럽다며 집시를 학살했지만 집시는 철저하게 집시와 결혼한다고 한다. 순종은 무엇이고 혼혈은 무엇인가? 특별한건 무엇인가? 왕자는 무엇이고 공주는 무엇인가? 신은 무엇인가? 이런 것을 물질의 관점에서 본다면 대화가 안 되는 것이다. 구조론은 에너지로 본다. 물질로 보면 왕자와 공주는 개소리다. 그냥 인간일 뿐이다.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겠는가? 순종도 없고 잡종도 없다. 특별한건 없다. 그러나 사건으로 보면 다르다. 세상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순종도 있고 잡종도 있다. 왕자도 있고 공주도 있다. 우리가 사건 속의 존재이며 이 이야기가 사건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물질로 보면 개미나 인간이나 차이가 없지만 사건으로 보면 개미와 인간은 다르다. 물질로 보면 인간이 개보다 나은게 없지만 사건으로 보면 진보하는건 인간이며 개는 머물러 있다. 왕자는 있다. 공주는 있다. 특별하다. 무엇이 특별한가? 대표성이다. 왕자와 공주는 타국의 왕자와 공주와 혼인하는 것이며 국가의 대표자로 역할하는 것이며 일본의 왕자가 타국의 왕자와 결혼하지 않으므로 일본 왕가는 망한 것이다. 왕실간의 국제결혼이 끊어질 때 망했다. 왕이 왕인 이유는 왕과 결혼하기 때문이다. 서민과 결혼한 이상 더 이상 왕가가 아니다. 영국왕도 네덜란드왕도 마찬가지다. 피가 더렵혀졌다. 물론 상징적인 의미다. 물론 조선왕조의 왕들은 국제결혼을 안했지만 조선왕조는 사대부가의 대표자라는 타이틀을 내걸었다. 특별하다는 것은 사건 안에서 대표한다는 거다. 축구를 한다고 치자. 11명이 선수가 한 번씩 공을 잡아본다. 그 순간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팀의 뜻대로 패스를 해야 한다. 팀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며 공을 잡은 순간 11명의 뜻을 따라야 한다. 내 기분대로 하면 김보름이다. 팀추월 경기는 팀의 뜻대로 하는게 맞다. 그것이 대표성이다. 누구든 70억 인류의 대표자라는 마음을 가지고 70억 인류가 가는 방향을 읽고 긴밀하게 호흡을 맞추어야 하며 그러한 자세가 필자가 말하는 기도이며 뭘 중얼거리라는게 아니라 로그인 상태를 유지하라는 거다. 전철에서 누군가 선로에 떨어진 것을 봤다면 지체없이 뛰어들어야 한다. 판단하면 늦다. 자동차에 불이 붙었는데 사람이 갇혀있다면 1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달려들어야 한다. 평소에 훈련해 두어야 한다. 그런 자세를 훈련하는 것이 기도이다. 그럴 때 기적은 분명 일어난다. 사건 안에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어야 특별해진다. 신과 밀당하고 있어야 특별해진다. 신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고 천하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삼아야 한다. 그럴 때 기적은 있다. 천하와 대적하려고 하고 나를 앞세우면 치인다. 박근혜 꼴이 나는 것이다. 선택하는 자의 위치에 서지 말아야 한다. 허다한 실패가 짜장이냐 짬뽕이냐 선택하려다가 일어나는 것이다. 선택권을 누리려다가 망한다. 미식가라면 이 요리에는 이 소스가 맞다고 미리 정해놓는다. 기분대로 아무 소스나 털어놓으면 안 된다. 오케스트라는 연주되고 있다. 내 기분대로 아무 시점에 들이대면 재즈다. 재즈에도 결이 있다. 맘대로 연주한다고 재즈가 되는게 아니고 납득될 수 있는 흐름 안에서라야 한다. 오케스트라에서는 지휘자의 손끝을 보고 호흡을 맞추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과연 선택할 수 없는 사건 안에 들어와 있는가? 거역할 수 없는 에너지 흐름 안에 들어와 있는가? 그것이 공주다. 공주는 국가를 대표하는 존재이므로 국민의 여망이라는 에너지 흐름을 탈출할 수 없다. 공주의 모든 행동은 국가 대표자로서의 행동이다. 공주가 되고 싶다는 것은 자신의 선택권을 반납하겠다는 것이다. 대신 커다란 전체의 에너지 흐름에 올라타려고 하는 것이다. IT산업의 발전처럼 새로운 에너지 흐름은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그 흐름에 타야 한다. 내 기분은 감추어야 한다. 작금의 미투운동도 그러한 에너지 흐름이다. 그 에너지 흐름을 미리 읽고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필자가 노자를 물리고 공자를 주장하는 것도 같다. 