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보가 도덕과 정의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런가? 당연한 상식을 의심하는 게 구조론이다. 역사에는 필연법칙이 있다. 법칙은 자연의 질서에서 유래한다. 자연의 생명이 진화하듯이 역사도 생명성을 가지고 진화하는 것이다. 자연의 생명이 도덕이나 정의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관념론의 오류를 극복해야 한다. 과학을 숭상하는 유물론자를 자처하면서도 유독 진보주의 이념에 관해서는 허황된 관념론을 고집하는 것이 한국 진보의 병폐다. 진정한 유물론자라면 선악이니 도덕이니 정의니 평화니 사랑이니 하는 관념론의 망상을 버리고 건조하게 물 자체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
유아틱한 감상주의 버리고 쿨해져야 한다. 진보는 눈물이 아니며 더욱 사랑이 아니며 멜로가 아니다. 신파극 찍지 말라는 말이다. 그 이면에 숨은 권력적 동기를 들추어야 한다. 숨은 전제가 있다. 눈물과 사랑과 도덕과 정의로 신파극을 찍으면? 사람을 얻는다. 사람을 제압하고 지배하려는 것이다.
나는 이 나라 진보가 지나치게 권력적 동기에 매몰되어 있다고 본다. 순수하지 않다. 과학적이지 않다. 냉철하지 않다. 그들은 사이비 종교가 그러하듯이 사람을 얻을 수만 있다면 주술과 마법을 서슴지 않는다. 지금 진보가 팔고 있는 감동과 진정성과 눈물과 사랑과 평화는 주술사의 낡은 수법이다.
생물은 우여곡절 끝에 결과적으로 진보했다. 의도가 없다. 권력적 동기가 없다. 신파극 찍지 않는다. 선악도 없고, 도덕도 없고, 정의도 없고, 눈물도 없고, 감동도 없고, 사랑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보인가? 과학자들은 생물의 진화가 점점 복잡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확실히 복잡해지기는 했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 관찰이다. 통제가능성의 증대라고 말해야 한다. 생물은 그냥 내부구조가 복잡해진 것이 아니라 환경에 대응하는 수단들을 획득해온 것이다. 환경의 작용은 소리와 빛과 바람과 냄새와 물리력들이다. 소리에는 귀를, 빛에는 눈을, 바람에는 털과 깃을, 냄새에는 코를 세워서 맞선다.
자연환경의 복잡성이 그대로 생물의 신체에 반영된다. 이것이 구조주의 진화론이다. 거기에 권력적 의도는 없지만 방향과 전략은 있다. 원래 뭐든 여럿이 모이면 반드시 방향이 생겨난다. 방향은 대칭이다. 원래 둘만 모이면 그 안에 대칭이 있다. 심리적 동기는 없지만 물리적 방향은 있는 것이다.
도덕이나 정의는 인간의 심리적 동기이며 이는 권력의지를 다르게 말한 것이다. 생물의 진화에 인간의 권력의지는 없지만 집단의 통제가능성은 있다. 생물은 세포의 집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집단의 통제가능성이 진화의 방향성이다. 생물은 언제라도 세포를 통제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진화란 간단히 구조론의 질은 결합한다는 원리에 의거하여 환경에 있는 것을 그대로 복제하여 생명체 안에 내면화한 것이다. 자연환경에 어떤 것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대응하는 무엇이 있다. 생물이 진화하는 정도는 환경이 복잡한 정도에 비례한다. 역으로 생명이 무한히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
진화는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분명한 진화의 방향성이 있다. 그것은 집단적 에너지의 효율성이다. 생물의 진화는 에너지를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한다는 뜻이다. 에너지를 보다 세밀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다. 환경이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 작용을 가지고 있는 만큼 세밀하게 통제해야 한다.
그리하여? 게임에 이긴다. 진화는 에너지의 효율적인 통제로 정리된다. 다만 생물은 세포의 집합이거나 혹은 개체의 군집이거나 또는 고도화된 인간사회이거나 간에 반드시 그룹을 이루므로 집단적 효율성인 점이 각별하다. 그런데 여기서 에너지의 개별적 효율성과 집단적 효율성이 충돌한다.
게임에 이긴다는 말은 지속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며 이는 개인의 단기적 전술적 승리가 아니라 집단의 장기적 전략적 승리를 추구한다는 뜻이며 에너지 효율을 달성할 수 있는 구조를 건설한다는 뜻이다. 개인전과 단체전이다. 개인은 에너지를 아끼면 이기고 집단은 아끼는 구조를 만들면 이긴다.
그렇다면 진보의 답은 나왔다. 장기적으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정밀한 구조를 건설하는 것이 진보다. 반대로 보수는 당장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소비하는 구조다. 그냥 에너지를 아끼는 게 보수고 당장 에너지를 소비해서라도 장차 에너지를 아낄 수 있는 구조를 건설하는 게 진보다.
◎ 보수는 개인이 에너지를 절약한다.
◎ 진보는 집단이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는 구조를 건설한다.
