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언제라도 에너지를 원한다. 긴장을 원한다. 깨어있기를 원한다. 긴밀한 상호작용을 원한다. 권력을 원한다. 지배를 원한다. 영향력을 원한다. 그리고 보상을 원한다. 이들은 하나다. 예술이 추구하는 것은 언제라도 하나다. 일원론이다. 그것은 대열의 선두에 서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집단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무리 지어 어디론가 나아간다. 대열의 선두에 서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권력이 있어야 한다.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긴밀한 관계여야 한다. 문예사조는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갔다가 리얼리즘으로 정리되고 있다. 인간들이 대체로 무식했을 때는 스승과 제자들 사이의 수준차가 컸다. 제자는 스승에게 복종해야 했다. 스승은 아는 게 많았다. 제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못했다. 중세 암흑기를 막 빠져나오던 시절 미개한 게르만족 입장에서 아랍으로부터 갑자기 쏟아져 들어온 르네상스 시대의 지식은 그들의 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학교가 생기자 달라졌다. 지식은 흔해 빠졌고 스승은 별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제자가 스승보다 많이 안다. 하극상이 만연해졌다. 인간들이 도무지 말을 들어 먹지 않으니 본질을 망각하고 기교만 늘어서 점차 매너리즘으로 흘렀다. 그들은 잔기술로 어리숙한 촌놈을 놀래켜주고 주머니를 털어갔다. 그러다가 혁명이다. 인간은 다시 진지해졌다. 왜? 스케일이 커졌기 때문이다. 혁명은 유럽세계를 하나로 통합시켰다. 이제 세계제일이 아니면 안 된다. 잔기술은 먹히지 않는다. 신고전주의다. 다시 스승들이 목에 힘을 주기 시작한 거다. 혁명은 세계의 발견이다. 정확히는 앞서가는 공무원의 나라 중국이다. 유럽은 왜 관리를 시험으로 뽑지 않고 왕이 면접 봐서 뽑지? 어리숙한 왕을 속여먹으려는 사기꾼과 모리배가 날파리처럼 달라붙는다. 이들을 제압하려면? 계몽주의다. 야매로는 까불지 말라는 거다.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왕의 친구다. 무한동력장치를 발명했다든가 혹은 연금술을 성공시켰다든가 또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대륙을 발견했다든가 하는 속임수로 왕을 꾀어보려는 잡배들은 계몽주의 지식인의 매서운 눈썰미에 나가떨어졌다. 콜롬부스도 그런 식으로 왕의 황금을 털어먹으려고 몰려온 잡배 중의 하나였는데 이상하게 성공해버린 케이스다. 혁명의 시대에는 더 이상 콜롬부스의 모험이 통하지 않는다. 가짜는 단번에 들키는 법. 세상은 다시 질서로 복귀해 갔다. 인간의 사유가 세계 단위로 커지자 질서, 균형, 절제, 논리, 정확성이 다시 강조된 것이다. 보통은 그렇게 가지 않는다. 뛰어난 장인들은 지식을 꽁꽁 감춰두고 왕과 다이다이로 쇼부치려고 한다. 승부보다는 쇼부가 더 실감나는 표현이긴 하지. 그들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일갈에 나가떨어진다. 그러나 그 흐름도 오래가지 않는다. 왜? 그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처음 지적인 충격을 받았다. 매너리즘에 빠져다가 이후 지리상의 발견에 이은 대혁명으로 다시 한번 지적인 충격을 받았다. 이번에도 오래가지는 않았으니 인간들은 금세 교만해진다. 중국? 별거 아니더만! 인종주의 시대에 제국주의 시대다. 질서? 필요없어. 균형? 필요없어! 절제? 필요없어. 논리? 필요없어. 정확성? 필요없어. 