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가 총을 쏘는 이유는 그것이 성소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라이터를 사라고 해서 라이터를 사지 않으면 죽이는 게임이다. 라이터를 사면 플레이어가 이기고 라이터를 사지 않으면 죽는 게임이다.
영화 속에서는 그냥 성소버그가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의미없다. 굳이 해석하자면 개구리왕자이야기에 댈 수 있다. 공주가 키스를 하면 개구리가 왕자로 변한다. 성소는 주와 하룻밤 동숙했기 때문에 인간으로 변했다.(뽀뽀라도 했겠지-했다치고) 그 때문에 인간의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근데 게임에서 이런 논리는 필요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게임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게임이란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식의 대응이 즉석에서 결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내 행동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롤플레잉게임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롤(캐릭터)을 가지고 있다. 즉 각자 자신만의 게임이 존재하는 것이다.
롤플레잉은 선문답과 비슷하다. 선문답에서의 게임은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되 상대방의 요구대로 응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즉 상대방이 요구하는 대로 하면 자신이 지는 것이 되기 때문에, 상대방의 요구대로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쫓아내거나, 두들겨패거나(방) 고함을 질러대기(할) 때문에 상대방의 요구에 응해야 하는 것이다. 즉 상대방의 게임인 것이다.
게임이라면 땅따먹기나 고스톱이거나 간에 상대방의 행위에 응해야 하면서 동시에 응하지 말아야 승리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선(먼저 룰을 정하는 사람)이 절대로 유리하다. 자신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어떤 비구니가 스님을 찾아왔다.
비구니 "말을 해라. 말하지 않으면 돌아가겠다"
스님 "저~ 어떻게 오셨습니까?"
비구니 "말하라니깐! 말하지 않으면 돌아가겠다"
여기서 게임의 규칙은 말하라는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말하라는 상대방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것이다. 즉 말은 하되 그 말이 입으로 나오는 말은 아니어야 하는 것이다. 말이 아니면 무엇일까? 행동이다. 그러므로 행동으로 말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 된다.
비구니스님은 떠나버렸다. 스님이 큰스님을 찾아가서 물었더니 큰스님은 가만이 엄지손가락 하나를 내민다. 이것이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방법이다. 스님은 즉시 깨달았다.
그때부터 스님은 이걸 써먹었는데 유명해졌다. 임제의 할(고함지르기)이나 덕산의 방(몽둥이로 패기)처럼 하나의 문파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건 그의 게임이다. 시중드는 동자가 스님으로부터 이걸 배워서 써먹는다. 누가 뭐를 시키든 간에 엄지손가락 하나를 내민다.
스님 "동자야"
동자 대답은 아니하고 엄지손가락을 내민다. 스님이 칼을 휘둘러 손가락을 잘라버린다. 순간 동자도 깨달았다.
손가락을 내미는 것은 스님의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는 상대방의 요구에 응하는 즉 패배가 된다. 비구니가 말하라고 했으므로 말하면 지는 것이다. 동자야 하고 불렀으므로 손가락을 내미는 방법으로 응답하면 지는 것이다. 즉 상대방의 행동에 대응하여 응수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행동이 상대방의 판단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이 영화는 롤플레잉게임이다. 각자는 각자의 롤(게임)을 가지고 있다. 오뎅의 게임은 불법으로 무기를 팔아먹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게임이다. 라라의 게임은 '라라 크로퍼트'를 흉내내는 것이다. 5인조의 게임은 조폭놀이를 하는 것이고 추풍낙엽은 정보를 팔아먹는 것이 그의 게임이다. 각자는 각자의 게임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인 주의 게임은 성소를 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게임의 규칙은 주가 제멋대로 정한 것이다. 원래 시스템이 안내하는 게임의 규칙에 '성소를 구출하라'는 미션은 없다. 시스템이 안내하는 게임의 규칙은 '성소를 얼어죽게 만들라'는 것이다.
주는 임의로 '성소를 구출하라'는 자기만의 게임을 만든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게임이다. 성소는 자기 게임이 없다. 성소는 플레이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주의 키스를 받고 마법이 풀린 왕자처럼 주와 하룻밤 동숙하고 성소는 플레이어가 된다. 성소의 게임은 라이터를 사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이다. 재밌다.
