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 지구 땅에 초대되어 한 번 진리를 봤으면 그뿐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인간이 원하는 여러 가지는 본능으로 프로그래밍 된 디폴트 값에 불과하다. 공장에서 정해준 기본설정이다. 기쁨도, 슬픔도, 명성도, 비애도 호르몬의 장난에 불과하다. 삶은 계속되고 죽음은 내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부분은 전체를 대표한다. 30만 년 전에 사람의 모습을 갖추었고, 3만 년 전에 생각이 깨어났고, 3천 년 전에 세계를 발견했고, 3백 년 전에 자연을 지배했고, 30년 만에 지구를 파괴했으니 3년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어디서 왔고, 어디쯤 왔고, 어디를 가는지 알만하다. 중요한 것은 한사코 달려가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적어도 달려가는 동안은 살아 있다. 가지 않을 수는 없고 앞장서서 깃발 들고 가거나 코가 꿰어 뒤에서 끌려가거나인데 진리라는 이름의 등불은 길앞잡이가 들게 된다. 누군가 한 사람은 맨 앞에 서야 한다. 선두가 두렵지 않은 사람은 이 글을 읽을 자격이 있다. ### 변화가 없다면 불안하지 않다. 그러나 변화는 기어코 일어난다. 피할 수 없다. 인간은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내던져져 당황하게 된다. 어떻게든 대응해야 한다. 변화가 가만있는 인간을 흔들어댄다. 어떻게 변화에 맞설 것인가? 거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옛날 사람이 처음으로 달력을 만들어 홍수의 주기를 예측했을 때 장차 피라밋도 건설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다. 인간은 예측으로 변화에 맞선다. 예측을 가능케 하는 것은 지식이다. 지식이 인간에게 주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으로 불안을 이긴다. 변화가 밖에서 인간을 흔들어대므로 불안을 이기려면 변화 내부로 쳐들어가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객체를 장악하고 내부로 들어가면 직결된다. 내부에는 구조가 있다. 진정한 믿음은 직결로 가능하다. 진리는 객체와 인간의 직결이다. 진리가 인간을 구한다. 주변의 도움을 받는 방법도 있다. 종교는 주변의 도움을 구하는 장치다. 환경이 변하므로 불안하다. 더 큰 환경으로 옮겨가면 변화의 속도가 느려진다. 대집단에 속하면 안심된다. 양이 양떼에 숨어 늑대를 피하는 것과 같으니,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아니다. ### 변화가 인간을 불안하게 한다. 우리는 불변을 찾아 불안을 극복하려고 한다. 두 가지 불변이 있다. 하나는 이미 변한 것이다. 둘은 변화 그 자체다. 모든 것이 변해도 변화의 메커니즘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의 자궁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변화 속으로 쳐들어가서 변화를 장악하고 변화의 주인이 될 때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 자동차가 무서우면 운전을 배워야 한다. 자동차 바깥에서 얼쩡대다가 교통사고 피해를 입는다. 인간이 자동차 안으로 들어가서 진리라는 이름의 핸들을 잡아야 안심된다. 우리는 변화의 결과에 매달리는 실패를 저지르곤 한다. 이미 변했으므로 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밥이 원인이면 똥은 결과다. 밥은 변하지만 똥은 변하지 않는다. 밥을 버리고 똥으로 달려간다. 실패다. 보수가 의지하려는 것들은 변화의 결과물이다. 파도에 올라타는 방법과 바위 뒤에 숨는 방법이 있다. 변화를 장악하는 방법과 환경에 숨는 방법이 있다. 인간은 바위 뒤에 숨지만 더 큰 파도에 당한다. 능동적으로 움직여 변화를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변화하여 변화를 이기게 하는 것은 진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