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를 깨달아야 깨달음이다 과학은 재현하고 자연은 복제한다. 재현되지 않으면 과학이 아니고 복제되지 않으면 자연이 아니다. 이는 어떤 알아내야 할 감추어진 요인에 의해 동일한 하나의 작업을 반복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나의 작업에 시작과 끝이 있고 이것이 단위가 된다. 그 의사결정의 단위가 모든 이론과 주장의 궁극적인 근거가 된다. 사건을 반복하는 요인이 있으며 그 요인을 알아서 인간이 통제할 수 있을 때 과학은 검증될 수 있고 자연은 그 요인을 통제함으로써 진화하고 번성할 수 있다. 그 요인은 에너지다. 인간이 알아야 할 통제가능성은 에너지의 완전성이다. 복제로 포착되고 재현으로 검증되는 자연의 완전성을 획득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우리가 사물을 분별하는 기준은 주로 덩어리 형태다. 그러나 세상이 다 고체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딱히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깊이 들어가면 형태도 분명하지 않으니 특히 양자역학이 그렇다. 모든 것이 흐릿해진다. 경계가 사라진다. 인체의 조직이라면 주로 표면적을 가진 층으로 되어 있으니 레이어다. 인체의 여러 장기나 기관들은 최대한 표면적을 획득하려고 한다. 대부분의 의사결정이 어떤 표면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신체 장기들이 겉보기로는 주머니처럼 생겼지만 내부구조로 보면 어떻게든 표면적을 확보하려고 열심이다. 허파의 폐포나 소장이 융털과 같다. 최대한 표면적을 확보해 보려고 애를 쓴 결과이다. 호박이나 호도나 밤이나 이런 것들처럼 동글동글하게 생긴 것은 자연에 잘 없다. 보기 좋고 구분하기 좋고 만지기 좋고 다루기 좋은 것은 인체에 잘 없다. 포토샵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레이어다. 인체는 여러 겹의 레이어가 적층되어 있다. 그것을 한 겹씩 들어내서 구분하여 정리하기는 참으로 골때리는 일이 된다. 지구는 햇볕과 물을 조절할 수 있는 표면을 제법 확보하고 있지만 목성이나 토성과 같은 가스행성이라면 그런거 없다. 아예 표면을 갖고 있지 않다. 그냥 푹 꺼지는 수렁이다. 우리는 운 좋게도 다루기 좋고 구분하기 좋은 동글동글한 것들을 다수 확보하고 있다. 동물은 한 마리 한 마리가 딱 구분되어 셈하기에도 좋다. 버섯의 포자나 이끼나 해조류들은 원래 뿌리가 연결되어 온통 뒤엉켜 있는데 말이다. 한 개 두 개 하고 셀 수 있는 덩어리 형태들은 자연의 근본이 아니고 어쩌다 인간에게 주어진 행운이다. 따지고 보면 한 개 두 개 하는 개별적 존재들은 인간의 관찰대상이 되는 자연존재의 모습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의 행위인 거다. 사과가 한 알씩 한 알씩 열린게 아니라 인간이 그 사과를 한 알씩 한 알씩 셈하는 것이다. 과일은 새나 포유류 동물들이 물어가기 좋게 한 알씩 열린다. 식물의 씨앗을 전파할 목적이다. 그것은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 진화의 결과이지 자연의 본래가 아니다. 흙은 그냥 쌓여져 있는데 그것을 삽으로 퍼올리면 한 삽씩 된다. 흙이 한 삽씩 퍼가기 좋게 가지런하게 정렬하여 자연에 존재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낱개로 가지런하게 되어 있다고 믿는 자연은 사실은 뒤죽박죽 반죽으로 되어 있으며 자연은 오직 복제로 말하고 인간은 오직 재현으로 말하며 강변의 자갈처럼 동글동글한 것도 있으나 그것은 자연의 일면에 불과하다. 자연의 진실은 오직 방향과 그 방향의 변화밖에 없다. 우리는 거기서 질서를 포착할 수 있다. 방향은 언제라도 확산에서 수렴으로 바뀐다. 확산이면 죄다 들러붙어서 경계가 없고 그러므로 단위가 없고 근거가 없다. 즉 인간이 그것을 지목하여 가리킬 수가 없다. 지식이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일진대 작용이 안 된다. 인간의 뇌가 손발을 도구 삼아 외부의 무언가와 접촉해서 되돌아오는 반응을 보는 건데 반응이 없다. 눈으로는 햇볕이 돌아오지 않고 귀로는 소리가 돌아오지 않고 코로는 냄새가 돌아오지 않고 입으로는 맛이 돌아오지 않고 몸으로는 감각이 돌아오지 않으니 인간은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거다. 사건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되돌아옴이다. 그것은 확산이 수렴으로 방향을 바꿀 때다. 그때 돌아온다. 눈으로는 빛이 돌아오고 귀로는 소리가 돌아오고 코로는 냄새가 돌아오고 입으로는 맛이 돌아오고 몸으로는 촉각이 돌아온다. 이에 인간은 그것을 복제하여 뇌 안에서 해석하여 재현함으로써 눈으로 보듯 알아낸다. 눈으로 본다는 것은 자연에 있는 사물을 뇌 안에서 해석하여 재현한 것이다. 우리가 자연의 소나무를 보았다면 소나무가 뇌로 들어왔겠는가? 우리는 가시광선을 해석하여 뇌 안에서 2D로 어설프게 영상을 재현하고 3D로 해석하여 대략 때려맞추는 것이며 그다지 정확한 것은 아니나 나름 쓸모가 있으니 살아갈 수 있다. 복제되는 것이다. 확산에서 수렴으로의 방향전환에 의해 인간은 복제할 수 있다. 되돌아온다는 것은 반응한다는 것이니 왕은 왕에 반응하고 거지는 거지에 반응하고 닭은 닭에 반응하고 개는 개에 잘 반응한다. 질은 질에 반응하고 입자는 입자에 반응하고 힘은 힘에 반응하고 운동은 운동에 반응하고 량은 량에 반응한다. 