영화 속에서는 그냥 성소버그가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의미없다. 굳이 해석하자면 개구리왕자이야기에 댈 수 있다. 공주가 키스를 하면 개구리가 왕자로 변한다. 성소는 주와 하룻밤 동숙했기 때문에 인간으로 변했다.(뽀뽀라도 했겠지-했다치고) 그 때문에 인간의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근데 게임에서 이런 논리는 필요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게임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게임이란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식의 대응이 즉석에서 결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내 행동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롤플레잉게임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롤(캐릭터)을 가지고 있다. 즉 각자 자신만의 게임이 존재하는 것이다.
롤플레잉은 선문답과 비슷하다. 선문답에서의 게임은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되 상대방의 요구대로 응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즉 상대방이 요구하는 대로 하면 자신이 지는 것이 되기 때문에, 상대방의 요구대로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쫓아내거나, 두들겨패거나(방) 고함을 질러대기(할) 때문에 상대방의 요구에 응해야 하는 것이다. 즉 상대방의 게임인 것이다.
게임이라면 땅따먹기나 고스톱이거나 간에 상대방의 행위에 응해야 하면서 동시에 응하지 말아야 승리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선(먼저 룰을 정하는 사람)이 절대로 유리하다. 자신의 게임이기 때문이다.
어떤 비구니가 스님을 찾아왔다.
비구니 "말을 해라. 말하지 않으면 돌아가겠다"
스님 "저~ 어떻게 오셨습니까?"
비구니 "말하라니깐! 말하지 않으면 돌아가겠다"
여기서 게임의 규칙은 말하라는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말하라는 상대방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것이다. 즉 말은 하되 그 말이 입으로 나오는 말은 아니어야 하는 것이다. 말이 아니면 무엇일까? 행동이다. 그러므로 행동으로 말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 된다.
비구니스님은 떠나버렸다. 스님이 큰스님을 찾아가서 물었더니 큰스님은 가만이 엄지손가락 하나를 내민다. 이것이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방법이다. 스님은 즉시 깨달았다.
그때부터 스님은 이걸 써먹었는데 유명해졌다. 임제의 할(고함지르기)이나 덕산의 방(몽둥이로 패기)처럼 하나의 문파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건 그의 게임이다. 시중드는 동자가 스님으로부터 이걸 배워서 써먹는다. 누가 뭐를 시키든 간에 엄지손가락 하나를 내민다.
스님 "동자야"
동자 대답은 아니하고 엄지손가락을 내민다. 스님이 칼을 휘둘러 손가락을 잘라버린다. 순간 동자도 깨달았다.
손가락을 내미는 것은 스님의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는 상대방의 요구에 응하는 즉 패배가 된다. 비구니가 말하라고 했으므로 말하면 지는 것이다. 동자야 하고 불렀으므로 손가락을 내미는 방법으로 응답하면 지는 것이다. 즉 상대방의 행동에 대응하여 응수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행동이 상대방의 판단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이 영화는 롤플레잉게임이다. 각자는 각자의 롤(게임)을 가지고 있다. 오뎅의 게임은 불법으로 무기를 팔아먹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게임이다. 라라의 게임은 '라라 크로퍼트'를 흉내내는 것이다. 5인조의 게임은 조폭놀이를 하는 것이고 추풍낙엽은 정보를 팔아먹는 것이 그의 게임이다. 각자는 각자의 게임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인 주의 게임은 성소를 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게임의 규칙은 주가 제멋대로 정한 것이다. 원래 시스템이 안내하는 게임의 규칙에 '성소를 구출하라'는 미션은 없다. 시스템이 안내하는 게임의 규칙은 '성소를 얼어죽게 만들라'는 것이다.
주는 임의로 '성소를 구출하라'는 자기만의 게임을 만든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게임이다. 성소는 자기 게임이 없다. 성소는 플레이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주의 키스를 받고 마법이 풀린 왕자처럼 주와 하룻밤 동숙하고 성소는 플레이어가 된다. 성소의 게임은 라이터를 사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이다.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