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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3338 vote 0 2017.08.01 (22:48:46)

     

    위하여와 의하여


    구조론의 출발점은 인간의 언어감각이다. 언어는 사건을 반영한다. 사건은 원인과 결과가 있으니 곧 메커니즘이다. 언어는 주어와 술어가 있으니 역시 메커니즘이다. 사건은 언제나 원인측이 결과보다 크다. 사건을 끌고 가는 에너지가 원인측에 태워져 있기 때문이다. 언어 역시 주어가 술어보다 커야 한다.


    새가 난다고 하면 새는 전체이고 난다는 어떤 시공간적 지점이다. 여기에 방향성이 있다. 방향성이 맞으면 자연스러움을 느끼고 방향성이 어긋나면 위화감을 느낀다. 어색함이다. 어폐가 있다는 말이다. 그 느낌을 근거로 삼아 직관력으로 판단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인간의 언어와 자연의 사건을 일치시킨다.


    우리는 언어를 잘못 사용한다. 언어 안의 메커니즘을 모른다. 사건 안의 메커니즘도 모른다. 필자가 사용하는 방법을 쓰는 사람이 없더라. 그래서 구조론을 만들었다. 깨달아야 한다. 필자는 배워서 아는 게 아니고 나면서 알았기에 깨달음이라고 한다. 훈련하여 언어감각으로 3초 안에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 숨은 전제를 찾아라.
    자기소개 하지 말라.
    A면 B다.
    맥락을 따라가야 한다.
    위하여가 아니라 의하여이다.
    정신주의를 극복하라.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답을 찾아라.
    에너지의 결을 따르라.
    대표성에 주의하라.
    담론>명제>주어>명사>동사


    언어는 전제와 진술로 조직된다. 무엇보다 전제를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경우 전제를 숨긴다. 숨은 전제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대개 인간의 주의가 진술쪽으로 쏠리기 때문이다. 자로 물체의 길이를 잰다면 자가 전제고 물체가 진술이다. 인간은 턱없이 자를 신뢰하고 물체 쪽만 주목한다.


    언어는 대칭을 따라 링크를 연결하여 가는 것인데 연결되는 둘 중에서 앞쪽은 무시하고 뒷쪽만 본다. 자와 물체를 동시에 판단하기에는 인간의 뇌용량이 못 따라가기 때문이다. .마술사의 간단한 속임수가 먹히는 이유는 관객이 마술사의 손끝을 주목할 뿐 반대쪽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링크다.


    링크를 따라가기 바쁘다. 인간의 눈동자는 두 개지만 초점이 하나라서 한 쪽만 본다. 항상 전제를 의심하고 반대쪽을 살피는 훈련을 해야 한다. 영화가 재미없다고 말하면 어떨까? 영화는 당연히 재미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것이다. 대중영합적인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전제다. 과연 그런가? 


    재미와 작품성과 주제의식은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다. 인간은 그중에서 동료와 합의하기 좋은 것만 주목한다. 다른 사람에게 정보를 전달하여 관계를 좋게 하려는 의욕 때문이다. 순수하게 영화 그 자체를 즐기지 않고 그 영화 재밌더라 너도 그 영화 봤니? 하고 친구와 수다를 떨 목적으로 영화를 고른다. 


    수다꺼리를 제공하는 영화만 찾는다. 재미는 다른 사람과 쉽게 합의된다. 작품성은 전문가에게 물어봐야 한다. 작품성 위주로 가면 친구와의 대화가 어색해진다. 그래 너 잘났어. 흥 별꼴이야. 이런 반응이 온다. 분위기 깰 일 있는가? 주변의 눈치를 보고 분위기를 살리려고 하므로 쉬운 목표를 찾게 된다. 


    지식인이라면 애써 어려운 목표에 도전해야 한다. 재미는 누구나 느끼는 것이고 작품성과 주제의식을 토론해야 뇌의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다. 그럴 때 전광석화같은 전율이 있다. 페북에 올릴 목적으로 영화 고르는 사람과는 절교하라. 함께 보기 무난한 영화만 고르니 천만관객 시대에 충무로 망한다.


    인간은 쉬운 목표를 쫓으므로 노리개를 향해 달려드는 고양이처럼 바보짓을 하게 된다. 쉬운 것은 자기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자기소개 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진술이 전제를 치는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다. 예컨대 짜장면에 대해 논한다고 치자. 난 짜장이 좋더라 하고 자신을 사건에 개입시키게 된다.


    짜장소개가 아니라 자기소개다. 지식인은 자신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말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초딩일기처럼 첫 줄에 나는 오늘 오면 망한다. 신춘문예 심사하면 첫줄에 어제 마신 술의 숙취로 시계가 열시가 넘어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어쩌구 하고 써놨다. 첫 페이지도 안 보고 쓰레기통행이다.   