우리는 닥치는대로 해 처먹을 거야. 왜? 우리는 깡패거든. 중국? 싹죽여버려. 인도? 싹털어버려! 아메리카? 해치워버려. 지식인은 또 좌절했다. 인종주의 시대에 무슨 질서와 균형과 절제와 논리와 정확성이 필요하겠는가? 군홧발로 짓밟으면 그만. 깡패들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그래서? 낭만주의는 개인에 주목한다. 일대일로 붙으면 아직 지식이 세다. 인종차별에는 개인차별로 응수한다. 지식인들은 물랭루즈에 모여 싸구려 압생트를 마시며 아시아에서 털어온 금은보화로 탱자탱자 놀아나는 졸부들을 비웃었다. 왜? 졸부도 돈 벌면 신분상승을 꾀하기 마련이다. 그들도 뒤늦게 베토벤이나 모짜르트를 배우려고 한다. 지식인들은 졸부들의 가정교사로 채용되어 목에 힘준다. 제압해야 한다. 무엇인가? 엘리트에게는 졸부에게 없는 특별한 것이 있다. 그것은 에너지다. 그들에게는 친구가 있고 동료가 있다. 나름 세력을 갖추고 있다. 에티켓으로 때려버린다. 매너로 패버린다. 교양으로 밟아버린다. 넌 세련되지 못했어. 이 한마디면 어지간한 졸부는 음메 기죽어가 된다. 그게 낭만주의다. 낭만주의는 제국주의 시대, 인종주의 시대에 아시아를 털어서 돈을 번 깡패들에게 더 이상 지식과 논리와 질서와 균형과 절제가 먹히지 않자 그냥 힘으로 눌러버린 것이다. 배제시키고 왕따시킨다. 죽림칠현의 방법도 본질에서 같은 것이다. 죽을 때까지 술을 마신다. 혹은 거문고를 연주한다. 권력자가 총칼을 들이대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백안시다. 친구는 청안시로 사귀고 졸부는 백안시로 밟아버린다. 유럽에서는 에티켓으로 밟아버린다. 본질은 같다. 에너지의 권력이다. 돈으로는 졸부를 당하지 못한다. 그들은 베토벤과 모짜르트를 만나도 고개 빳빳이 든다. 만만한 아시아를 털어먹으면 되는데 내가 뭣하러 지식인에게 고개를 숙이지? 난 대학총장이 와도 눈도 깜짝 안 할 거야. 파렴치한 개새끼들의 시대다. 그들을 제압하는 방법은 이상과 고흐의 광기다. 그들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다. 이건 못 당한다. 죽림칠현의 우정과 오기와 패기와 충만한 자신감이다. 그러나 허무해진다. 낭만주의 끝은 허무주의. 죽림칠현도 나중에는 타락해서 벼슬했다. 일본문학처럼 고상하게 가다가 설정놀이만 하고 용두사미가 된다. 그래서 정답은? 리얼리즘이다. 리얼리즘은 왜? 사실이라는 것은 하나의 돌파구일 뿐이다. 사물의 리얼리즘과 사건의 리얼리즘이 있다. 김기덕의 판타지 리얼리즘도 있다. 만화라면 고행석 만화를 들 수 있다. 역시 판타지다. 그러나 그 안에 사실이 숨어 있다. 무엇인가? 이현세, 박봉성은 복수극이다. 허영만도 별로 다르지 않다. 이들은 수동적이다. 누가 때려줘야만 정신차린다. 가만있다가 악당에게 줘터진다. 정신차려서 노력한다. 악당을 패 죽인다. 정신차리게 해준 악당에게 절해야 하나? 악당에게 신세 갚아야 하나? 이게 다 마동탁 덕분이다? 고행석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다. 그것은 구영탄과 마구만의 인간관계다. 이들은 친구인데 나쁜 친구다. 복수극은 없다. 고행석이 드러내는 것은 인물들 서로 간의 엮여있음이다. 구영탄과 마구만과 박은하와 박달마와 구만수의 관계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다. 반면 고행석 만화의 악역들은 존재감이 없다. 박민이 악역으로 나오지만 공허하다. 긴밀하게 엮여있지 않다. 억지설정이다. 악당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납득되지 않는다. 굳이 나쁜 짓을 안 해도 되는데. 악역은 구영탄, 박은하, 마구만, 구만수, 박달마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설명하는 용도다. 일종의 나레이션 역할이다. 고행석 만화의 인물들은 니가 이렇게 나오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맞대응의 응수논리를 갖고 있으며 이들의 대응행동이 극을 끌고가는 힘이다. 