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고 불리우는 스스로 정한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그것은 동물적 생존본능이 만든 허상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관찰한다. 다른 사람은 너다. 너를 보고 있다가 그것을 반대하거나 혹은 추종하거나다. 의사결정은 너와 나 사이의 경계면에서 일어난다. 그 사이에 대칭원리가 숨어 있음은 물론이다. 우리는 이 수준으로 그럭저럭 호모 사피엔스 단계까지 왔다. 그런데 현대문명은 다른 거다. 너와 나를 통일하는 우리가 있고 그 우리와 대결하는 환경이 있다. 동물의 생존본능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이성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 그 ‘우리’라는 것의 실체를 파악해야 한다. 이심전심의 군중심리로, 감으로는 어렵다. 나는 부분이고 우리는 전체다. 그 전체는 가족이기도 하고 부족이기도 하고 국가이기도 하고 인류이기도 하고 우주이기도 하다. 그 정점에 신이 있다. 신의 의도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자의적인 목적에 신을 끌어들인다면 곤란하다. 나를 넘어서야 한다. 신의 목적에 내가 가담해야 한다. 그렇다면 신의 목적은 무엇인가? 정의사회 구현? 윤리와 도덕? 그런게 있을 리 없다. 정의라든가 선악이라든가 하는 것은 인간의 주관적 신념에 불과하다. 답은 게임이다. 이는 존재의 근본 속성이다. 세상은 물질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복제이며 사건은 의사결정의 연결이다. 의사결정원리는 게임과 같다. 이기는 쪽이 선택되는 비트코인의 의사결정원리 같다. 양자적 환경에서 대결하여 이기는 쪽이 선택된다. 정해져 있는 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매순간 이겨나가는 것이 답이다. 환경의 제약을 이겨내는 것이 답이다. 그것은 극한과 같아 가까워질 뿐 도달하지 못한다. 정상에 한 걸음이라도 가깝다면 이긴다. 어떻게 이기는가? 보다 합리적인 쪽이 이긴다. 그렇다면 무엇이 합리적인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의사결정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다. 컴퓨터라면 최소의 컴퓨팅 파워를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이긴다. 우리는 합리성을 오해한다. 컴퓨터처럼 정밀한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정밀한 쪽이 이긴다고 생각한다. 틀렸다. 정밀할수록 에너지 낭비다. 어차피 양자단계는 불확실하다. 드라마틱한 것이 합리적이다. 드라마는 시간 위에 펼쳐진다. 시간은 무엇이 다른가? 게임 체인지다. 적절히 게임 체인지를 하는 쪽이 이긴다. 왜? 토대를 공유하는 양자적 환경이기 때문이다. 바둑을 둔다고 치자. 내가 이겼다. 상대방이 그 수법을 배웠다. 내가 이길수록 상대방에게 기술이 넘어간다. 그러므로 이길수록 손해다. 고수는 게임체인지를 쓴다. 같은 방법으로 두 번 연속하여 두지 않는다. 우리는 피아구분의 세계에 산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너는 오토바이를 탄다. 서로 다른 토대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양자적 환경에서는 서로가 토대를 공유하므로 이기는게 지는 것이고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이기려고 할 이유가 없다. 홍준표가 작은 것을 이길수록 국민에게 밉보여서 큰 것을 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승부처에서는 이겨야 한다. 평소에 져주다가 마지막 큰 판을 이기면 된다. 세상이 박근혜 탄핵처럼 드라마틱하게 가는 이유는 사건이 시간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토대를 공유하면서 부단히 게임체인지를 하기 때문이다. 역설과 역설의 역설이다. 반전과 반전의 반전이다. 틀렸다. 에너지로 보면 일방향이다. 토대를 넓혀가는 과정일 뿐이다. 보트가 출항할 때는 하나의 노를 좌우교대로 젓는다. 왼쪽을 저으면 배가 오른쪽으로 돌고 오른쪽을 저으면 배가 왼쪽으로 돈다. 역설의 공간이다. 초보 뱃사공은 허둥대기 마련이다. 틀렸다. 게임체인지가 일어난다. 고수라면 다르다. 배가 탄력받아 어느 쪽을 젓든 상관없이 배는 일직선으로 간다. 베네치아의 곤돌라처럼 노가 한쪽으로 치우쳐서 비틀비틀 하는듯 똑바로 간다. 사공들이 달인의 경지에 올라 노를 능숙하게 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완전성을 깨달아야 한다. 부분은 결코 전체를 이기지 못한다. 이기는 결정을 하려면 완전성의 이해가 중요하다. 톱니바퀴처럼 정밀한 기계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완전성은 공간에 있지 않고 시간에 있다. 드라마에 있고 사건에 있다. 완전성은 보석의 단단함에 있지 않고 사건의 부드러운 호흡에 있다. 완전한 것은 롤렉스 시계부품이 아니라 베토벤의 음악과 같다. 호흡하는 것이 완전하다. 우리는 돈을 벌거나 명성을 얻는다는 목표를 세운다. 돈을 벌고 명성을 얻지만 완전하지 않다. 부단히 게임체인지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 누구를 패배시키게 된다. 그만큼 다친다. 토대를 빼앗기게 된다. 내가 돈을 벌면 돈이 다치고 내가 명성을 벌면 명성이 다친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이라는 지위가 다친다. 국가 시스템을 다친다. 다른 게임으로 갈아타야 한다. 그것이 드라마다. 돈과 명성은 갈아타기 위한 예비단계에 불과하다. 