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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5500 vote 0 2017.08.25 (12:22:00)

     

    반야심경 해설


    불교신도와는 대화하지 않는다. 일단 나가주시고. 말 나온 김에 반야심경도 한 번 들여다보기로 하자. 뭔 소리를 해놨나? 어제 팟캐스트에서도 잠시 언급했는데 구조론의 관점에서 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보살이 크게 깨달을 때 몸, 감각, 느낌, 마음, 의식의 비움을 보고 온갖 고통을 넘어섰다. 사리푸트라여. 몸의 채움이 비움이며, 비움이 채움이니, 감각의 채움과 비움, 느낌의 채움과 비움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채움과 비움, 의식의 채움과 비움도 마찬가지다. 사리푸트라여. 모든 존재는 비움이며,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고, 더럽거나 깨끗하지 않고,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비움으로 보면 몸의 채움도 없다. 감각과 느낌과 마음과 의식의 채움도 없으며, 눈귀코혀몸의식도 없고, 색깔, 소리, 향기, 맛, 감촉,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와 의식의 경계도 없으며, 무명과 무명의 끝과 늙고 죽음과 죽음의 끝도 없으니 12연기가 죄다 없고, 고집멸도 사성제가 다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붓다는 큰 깨달음에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도 없다. 하여간 깨닫자고.


    뭐 간단하네. 뒷부분 후렴구는 잡소리다. 산스크리트어 원문은 인도에서 특히 발달한 운율이 잘 맞춰진 일종의 음악인데 한자어로 번역하면서 원문의 아름다움이 죽었다. 그래서 아제아제 바라아제 하고 운을 맞춰서 원문의 느낌을 맛보기로 살짝 보여주는 거다.


    핵심은 인연을 깨달으면 그뿐이며 사성제, 8정도, 12연기 따위 상좌부 불교에서 발달한 유식학은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럼 진짜로 할 필요가 없냐? 없다. 그럼 공부하지 말자. 이렇게 간 것이 선종이고, 그래도 할 공부는 해야잖냐 하는 건 교종이다. 반야심경은 석가의 가르침을 송두리째 부정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베어라. 벨 수밖에 없다. 왜?


    6천 자 가까운 금강경을 260자로 압축한 것이 반야심경이다. 금강경 다 읽어봤자 별 내용이 없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한 줄로 압축된다. 반야심경은? 공空 한 단어로 압축된다. 그런데 금강경에는 그 공空이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금강은 다이아몬드라고도 하는데 무술하는 스님들이 금강저를 휘두르는 데서 보듯이 뭐든 다 빠개버리는 게 금강이다. 번뇌를 단박에 깨부숴버린다는 뜻이 있다. 단단한 존재가 금강이다.


    금강이냐 공이냐? 원자론이냐 구조론이냐? 속성론이냐 관계론이냐? 대립된다. 구조론은 속성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런데 금강은 꽤 단단하다. 뭐든 깨뜨린다. 파괴력이 있다. 서로 모순된다는 말이다. 그렇다.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정반대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베어야 한다. 그럴 마음이 있다면 더 읽어도 좋다. 반야심경이 금강경을 압축했다고? 천만에. 부정했다. 금강경 저자가 반야심경도 썼을 거다. 금강경을 쓰고 보니 이게 아니다 싶어서 반야심경을 덧붙인다. 이건 필자의 견해다. 금강은 채우고 공은 비운다.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금강이냐 공이냐 당신은 선택해야 한다.


    말하는 주체는 보살이다. 보살은 힌두교의 신들에 대응하니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에 맞서느라 아미타, 지장, 관세음이 요구된 것이다. 보살은 힌두교 신들에 대응하자는 것이고 그냥 붓다로 보면 된다. 석가모니 붓다와 헷갈리므로 보살이라 하여 구분한다. 하여간 붓다는 석가 외에도 다양하다고. 무엇보다 역사적 배경을 살펴야 한다. 


    이란과 인도의 경계가 되는 아프간에 힌두쿠시산맥이 있다. 힌두쿠시는 힌두넘들이 죽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란에서 침략해온 아리안족이 드라비다인을 노예로 잡아 힌두쿠시를 넘어가는데 더운 지방 체질인 드라비다인들이 5천 미터 산맥을 넘지 못하고 얼어 죽었다. 그때만 해도 옷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에 발가벗고 5천 미터 고개를 넘어가야 했다고 보면 된다. 아리안족과 드라비다족 사이에 전선이 그어진 것이며 반야심경은 그 아리안족의 인종주의에 맞서는 것이다.


    원래는 지수화풍 사원소설이 있었다. 이를 인간에 대응시키면 유식학이 되는데 물질, 감각, 느낌, 마음, 의식은 인간의 몸에서 영혼으로 급수를 높여가는 절차다. 몸은 물질이다. 색은 몸이자 물질이다. 감각은 맵고 짜고를 알아챈다. 느낌은 그것을 좋거나 나쁘게 느낀다. 마음은 그 외부자극에 대항하며 의식은 그 행위의 주체다. 이렇게 급수가 올라가면 브라흐만 계급이며 물질에 머무르는 자는 불가촉천민이다.


