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맹이 시절이다. 내 마음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 소녀가 있었지만 고백할 수 없었다. 다가갈 수 없었다. 내 몸에서 거름냄새가 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손부터 씻어야 하는데 비누가 없다. 양치질도 해야 하는데 치약이 없다. 꾀죄죄한 몰골로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잊고 늘 하던 대로 거름이나 져나르는게 맞다. 그게 자연스럽다. 의사결정은 힘들다. 어색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움에 이르려면 스타일이 필요한데 내 스타일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나를 오해할게 뻔하기 때문이다. 거름냄새 풍기는 꼬라지는 내 진짜 모습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지만 그게 어디 말로 되는 것이겠는가? 내 스타일을 보여줘야 한다. 누구는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내게 그런 권력이 있겠는가? 사랑할 자격이 있는가? 유일한 방법은 떠나는 것이다. 상대도 나의 존재를 알고 있는 만큼 나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 환상이 깨지지 않도록. 냄새나는 녀석으로 나를 기억하지 않도록. 나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게 유일한 바람이었다. 그것은 어떤 한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다. 전반적인 것이다. 한 우주에 대한 나의 입장이며 한 하늘에 대한 나의 입장이었다. 승부하지 않을 수 없다. 환경에 대한 에너지의 우위에 서야 한다. 내가 의사결정권을 가져야 한다. 그 전에 자격을 취득해야 한다. 선할 자격은 갖추기 어렵고 악할 자격은 갖추기 쉽다. 수박서리는 쉽다. 수박이 익었을 무렵 원두막의 감시를 피해 살금살금 기어들어 가면 된다. 비 오는 날이면 더욱 좋다. 소나기를 맞아가며 수박서리 하러 오는 자가 없을 테니 원두막을 지키지도 않을 것이다. 착한 일은 어렵다. 정장을 갖추고 임해야 한다. 누군가를 돕겠다며 나의 지저분한 손을 내밀면 그는 비명을 지르고 도망칠 것이다. 실패다. 범죄의 자격획득이 더 쉽기 때문에 사람이 나쁜 길로 빠지는 것이다. 그것은 천하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다. 캐릭터다. 미리 정해놔야 한다. 나쁜 캐릭터는 만들기 쉽고 좋은 캐릭터는 만들기 어렵다. 캐릭터의 방향성이 필요하다. 일관성과 연속성이다. 일관성은 한 방향으로 계속 가는 것이다. 주변에 좋은 신호를 보내야 한다. 확실한 캐릭터를 구축하기다. 주변에 나에 대한 좋은 기억을 심어야 한다. 우호적인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인사를 잘하고 우스개도 곧잘 하고 노래도 잘 부르고 리액션도 풍부해야 한다. 그리하면 모두가 나를 좋게 볼 것이다. 쉽지 않다. 안면인식장애라서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니 인사를 할 수 없다. 말은 더듬는 편이다. 발음이 뜻대로 안 된다. 그 전에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 전에 일단 관심이 없다. 말을 붙이려고 해도 생각나는게 없다. 노래는 당연히 못한다. 주변에 좋은 인상을 주려는 나의 계획은 실패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닌데 내게는 힘든 일이었다. 아니다. 그러기가 싫었다. 친한 척을 하면 귀찮게 굴며 내 시간을 뺏을텐데. 내 시간을 뺏기지 않는게 중요했다. 하루는 24시간이다. 잠잘 시간 빼고 철학할 시간도 부족한데 남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내 시간을 할애한다구? 어림없다. 일시적으로 가능하지만 인생을 쭉 그렇게 살 수는 없다. 포기다. 연속성은 앞의 결정이 실패해도 다음 결정에 그것을 써먹을 수 있는 구조로 세팅해 가는 것이다. 도전하여 실패해도 건지는게 있다. 경험을 쌓았으니 이후로 확률을 높인다. 만화책을 봐도 거기서 얻은 지식을 써먹을 데가 있다. 물론 무협지는 꽝이다. 그건 천하에 쓸 데가 없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한 하늘을 상대하는 것이며 한 우주를 상대하는 것이니 전체적으로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에너지 우위에 서야 한다. 주도권 잡아야 한다. 내가 잘하는 것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잘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뿐이다.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며 사건은 서로 얽혀 있고 그 얽혀있는 상황 전체를 장악해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물고기를 잡으려면 먼저 물을 장악해야 한다. 미리 물과 친해 두어야 한다. 언제나 그러한 근본이 있다. 그 전체와 대결하는 것이며 전체와의 대결에서 내가 우위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전체는 분명히 있다. 존재하여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 댓글을 하나 달더라도 그 상대방 네티즌과의 승부가 아니라 인터넷 전체와의 대결인 셈이다. 인터넷 전체의 의지가 있다. 공간 전체를 장악할 뿐 아니라 시간전체까지 살펴두어야 한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간다. 미래는 큰 틀에서 결정되어 있다. 책을 읽더라도 그렇다. 지금 35페이지를 읽고 있지만 소설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우리는 2018년 페이지를 진행하고 있지만 2019페이지도 대강 정해져 있다. 세부는 확정되어 있지 않다. 큰 틀은 정해졌고 세부는 양자적으로 무한히 많은 경우의 수가 대기한다. 기적은 있다. 전체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세부를 확정해나가는 과정이 우리의 삶이다. 무신론은 일방작용이다. 상호성이 없다. 상대가 없다. 대결이 없다. 게임이 없다. 그러므로 엉뚱하게 사람과 대결하려고만 한다. 누군가 공격하면 방어한다. 