    그런데 들어온 원고의 반은 이렇다고. 수준미달이다. 내가 어떻게 느꼈다거나 하는 식으로 개인의 주관적인 감상을 논리의 근거로 삼으면 곤란하다. 개인의 감상을 배제하고 건조하게 물物 자체에 내재한 논리를 따라야 한다. 바라보는 시선이 여전히 나에 잡혀 있는 유아틱한 태도 자체로 자격이 없다. 


    짜장을 논한다면 짜장에는 단무지가 어울린다거나 하는 식의 짜장 자체에 내재한 메커니즘을 끌어내야 한다. 여기에 A면 B다의 규칙이 작동한다. 어떤 것이든 그 주어진 대상 안에서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메커니즘을 포착할 수 있다. 그것이 맥락이다. 맥락을 포착하고 따라가야 한다.


    지식인과 비지식인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있다. 누구든 3분만 대화하면 수준을 들킨다. 어떤 주장이든 내가 어떻게 느꼈다 하며 자기를 끌어들이면 초딩이다. 그런 수준 떨어지는 사람과 상종하지 말자. 지식인은 기본적으로 사건의 맥락을 이어가는 객관적 말하기가 훈련되어야만 한다.


    의하여인가 위하여인가? 여기서 맥락이 판별된다. 정신주의를 피해야 한다. 사람을 개입시키면 안 된다. 건조하게 물物 자체의 내재한 규칙성을 따라가야 한다. 어떤 인위적인 목적이나 의도, 야망, 음모, 계획, 충성, 애국, 정신력과 같은 심리주의적 표현을 근거로 삼으면 곤란하다. 개소리다. 그거 어색하다.


    태연하게 무협지를 읽어대는 사람도 있다. 부끄러운줄 알아야 한다. 김용의 사조영웅전을 압축하면 나는 바본뎅 너도 바보넹 우리 둘 다 바보넹 바보와 바보가 죽이 맞넹 ㅎㅎㅎ. 이렇다. 창피함을 느껴야 한다. 작가는 독자를 모욕하고 있다. 왜 무협지가 문제인가? 무협지 인물은 주변환경과 관계가 없다.


    예컨대 무사가 칼을 휘두른다고 치자. 공기의 밀도까지 고려해야 한다. 공기가 건조한가 습한가에 따라 들리는 소리가 다른 거다. 날랜 무사라면 주변환경과 긴밀히 관계를 맺고 있으며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협지의 인물은 뭐 그런 거 없다.


    왜? 주변이 어떠면 내공을 올리면 된다. 금강불괴로 설정하면 된다. 내공을 60갑자에서 70갑자로 올리면 된다. 무협지의 모든 인물은 주변환경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으며 모든 등장인물은 고립되어 있다.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다. 맥락이 연결되지 않는다. A면 B가 아니라 A든 B든 아무 상관없다.


    이런 건 쓰레기다. 쓰레기를 넘어 그 이상이다. 이발소 그림의 가치는? 0이 아니라 마이너스다. 그런 그림을 집에 걸어놓으면 주인의 평판이 깎이고 위신이 추락하고 지인들로부터 비웃음을 산다. 신뢰를 잃게 된다. 무협지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매우 해로운 거다. 이발소 그림 역시 맥락이 없다.


    한 폭의 그림 안에 밤과 낮이 공존하고,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공존하고, 산과 바다와 절벽과 폭포와 등대와 호수가 공존한다. 밤이면 낮은 아니어야 하고, 봄이면 가을이 아니어야 하는데 이발소그림은 맥락을 무시하므로 그런 점에 신경쓰지 않는다. 나는 바보입니다 하고 써붙여두는 게 차라리 낫다.


    맥락은 환경과의 긴밀한 관계에 있다. 인간은 환경에 반응하는 존재다. 이렇게 가면 환경결정론이다. 단 상호작용한다는 점이 다르다. 일방적으로 환경이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게임의 법칙 때문이다. 인간은 게임을 선택할 수 있다. 누가 내편이고 누가 적인지 내가 임의로 결정할 수 있다.


    친엄마가 내편인지 양엄마가 내편인지는 내가 정한다. 친부모를 따라야 한다거나 양부모를 따라야 한다거나 하고 강제할 수 없다. 그러나 결 따라가야 한다. 게임 안에서 기를 선택하면 승과 전과 결까지 자동으로 진행하게 되며 달리는 기차 안에서 임의로 내릴 수 없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져야 한다.