전근대가 신이 지배하는 종교의 시대라면 근대는 휴머니즘의 시대다. 그러나 이런 건 유치한 언어사용이다. 본질은 권력이다. 전근대는 투박한 수직권력이 지배하는 시대이고 현대는 보다 세련된 수평권력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휴머니즘이란 신의 이성에 인간의 감성으로 반역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신은 이성적이고 인간은 감성적이며 휴머니즘은 뭔가 인간적으로 개판치는 거다 뭐 이런 식으로 낭만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이 많다. 뭔가 엄격하고 권위적이면 나쁘고 나사가 빠져서 해롱대면 좋은 거라는 노자 숭배자들 말이다. 얼빠진 소리다. 진지해져야 한다. 수직권력에서 수평권력으로 바뀐다.
정확하게는 여성이 남성을 통제하는 것이다. 약자가 강자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게 휴머니즘이다. 신은 강하고 인간은 약하다. 오래도록 권력은 강자에게 있다고 믿어져왔다. 신이 강하므로 신이 세상을 지배한다. 그러나 이건 그냥 꾸며낸 말이고 사실은 승부가 개인전에서 단체전으로 바뀐 것이다.
과연 권력은 강자에게 있는가? 사슬은 약한 고리에서 끊어진다. 집단과 집단의 대결에서는 집단의 구성원 중 가장 약한 구성원이 그 집단의 승패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약자에게 집단에 대한 통제권이 있다. 개인전이면 강자가 승부를 결정하지만 단체전이면 오히려 약자가 승부를 결정하게 된다.
한국과 일본이 프로야구로 대결을 벌이되 한국의 베스트 멤버 9명과 일본의 베스트 멤버 9명으로 대결하면 기량이 엇비슷하다. 한국 대표팀이 일본을 이길 때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10위팀과 일본의 10위팀이 붙으면? 백 대 빵으로 깨진다. 한국의 2군과 일본의 2군이 대결하면 게임이 안 된다.
보수가 개인전이라면 진보는 단체전이다. 가족들이 어디로 놀러갈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가족 중에서 가장 약자인 아기다. 가족은 아기가 갈 수 있는 곳으로 간다. 요즘은 한술을 더 떠서 강아지가 갈 수 있는 곳으로 가는 판이다. 전근대는 이 경우에 그 강아지를 버린다. 파리지앵들이 특히 유명하다.
피서철이 되면 강아지를 유기하고 사람끼리만 두어 달씩 바캉스를 간다고. 파리에 버려진 개가 떼로 출몰한다고. 약자를 배제하고 강자들만 의사결정을 하면 그 집단은 약한 고리를 들켜 경쟁에서 패배한다. 약한 종이 도태되듯이 권력을 세밀하게 행사하지 못하는 집단은 파멸한다. 이것이 진보다.
현대문명은 신의 지배에서 인간의 지배 곧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넘어온 것이 아니라 강자의 통제에서 약자의 통제로 넘어왔으니 개인전에서 단체전으로 넘어온 거다. 이는 동원력의 증대로 볼 수 있다. 봉건시대에 전쟁이 왕들끼리의 영웅대결게임에서 왕과 귀족의 다자대결게임으로 넘어왔다.
그리스 신화는 헤라클레스와 같은 영웅들 간의 개인기 대결이었다. 고대는 왕들의 개인전이었으니 헥토르냐 아킬레스냐 오딧세우스냐 하는 식이다. 이들은 왕이며 영웅이기도 하다. 중세는 기사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싸움을 벌이니 왕의 시대, 영웅의 시대에서 귀족의 시대, 패거리의 시대로 바뀐다.
근대에 와서 국민개병제가 정착되니 왕과 귀족에 더하여 평민의 대결로 전선이 더 확대된다. 현대는 왕과 귀족과 평민과 여성과 아기와 강아지의 대결로 동원이 보다 심화된 것이다. 더 많은 자원의 동원력 대결로 대결의 전선이 넓어졌다. 이것이 생물의 진화원리이고 또한 역사의 진보원리가 된다.
생물 역시 근육의 대결에서 근육과 뇌와 감각기관의 총체적 대결로 지평이 넓어졌다. 더 많은 수단을 사용하고 더 폭넓은 대결을 벌이는 것이다. 기사들 간의 전쟁에서 국민역량이 동원되는 국민개병제 총력전으로 넘어온 것이며 현대의 총력전에서는 그 집단의 약자가 승패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남북전쟁 때 셔먼이 조지아를 초토화한 이후 군인만 잘 싸우면 되는 시절은 지났고 국민 모두가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로 변했다. 전선이 따로 없고 모든 국민이 긴장타고 진지해야 한다. 뭐가 진보인가? 생명존중이 진보라거나 생태주의가 어떻고 고리타분한 개소리 늘어놓는다면 곤란하다.
진보는 사랑이 아니고, 눈물이 아니고, 정의가 아니고, 평화가 아니고, 도덕이 아니고, 행복이 아니다. 이런 저급한 초딩언어들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려는 즉 불순한 권력적 동기를 들키는 것이다. 사이비종교와 같다. 사람을 지배하려는 심산이다. 진실을 말하자. 합리적인 의사결정구조가 답이다.