나는 원래 노자 스타일이고 디오게네스 스타일이다. 디오게네스는 광장에서 또라이짓을 했는데 나는 산속에 혼자 돌아다닌게 차이다. 공자가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21세기가 도덕권력이 작동하는 에너지 흐름인 것이다. 고은과 이윤택이 사고치던 시절은 히피가 준동하는 시절이었으며 광장권력이 작동하던 에너지 흐름이었다. 에너지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고은과 이윤택은 신과 대면하지 않았고 기도하지 않았고 70억 인류와 호흡을 맞추지 않았고 오케스트라 안에서 혼자 재즈를 했다. 그러면 안 된다. 재즈 타임에 재즈하는 거다. 신과 역사와 진보와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에너지를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신명에서 에너지가 나온다는 주장이 득세했다. 미친듯이 연주하고 미친듯이 퍼마시고 그러다가 꼴통을 부리는 것이다. 시인이면 작가라면 예술가라면 미친듯이 신명을 내야 한다는 말에 속아서 다들 또라이짓을 했고 김어준도 거기에 장단을 맞추었고 탁현민도 그러다가 망신당한 것이다. 홍준표는 원래 나쁜 놈이고. 신명은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니 작은 것이며 큰 진짜배기가 아니다. 구조론으로 보면 질과 입자를 거쳐 힘과 운동으로 가는 에너지 흐름이다. 우리는 부단히 질에 서야 한다. 백만 군대를 지휘하는 대장의 방법은 다른 것이다. 오히려 선택권을 버려야 한다. 선택하는 자가 되지 말라. 천하가 가는 길이 나의 길이니 선택할 수 없어 떳떳하다. 나의 야심과 기호와 흥미와 의지와 욕망이 끼어들 틈이 없다. 대부분 자신이 선택권을 얻기 위해 안철수처럼 애매한 포지션을 취하고 중간에서 진보와 보수를 경쟁시키려 한다. 그러다가 망하는 거다. 사실 중간은 필요하다. 그러나 미리 그것을 정해놓으면 안 되는 거다. 진보와 보수가 대결하다가 순간적으로 중간을 도출하는 것이다. 문재인은 언제나 중도를 가지만 미리 정해둔 중도가 아니다. 얼마전까지는 핵동결이 중도였지만 지금은 핵폐기가 중도다. 여전히 군부를 제압하지 못하고 있는 김정은의 딱한 처지를 들켜버렸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대표성이 깎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외면으로 대북제재가 먹히고 있다는 현실이 들통났기 때문이다. 내가 정하는게 아니라 천하가 정하는 것이다. 개인의 선택권을 배제해 나가는 데서 대표자의 특별함이 얻어지는 거다. 이것이 에너지를 운용하는 합당한 방법이다. 나는 반드시 진보이며 진리와 역사와 문명과 신과 자연과의 팀플레이 속에 내 개인의 선택권은 없다. 그게 종교의 기능이기도 하다. 사건 안에서의 대표성이 존재하고 에너지의 운용문제가 존재하는 한 종교와 타부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좋은 방법으로 대체될 뿐이다. 특별은 사물에 없고 사건에 있다. 왕자와 공주는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그것은 대표성이며 에너지의 운용이며 몰아주기다. 그 안에 천하로부터 주어진 미션이 있고 미션의 수행에 따른 긴밀한 호흡이 있고 사건의 다음 단계로 가며 대량복제가 있고 거대한 기적이 있다. 상대성을 버리고 절대성을 따르라. 남과 비교하는게 모든 불행의 원천이다. 특별하다는 말은 비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기는 비교되지 않는다. 아기는 특별한 존재다. 그러나 동생이 태어나면서 재난이 시작된다. 비교된다. 넌 형이잖아. 넌 큰애잖아. 모든 특권이 박탈된다. 조금 있으면 엄친아 출동이다. 대적할 수 없는 거인과의 싸움에 내몰리는 것이다. 비교되고 경쟁되고 평가되는 지옥이 펼쳐진다. 그러므로 인생의 게임에서는 누구든 패배자일 수밖에 없다. 게임에 이기는 방법은 나의 게임이 아니라 천하의 게임에 내가 대타로 뛰는 거다. 천하가 이기면 내가 이긴 셈으로 되니 패배는 절대로 없다. 천하는 언제나 승리하니까. 에너지는 언제나 전진하니까. 세상은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로 되어 있다. 에너지는 어느 한곳에 가만히 머무를 수 없다. 세상은 밸런스에 지배되지만 그 밸런스는 움직이는 밸런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