    인간은 결 따라 간다. 결은 상부구조인 집단에서 나온다. 답은 집단의의사결정구조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의사결정을 상부구조인 집단에 떠넘기려고 한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그 결과는 어그로를 끌어 집단을 개입시키는 것이다. 소동을 피우고 마녀사냥을 벌여 개인의 문제를 집단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그러나 집단은 의사결정의 난맥상을 드러낸다. 결국 의사결정하기 편한대로 의사결정한다. 에너지의 결에 천착해야 한다. 기에서 일어서면 승과 전과 결로 가면서 상승효과나 시너지효과, 후방효과가 작동한다. 그것이 결 따라 가는 것이다. 어떤 한 가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 잉여에너지를 남기게 된다.


    그 에너지로 다음 사건을 격발한다. 정답은 장기전이며 전면전이며 팀플레이다. 외교에 답이 있다. 예비자원의 활용과 배후지 확보, 신대륙에서 답을 찾는 게 맞다. 그 안에 가속도가 보여야 한다. 기승전결의 다음 단계로 흐름을 이어가는게 가속도다. 궁극적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집단의 대표성이다.


    인간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은 출세와 명성과 돈과 권력을 탐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자기도 모르게 집단을 대표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뇌가 긴장한다. 심장이 쫄깃해진다. 한사코 새누리당을 찍는 것은 하층민의 의사를 대표하려는 심리 때문이다. 대칭구조를 만들어놓고 자신은 빠지려 한다.


    민중은 투표를 통해 어떤 정치적 의사결정을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결정하는 구조를 만든다. 그 방법은 진보와 보수, 엘리트와 하층민의 대결구도를 조직하는 것이며 그 방법으로 자신의 소속집단을 대표하고 리더에게 위임하려 하는 것이다. 지지하는 후보를 찍는 게 아니다. 사실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다.


    투표를 통해 내가 누구를 대표해야 하는지를 거꾸로 질문한다. 하층민은 자신이 누구를 대표해야 하는지 투표과정을 통해 국가에게 질문하려는 것이며 그 결과는 보수정당 후보의 당선이다. 의사결정 스트레스 때문이다. 의사결정 회피심리다. 그 지점에서 민주주의는 죽는다. 그러므로 이를 역이용해야 한다.


    하층민이 내가 누구를 대표해야 하는지를 질문하는 것은 관계가 느슨하기 때문이다. 진보는 정치와 국민의 관계를 긴밀하게 조직하는 방법으로 하층민의 보수심리를 극복할 수 있다. 집단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촛불을 통해 국민은 관계의 존재를 처음으로 포착했다. 더 긴밀해져야 한다.


    지구가 둥글다는 식의 언술은 황당하다. A면 B다의 논리규칙을 따라야 한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지구의 중심점 한 점에 의해 전체가 대표된다는 것이고 이는 외력의 작용을 받는다는 것이고 외력 역시 한 점에 의해 대표된다는 것이며 그것은 둘이 대칭된다는 것이다. 둘은 에너지로 서로 엮여 있는 거다.


    우리는 참 쉽게 말해버린다. 지구가 둥글대. 이 얼마나 안이한가? 긴장 타자. 진지해져야 한다. 돌아가는 팽이는 지구중력과 일대일로 맞선다. 팽이의 중심축이 도출된다. 축은 원래 없는데 회전에 의해서 축을 도출하고 있다. 계에 에너지가 걸려 있는 것이다. 에너지의 방향은 확산방향에서 수렴방향이다.


    구조의 복제가 일어난다. 두 물체 사이의 에너지 얽힘이 복제하여 한 물체 안의 내적 얽힘으로 복제된다. 그냥 관측해봤더니 지구가 둥글구나 하는 건 이론이 될 수 없다. A면 B다. 기면 승이고, 승이면 전이고, 전이면 결이다. 지구가 둥글면 내부에 에너지의 축이 조직되어 있는 것이다. 축에 대해 균일하다.


    원이든 구든 축으로부터 같은 거리의 점들의 집합이다. 축에 대해 거리가 균일해진 것이며 그러한 균일은 축을 이루는 일점에 의해 계 전체가 외력에 대해 대표되는 것이며 그 외력과 대칭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냥 지구가 둥글다 하고 끝내도 되는 간단한 사안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구는 왜 둥글지?


    외부에서 흔들어대니까 그런 거다. 왜 흔들지? 엮였기 때문이다. 왜 얽혔지? 에너지 방향이 수렴방향이기 때문이다. 왜 수렴방향이지? 이렇게 계속 추궁해 들어가면 빅뱅까지 간다. 에너지가 원래 물레방아 모양으로 확산을 수렴으로 바꾸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결국 에너지의 구조를 복제한 거다.