    물질에 대응하는 불가촉천민은 쫓아버리고, 감각에 대응하는 수드라 계급은 잡아다가 부려먹고, 느낌에 대응하는 바이샤는 장사를 시키고, 마음에 대응하는 자는 크샤트리아는 전쟁을 시키고, 의식에 대응하는 브라흐만 계급은 그 모든 것을 지배한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반야심경의 공은 그러한 계급의 부정이다. 


    더럽거나 깨끗하지 않다고 하면 아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구나 하고 알아들으면 초딩이다. 더러운 것은 불가촉천민이고 깨끗한 것은 브라흐만 계급이니 인종차별문제다. 오온이 공하다고 하면 아 공하구나 하고 알아들을 게 아니라 오온으로 조직된 계급제도의 타파에 나서야 한다.


    산스크리트어 원문으로 보면 드라비다족을 차별하는 용어들이 다양하게 있는데 한자로 번역하는 과정에 그 느낌이 사라졌다. 중국에는 계급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점진적인 계급의 하락이다. 옛날에는 양반이라고 하면 대접해주는 말인데 요즘은 이 양반아 하면 시비 거는 말이다. 놈이라고 하면 평민인데 상놈으로 신분이 하락했다. 아라한의 신분이 하락한 것이다. 그래서 보살 개념이 도입되었다.


    원래는 아라한이라고 하면 당연히 부처였는데 시대가 흐르면서 부처는 높이고 아라한은 낮추니 계급이 발생하여 지금은 절에를 가더라도 나한상은 볼품없게 만들어 놓았다. 석가의 제자 500 비구는 모두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 과연 그런가? 시간이 흐를수록 아라한의 지위가 낮아져서 별 볼 일 없게 된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깨달음을 얻으면 곧 부처가 되는 게 아니고 깨달음을 얻으면 다음 생에는 높은 신분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석가처럼 왕자 정도로 태어나야 진짜 부처가 된다는 말이다. 이런 식이라면 부처되기가 넘 어렵잖아. 보살은 상좌부 불교에서 유행한 계급차별을 없애고 깨달으면 바로 부처가 된다는 이론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무엇인가? 원래는 원소설에서 시작한다. 4원소설에서 오온이 나오고 유교에서는 인의예지로 갔다가 신을 추가하여 5상이 된다. 물질에서 정신으로 넘어오는 것이며 서양에서는 독특하게 2분법으로 가는데 처음에는 역시 4원소설을 밀다가 육체와 정신, 물질과 영혼, 껍질과 알맹이, 하느님과 사탄으로 계급을 단순화한다.


  동양은 4원소설이나 오행설에서 불교의 오온 혹은 유교의 오상으로 가는 것이니 물질계급에서 영혼계급으로 갈아타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그러한 계급설정이 죄다 구라이니 믿을 거 없다는 말씀이 되겠다. 


    채움과 비움은 다르다. 금강은 채움이고 공은 비움이니 색과 공은 다르다. 같다고 말하는 것은 계급이 같다는 말이니 귀족과 평민을 차별하지 말라는 말이다. 비움에서 채움이 일어나고 채움은 비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는 현역은 예비역이 되고 예비역도 현역에서 왔다는 말이다. 총각이 아저씨가 되나 아저씨는 총각이 되지 않는다. 아저씨나 총각이나 계급차별 하지 말라는 말이다. 금강경의 핵심사상은 인연이다.


    그런데 인연에도 급수가 있다. 성문승이니 연각승이니 보살승이니 하는 계급이 발생한 것이다. 이들을 일승으로 통일하자는 것이 보살개념이다. 재가불자들이 들고일어나서 부파불교의 파벌주의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도입된 개념이다.


    어쨌든 구조론은 마이너스고 마이너스는 비움이니 채움이 아니다. 공이 금강보다 낫다. 원래 이런 건 역사적 맥락을 살피지 않으면 진의를 알기 어렵다. 당시 상좌부 중심으로 부파불교가 유행했고 이들은 극도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때 통합을 주장하며 재가불자들이 나섰다.


    대승은 재가신도 중심의 분열된 불교 통합운동이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그러한 상좌부불교의 번다한 주장을 낱낱이 격파하고 있다. 중국어로 번역되면서 그러한 본질이 은폐되었다. 정치투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00.jpg


[레벨:9]Quantum

2017.08.25 (16:46:35)

비우면서 상호작용을 늘리다보면 또 채워지고,

그래서 또 새로운 상호작용, 더 발달된 상호작용을 늘리면서 비우다보면 어느새 또 채워지고,

그렇게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채우는 것에 만족해서 배불리 있다보면 그 상태로 멈춰버리거나 고정되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위에 지대효과, 신촌, 홍대 이야기 보고 느낀 것이 있어서 적어봅니다.


지대효과 좋다고 신촌에서 부른 배 두드리면서 있다보면 거기서 멈추게 되고,

계속 밖으로 나아가고 링크를 만들고 상호작용하고 외부와 연결하고 이러다보면

더 큰 결과가 채워지고 그런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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