복수는 없다. 이들은 강자와 약자로 얽혀 있는데 약자이면서 강자다. 구영탄은 아이큐 250이다. 만능 축구선수다. 갑이다. 박은하는 예쁘다. 갑이다. 박달마는 장인이 될 사람이다. 갑이다. 구만수는 구영탄의 아빠다. 갑이다. 이들은 모두 을이면서 갑이다. 구영탄은 눈칫밥이나 얻어먹는 불청객이다. 처음에는 철저하게 을이다. 당한다. 알고보니 구영탄이 갑인데 그것은 나중에 밝혀진다. 치사빤스한 그들의 밀당은 사실적이다. 김기덕 영화도 마찬가지다. 판타지인데 사실주의다. 주인공은 철저하게 고립되어 있다. 약자다. 악어는 물속에 산다. 한강 밖으로 나오면 죽는다. 한강다리 밑에서는 갑이다. 한강을 벗어나는 순간 철저하게 을이 된다. 내무반에서는 하느님과 동기먹지만 밖으로 나오면 아무것도 아닌 말년병장과 같다. 그냥 군바리다. 그들은 정녕 무엇을 원하는가? 동료를 원한다. 도원결의를 원한다. 의리가 지켜지기를 원한다. 엘리트는 그 세계를 모른다. 엘리트는 학벌과 인맥으로 얽혀 있으며 그것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갑자기 난처한 상황에 빠지는 일이 없다. 안전장치가 있다. 밑바닥 인생들은 다르다. 나와바리 안에서 주름잡는다. 마음껏 주름잡다가 경찰에 달려들어가면 얌전해진다. 상황에 따라서 처지가 180도로 달라진다. 그런 사실적인 체험을 우리는 김기덕 영화에서만 볼 수 있다. 그래서 리얼리즘이다. 주제넘게 깝치다가 허벌나게 깨져버리는 체험 말이다. 인생이 얼마나 위태로운 건지 똥인지 된장인지 기어이 찍어 먹어보고 알게 되는 그것 말이다. 고립된 약자가 갑이면서 을이고 을이면서 갑이며 그렇게 서로 얽혀서 자조하며 낄낄대는 게 김기덕 영화이며 고행석 만화다. 필요한 것은 의리다. 악어도 의리를 지키고 구영탄도 의리를 지킨다. 마지막에는 처절하게 동료가 된다. 그래서? 마지막에 같이 죽어줄 친구 한 명은 건진다. 왜 리얼리즘인가? 우리는 사물에 대해서는 제법 알고 있다. 아니 사물에 대해서도 내밀하게는 모른다. 사실로 들어가면 만물의 서로 얽혀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서 에너지가 나온다. 고흐는 인간 내면의 정념을 그렸다. 정념은 은폐되어 있는 사실이다. 고갱은 그냥 눈에 보이는 사실을 그렸다. 뚜쟁이 지누 부인은 딱 뚜쟁이처럼 그려준다. 왜? 뚜쟁이니까. 고흐는 마음속의 불덩어리를 그렸다. 그게 더 진짜 사실이다. 세상은 내밀하게 얽혀서 돌아가는 거다. 고갱은 표면의 사실을 보았을 뿐 얽혀있는 내면의 불덩어리를 보지 못했다. 아침 들판의 신선한 금빛을 보지 못했다. 고흐가 진작에 본 것을 고갱은 끝내 보지 못했다. 그래서 뭔가를 찾아 타이티로 갔다. 거기서 부족민의 삶에 묻어나는 어떤 생명력을 보았다. 뒤늦게 흘낏 본 정도다. 리얼은 사실이다. 사물의 사실을 볼지언정 사건의 사실을 보지 못한다. 사실로 보면 죄다 얽혀있다. 그 얽혀있음에서 에너지가 나온다. 그 에너지를 끌어내야 한다. 운명적인 만남으로 가능하다. 그럴 때 인간은 긴장한다. 섬뜩한 긴장을 그려내야 한다. 그럴 때 예술가는 대열의 선두에 서는 것이다. 전위에 선다. 앞서가는 수색대가 된다. 대책 없이 질주하는 인류문명의 불길한 조짐을 미리 읽어내는 사람이 된다. 예술가의 임무는 에너지의 결을 찾아내고 제시하는 거다. 돈이나 행복이나 성공이나 명성이나 이런 건 에너지의 자궁이 아니더라는 거다. 노가다 노무현과 특전사 문재인의 관계다. 인간에게는 마지막에 함께 죽어 줄 친구 한 명이 필요한 것. 엘리트는 모르고 부자는 모른다. 사실의 세계를. 에너지의 세계를. 엮여있음의 세계를. 고전의 질서도 아니고 낭만의 반항도 답은 아니다. 동료가 진짜다. 징기스칸에게 있었던 19명 발주나 사람들이 진짜다. 그들이 세상을 바꾼다. 그곳에 낭만을 넘어서는 진짜 낭만이 있다. 죽림칠현의 우정을 넘어서는 진짜 우정이 있다. 매너와 에티켓을 넘어서는 의리가 있다. 청안시가 있다.
|
절창이오~
외상으로 좀 써먹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