사랑도 행복도 쾌락도 자유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게임에 임하여 자원을 수집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얻었든지 그것은 전투를 앞두고 무기를 획득한 것에 다름 아니다. 많은 돈을 벌었다면 총알을 얻은 것이다. 진짜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언제라도 상처입는다. 미래를 알고 있는 자만이 상처 입지 않는다. 다음 단계의 게임을 알고있는 사람은 다치지 않는다. 이기고 혹은 져주면서 토대를 가꾸기 때문이다. 버릴 것을 버려야 할 때를 알기 때문이다. 버리지 않으면 그대가 파괴해놓은 토대가 돌아와서 그대를 친다. 당신이 돈을 얻으면 토대가 되는 시장이 돌아와 당신을 친다. 당신이 명성을 얻으면 토대가 되는 광장이 돌아와 당신을 친다. 박근혜가 대통령 당선을 얻으면 토대가 되는 국가시스템이 박근혜를 친다. 유시민이 명성을 얻을수록 국민은 정의당을 친다. 냉큼 다른 게임으로 갈아타지 않고 그곳에서 어물대면 반드시 당하는 거다. 신과의 대화라는 것은 혹은 기도라는 것은 혹은 기적이라는 것은 결국 미래에 대비하고 변화하는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것이다. 적절히 다음 단계의 게임으로 갈아타는 것이다. 신은 완전성의 표상이자 의사결정의 중심이다. 생태계 혹은 생물은 진화라는 하나의 방향을 가지고 있다. 우연히 진화한 것이 아니고 원래 전략이 있다. 처음부터 방향을 가지고 간다. 생물의 진화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뚜렷한 방향을 가지고 환경과의 대결에서 부단히 이겨온 기록이다. 진화는 공유하는 토대를 장악하고 넓혀온 역사다. 그러므로 게임에서 이긴다는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있다. 기린의 긴 목은 길고 짧은게 있었는데 자연선택의 결과로 긴 것이 살아남은게 아니다. 이기는 목이 있을 뿐이다. 기린은 풀과 나무로 이루어진 환경을 이겨야만 했다. 이긴다는 쪽으로 방향이 좁아지면 유전자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기린의 목의 종류는 원래 많을 수 없다. 코끼리는 코를 활용하여 수풀을 이긴다는 목표가 정해졌으므로 역시 길어질 수 있을 뿐이다. 짧아지지는 않는다. 코는 계속 길어졌을 뿐이다. 코끼리의 목표는 너무 빠르게 자라서 생태계를 단조롭게 만드는 수풀을 이기는 것이며 수풀을 짓밟기 위해 덩치를 키우고 코와 상아를 활용한다. 역시 환경을 이긴다는 목표가 있다. 신의 존재와 부재의 의미는 이기느냐 지느냐에 있다. 이기려면 신을 상대해야 한다. 신에게 복종하라는 말이 아니다. 부단히 신과 대결해야 한다. 바둑이 장기를 제압한 이유는 바둑이 더 열심히 서로를 이겨왔기 때문이다. 신은 이기는 인간을 원한다. 사람을 이길 이유는 없다. 환경을 이겨야 한다. 상대방을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고 공유하는 토대를 장악하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신을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이기려 하는 자는 치일 것이며 돈이든 명성이든 한 가지 목표를 정한 사람은 치일 것이며 토대를 이기려고 하는 자가 진정으로 이길 것이니 사공은 배를 이기고 폭풍을 이기고 마침내 바다를 이겨야 한다. 그리하여 더 큰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기지 못하는 싸움을 향해. 인간은 신을 이길 수 없지만 신은 신을 이긴다. 행복이라든가 평화라든가 인간을 위한 어떤 목적 때문에 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은 신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 다만 인간과 신을 나눌 수 없을 뿐이다. 인간은 사건 속의 존재이며 게임 속의 존재이며 거기서 탈출하지 못한다. 신과의 대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생물은 생태계를 탈출하지 못한다. 원래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인간이 신을 이겨버리면 신은 슬그머니 게임 체인지를 시도한다. 신은 반칙을 하고 판을 엎어버린다. 무리수를 두어서라도 신이 인간을 이겨버린다. 결국 인간은 진다. 그때가 인간이 신을 만나는 때다. 신의 마지막 수단을 끌어낼 때 전율함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패배지만 기쁘다.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만남이기 때문이다. |
플레이어가 개발자를 만나는 순간이로군요
신은 이기는 인간을 원한다. 사람을 이길 이유는 없다. 환경을 이겨야 한다. 상대방을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고 공유하는 토대를 장악하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이다. 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신을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이기려 하는 자는 치일 것이며 돈이든 명성이든 한 가지 목표를 정한 사람은 치일 것이며 토대를 이기려고 하는 자가 진정으로 이길 것이니 사공은 배를 이기고 폭풍을 이기고 마침내 바다를 이겨야 한다. 그리하여 더 큰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기지 못하는 싸움을 향해. 인간은 신을 이길 수 없지만 신은 신을 이긴다.
신은 독립변수고 인간은 종속변수이기 때문에 인간이 신을 초월할 수는 없지만 수평을 가질 수는 있네요.
후아...
심장 멎을 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