근본적으로 우주가 사건의 복제에 의해 작동한다는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이 온통 사건의 복제로 작동한다는 본질의 직시가 깨달음이며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전개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사건의 다음 단계 진행을 예측할 때 쓰는 것이다. 기술자가 척 보고 단번에 고장 부위를 알아채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그것은 숙달된 전문가의 지식이다. 깨달아야 할 통제가능성은 우주가 복제에 의해 작동한다는 본질에서 비롯된다. 복제된 것은 반드시 한계를 가지며 그 한계는 에너지원의 부재다. 자식은 엄마를 복제했으므로 엄마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에너지원은 사건의 바깥에만 있다. 그러므로 모든 복제된 존재는 유한하다. 복제된 존재는 제한된 존재이며 결함있는 존재이며 에너지의 제한에 의해 통제된다. 질은 외부에 에너지를 의존하며 입자는 질에 힘은 입자에 운동은 힘에 량은 운동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통제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에너지가 없으니깐. 복제는 방향전환이 촉발하며 방향전환은 열림에서 닫힘으로의 전환이다. 닫혔으므로 닫힌계 안에서 추가적인 에너지 조달이 불가능하다. 구조론은 닫힌 상태에서도 5회 에너지 조달이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조달이 안 된다. 정확히 말하면 아껴 쓰는 것이며 다른 비효율적인 구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위에 선다는 말이다. 불균일한 질과 균일한 질이 겨루면 균일한 쪽이 이긴다. 균일한 쪽이 상대적인 에너지 우위에 선다. 균일한 집단이 불균일한 집단을 이겨서 에너지를 빼앗아서 조금 연명하는 것이다. 자동차 시동이 꺼져도 관성으로 조금 더 가는 정도다. 불균일한 자동차가 갑자기 시동을 끄면 관성으로 차가 밀려가는게 아니라 깨진다. 차가 그 자리에서 박살나니 조금 더 가지 못하는 것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은 5회에 걸쳐 대칭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시동이 꺼진 자동차가 관성력을 효율적으로 조직하여 겨우 몇 미터를 더 갔다는 거다. 방향이 바뀌면 외부와 단절되고 닫힌계가 형성되며 자체에너지로 가야 하며 대칭적인 구조는 회전하는 총알처럼 직진성을 얻어 오래가고 비대칭 구조는 곧바로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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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의신 없이 흉내내는 예는 언제라도 사단, 재현해보면 금방 드러나는 것. 예는 이 모든 것이 같이 있을 때 드러나는 것. 닫힌계를 만들어보면, 그리고 닫힌계가 해제되었을 때, 양쪽 다 통털어서 살펴보면 알아지는 것. 그러니 여기서의 인지의신은 '훈련됨' 혹은 '훈련됨의 정도를 가늠하는 것'이라고 판단하는게 적합함.
그러나 복제를 깨달을 때는, 그걸 알기 어려움. 왜? 자기 행위가 미치지 못하므로. 재현때는 철학 적용해보기 바쁨. 그러나 복제를 알아차리면 가속도가 생겨서 빨라짐. 자기를 배제해야하지만, 재현시에는 자신이 현장에 있으므로 영향을 받음. 자기배제는 인간에겐 어려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기면 됨. 무엇을...? 환경을, 그리고 상황을. 그럼 자기배제가 어느정도 이루어짐.
질은 무의식과 같아서 시간성이 배제된 공간 상태안에 밀도만 올라가는 것과 같음. 닫힌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그러함. 실제의 시간과 닫힌계의 시간은 다르게 인식됨. 즉 닫힌계에서의 시간성은 닫힌계 자체적으로 측정 기준점이 생김. 이 질 상태에서는 시간성이 없기 때문에 '룰'이 필요해짐. 인위적 에너지를 투여해 주는 것임. 이 최초의 에너지 투입에 의해 밀도 에너지를 시간성 측정에 의해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임. 이 시간성 측정 기준에 의해 외부에너지를 차단할 수 있고(닫힌계 안과 밖의 기준점이 달라짐), 그 밀도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꾸면 사용할 수 있게 됨.
이 밀도에너지에 의해서, 시간성이 측정되면 그게 일하는 것임. 그리고 일로 인해 에너지변환이 이뤄지면, 운동에너지로 바뀜으로 인해서 각자에게 전달되는 것임. 에너지의 변화를 느끼는 것임. 그 변화된 에너지가 추동력을 만듦. 이리되면 복제가 일어남. 일회의 사건이 종결되어도 다른 곳에서 또 생겨나게 됨.
http://www.ibric.org/myboard/read.php?Board=news&id=290913&Page=1&SOURCE=6
여기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가는 효율적인 구조의 동물이 있네요.
자연은 layer고, 인간은 이를 사과 알갱이처럼 끊어 인식하지만 본질은 흙과 같은 연속적인 사건이며, 기타 등등. 저는 이런 내용들이 참 좋네요. 양자역학, 현대철학하고도 연결되고, 여러 영감을 줍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