합리적인 의사결정구조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구조의 건설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어떤 집단의 가장 약한 자가 상대집단의 가장 약한 자를 이기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약한 자가 미국의 가장 약한 자를 이길 때 우리는 진정으로 승리하게 된다.
한국에서 가장 강한 자가 미국의 가장 강한 자를 이겼다면 아직 이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전에 불과하다. 에너지의 동원력이 낮으니 현대의 총력전이 아니다. 그걸로는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 단기적으로는 강자의 기습공격으로 이길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약자의 수비력으로 이겨야 한다.
집단의 약한 고리가 강해야 한다. 질은 결합한다고 했다. 집단의 결합력에서 이겨야 진정으로 이기는 것이다. 입자는 독립한다고 했다. 입자로 이긴 것은 아직 이긴 것이 아니다. 질로 이겨야 이긴 것이다. 질은 그 집단의 가장 약한 자가 이기는 것이며 입자는 집단의 가장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다.
약자의 수단은 눈물이다. 눈물이 이겨야 이기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가 점점 약자의 기준에 맞추어진다. 그러다 보니 진보가 점점 도덕이고 정의고 평등이고 행복이고 평화이고 하며 말로 때우는 사이비종교의 판이 되어 간다. 사이비종교의 특징은 사회의 소외된 약자들을 잘 포섭한다는 점이다.
신천지와 같은 사이비집단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약하고 착하고 순박한 사람들로만 모아놨음을 알게 된다. 강하고 똑똑한 사람이 미쳤다고 사이비에 빠져들겠는가? 신천지 집단을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그때 그들은 거리를 청소하고 있었다. 사실이지 그들은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천지가 우리의 미래다 하고 말할 수 있겠는가? 현혹되지 말자. 이겨야 이긴다. 약자가 지는 건 보기에 좋지 않다. 약자가 이겨야 진짜로 이기는 것이다. 남을 위해 희생하고 강자에게 봉사하고 눈물을 씹는 것이 약자의 모습이다. 우리 모두 약자가 됩시다 하는 식이라면 미친 것이다.
약자까지 강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약자를 모아서 적들을 이겨야 한다. 진보는 이기는 것이다. 약자를 진보의 먹잇감으로 삼는 사이비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약자들만 모아서 그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비뚤어진 진보의 권력욕을 낱낱이 들추어 고발해야 한다. 진보는 강하고 그러므로 승리한다.
진보의 승리는 약자의 승리다. 약자만 모아놓고 그들을 눈물을 판매하는 방법으로 약자를 지배하면서 약자의 승리를 말로 선언하는 건 가짜 진보다. 약자들의 손에 총을 쥐여주는 것이 진짜 진보다. 칼로 싸우던 봉건시대에는 확실히 강자가 유리했다. 약자는 칼을 쥐고 휘두를 힘이 없기 때문이다.
총으로 싸우는 근대의 전쟁은 농부도 훈련하여 군인이 될 수 있다. 사무라이가 쓸만한 전사가 되려면 적어도 3년은 칼을 쥐고 훈련해야 한다. 그러나 총이 등장하자 농부도 사흘만 훈련하면 사격할 수 있게 된다. 625 때 학도병들은 아침에 소집하여 세 시간만 훈련하고 곧장 전선에 투입되었다.
미래의 전쟁은 어떤 것인가? 패션의 전쟁, 디자인의 전쟁, 감각의 전쟁, 센스의 전쟁이다. 예민한 사람이 이기고 섬세한 사람이 이긴다. 동성애자가 이성애자를 이긴다. 남자의 근육으로 이기는 게임에서 여자의 감성으로 이기는 게임으로 변한다. 눈, 코, 귀, 입, 몸이 총체적으로 뛰어나야 한다.
생물이 바람에 털로, 물리력에 뼈로, 물체에 피부로, 빛에 눈으로, 소리에 귀로, 냄새에 코로, 맛에 혀로 대응하듯이 문명은 근육의 대결에서 감각의 대결로 게임체인지를 하는 것이며 사람들은 이를 신본주의 대 인본주의로 설명하지만, 이는 소박한 접근이고 과학으로 보면 전혀 다른 것이 보인다.
수직권력에서 수평권력으로 게임체인지가 일어난다. 곧 개인전에서 단체전으로 바뀐 것이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이 수직권력이라면 부부가 서로를 지배하는 것은 수평권력이다.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고, 어린이가 어른을 지배하고, 한 명의 장애인을 위해 비장애인이 대기해야 하는 시대다.
우리는 눈물과 감동과 진정성과 평화와 정의와 도덕과 사랑과 감성과 같은 관념의 언어로 진보를 설명하려고 하지만, 이는 유아틱한 태도이며 비과학적인 언어사용이며 사이비종교가 잘 쓰는 수법이다. 과학의 언어로 갈아타야 한다. 정답은 집단의 통제가능성이며 그것은 수평권력의 작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