언제나 수비가 될 뿐 자신이 능동적으로 일을 벌이고 사건을 조직하지는 못한다.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그 상대가 있다. 그래서 일관된 캐릭터의 구축이 가능하다. 상대와의 대결하는 전선이 그어져 있으니 피아간에 진지가 있는 것이다. 사건의 전체과정을 헤아려 전략적 대응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다만 그 상대가 수염 난 할아버지는 당연히 아니다. 신이 어떤 인격체는 아니다. 자기소개 말자. 우리가 신을 떠올리는 것은 자기 자신의 감정을 투사한 것이다. 신을 자신과 비슷한 존재로 여기면 곤란하다. 나는 사건이니 신도 사건이다. 사건과 사건이 대칭을 이루고 상호작용하는 의사결정 중심이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그것은 있다. 게이머는 프로그램과 게임하는 것이다. 한 개인과 네트워크 전체의 게임이 된다. 큰 틀은 정해져 있고 상대와 대결하면서 상호작용하여 무한히 많은 양자역학적 시나리오 중에서 세부를 확정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물의 세계는 전부가 아니다. 이면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것은 물질이 존재한다는 거다. 우주는 분명히 존재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지? 누구도 설득력 있게 말하지 못한다. 모른다. 무지를 인정해야 한다. 양자역학은 아직 정확한 답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것은 통제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주가 통제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주는 깨졌을 것이다. 어쨌든 우주는 있고 그렇다면 우주는 통제가능성이 있다. 그 말은 우리가 눈으로 목도하는 사실의 세계 이면에 우주는 한 가지 수단을 더 가지고 있다는 거다. 그것은 게임의 세계이며 상호작용의 세계다. 그래서 기적은 있다. 사건을 일으켜 배후의 존재인 신을 끌어내야 한다. 신을 성가시게 하여 괴롭혀야 한다. 신은 개미 따위에 반응하지 않는다. 당신은 개미보다 나은 존재인가? 신이 뭣하러 당신에게 반응하는가?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주가 통제가능하다는 전제, 통제되도록 모두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전제, 그 연결의 중심축이 존재한다는 전제, 그 축과 부단히 상호작용한다는 전제를 모두 충족시켜야 한다. 인간은 우연히 이토록 잘 만들어진 세상에 투척되어 있는 버려진 존재가 아니다. 세계의 중심과 부단히 상호작용하는 존재이며 상호작용의 프로토콜은 부단히 갱신되어야 하는 역동적인 존재이다. 사건을 일으키면 반드시 맞대응한다. 그것이 우주가 자기자신을 통제해 가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우주가 어엿이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겠지만 실로 희미하다. 상대방은 당신을 그저 하나의 캐릭터로만 본다. 당신의 구축해온 어떤 일관성만 바라보는 것이다. 그다지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명박을 사기꾼으로만 보듯이 말이다. 사람을 상대하는게 아니라 캐릭터를 상대한다. 당신은 스타일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신의 반응을 끌어내는 유일한 방법인 때문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상대방의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방향으로 기동하라. 일관된 캐릭터를 구축하여 당신에게 우호적인 환경을 조직하라. 하나의 사건이 다음 사건과 연결되도록 에너지의 맥을 이어가라. 안철수는 매우 노력하여 착한 사람 캐릭터를 구축했지만 나쁜 사람 인증을 받아버렸다. 그는 일관되게 가지 못했다.
왜 노력파 안철수는 착한 사람 캐릭터의 구축에 실패했는가? 왜 안철수는 본인에게 우호적인 환경을 조직하지 못했는가? 역방향으로 질주했기 때문이다. 에너지 흐름을 거슬러 기동한 것이다. 사건의 에너지원은 하나여야 한다. 그는 두 개의 에너지원을 가졌다. 아버지가 개입한 것이다. 아버지와 섞여서 캐릭터가 망한 것이다. 천하의 중심에서 작업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천하의 일을 하려면 천하에서 시작해야 한다. 천하의 반응을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천하와의 대결에서 일관성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자기 주변 사람을 포섭하는 것으로 캐릭터 구축을 시작했다. 주변과 친할수록 천하와 틀어졌다. 에너지를 쥐어짜지 못한 것이다. 주변에 좋은 인상을 주고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하여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천하로 나아간다는 계획은 역방향이라 실패한다. 천하와 사겨두었다가 천하가 그대를 필요로 할 때 천하를 도와야 한다. 천하가 민주화 사건을 벌여놓고 안철수를 불렀을 때 안철수는 응답하지 않았다. 부인과 친하는데 바빴기에 천하를 외면한 것이다. 천하와 틀어졌기 때문에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히. 세상이 그대를 불렀을 때 그대는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위치에 가 있어야 한다. 그쪽으로 일관되어야 한다. 포레스트 검프처럼 모든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이 문재인이다. 천하가 그를 불렀을 때 그는 언제나 가까이에서 대기했고 응답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
그 전체와 대결하는 것이며 전체와의 대결에서 내가 우위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전체는 분명히 있다. 존재하여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 댓글을 하나 달더라도 그 상대방 네티즌과의 승부가 아니라 인터넷 전체와의 대결인 셈이다. 인터넷 전체의 의지가 있다. 공간 전체를 장악해야 할 뿐 아니라 시간전체까지 살펴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