    그런 식으로 계속 맥락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냥 지구둥글론하고 끝나는게 아니라 보편적인 원리인 중력의 얽힘을 발견할 때까지 언어는 자체 관성으로 계속 가야 한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언어를 배워야 한다. 언어의 완성된 형태를 사전에 알고가야 맥락을 따라갈 수 있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그것은 조건문과 반복문이 합쳐진 담론에서 전제와 진술이 이어진 명제로, 그리고 문장 안의 주어로, 명사로, 동사로 계속 이어가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의하여는 맞고 위하여는 틀렸다. 의하여는 전체에서 부분의 순방향이고 위하여는 부분에서 전체의 역방향이다. 의하여는 외부환경과 관계가 긴밀하다.


    위하여는 그냥 내부의 마음이다. 고립되고 단절된다. 따로 논다. A면 B다의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다. 영화라면 끝까지 살아남겠어, 복수를 하고 말겠어, 사랑을 쟁취하겠어 하고 목적이나 신념이나 야망을 위하여로 제출하지만 거짓말이다.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환경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그 톱니바퀴가 물고가는 에너지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 전쟁이면 조국에 충성하겠어 혹은 전우를 살려내겠어 혹은 끝까지 살아남겠어 하는 의도나 목적이나 야망이 아니라 곧 위하여가 아니라 전쟁은 무수한 약속으로 되어 있고 그 약속이 연결되는 맥을 따라가는 것이며 약속이 깨지면 의사결정을 못한다.


    의사결정 못하면 군중이 패닉에 빠지고 오합지졸로 흩어져 단번에 학살당한다. 군인은 집단의 의사결정이 가능한 방향으로 간다. 의사결정 잘하는 훈련된 군대가 이기고 애국심만 내세우는 동학농민군은 이기지 못한다. 정신력 내세우는 십자군도 투르크를 이기지 못한다. 의사결정능력이 처지기 때문이다.


    좌군과 중군과 우군과 선봉대와 후발대 간에 복잡하게 약속이 정해져 있으며 서로 간에 손발이 맞아야 한다. 패스가 끈김없이 연결되어야 한다. 투수가 던지면 포수가 받고 외야수와 내야수가 땅볼과 플라이볼에 대비한다. 이런 흐름이 물 흐르듯 이어질 때 인간은 강해진다. 잔다르크가 이 원리를 알았다.


    약속을 연결시키려면 용감한 공격밖에 답이 없다. 공격할 때는 모이고, 모이면 쉽게 손발이 맞으므로 공격일변도로 가는 것이다. 수비로 약속을 지키려면 미리 신호를 정해서 훈련해 두어야 하는데 잔다르크가 급하게 불러모은 농민군들은 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 스트레스가 인간을 죽인다.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대오를 이탈하여 혼자 용맹하게 공격하다 전사하여 동료를 위험에 빠뜨린다. 대오가 깨지면 약한 고리가 발생하여 종심을 돌파당하고 전멸한다. 인간은 스트레스로 비겁해지는 게 아니라 반대로 스트레스로 용맹해져서 오바하다가 되레 전멸하는 것이다. 침착하게 약속을 지켜야 한다.


    약속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 때 인간은 불구덩이속으로도 뛰어드는 존재다. 무섭지 않다. 단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군기가 개판이고 동료를 믿을 수 없고, 아군의 오인사격이 거듭되고, 밥차가 오지 않고, 임무교대가 되지 않고, 예비부대가 도착하지 않고 이웃한 부대와 연결이 끊어져 고립되었다면?


    혼자 고립되었다는 느낌이 들면 붕괴된다. 그런 긴밀한 상호작용에 의하여, 에너지 흐름에 의하여, 손발이 척척 맞아지고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는 그런 생명성의 유기적인 호흡에 의하여 인간은 사기백배 용맹하게 전투하는 것이며 이에 최선은 침착함이다. 이것이 진짜다. 인간은 의도하는 동물이 아니다.


    이성과 합리성은 인간의 본성과 거리가 멀다. 인간은 사촌인 원숭이에서 멀리 떠나오지 않았다. 인간은 결코 야망이나 신념이나 의지나 희망이나 애국이나 사랑이나 이런 심리적 요소에 지배되는 동물이 아니다. 그 반대다. 약속이 지켜질 때, 팀플레이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때 인간은 강해지는 것이다.


    그것을 애국이니 희망이니 사랑이니 정신력이니 하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인간은 정신력으로 강해지는게 아니다. 긴밀해져서 강력해진 것이 정신력으로 표출된다. 사건도 마찬가지고 언어도 마찬가지다. 강한가? 긴밀한가? 맞물려 돌아가는가? 상호작용 원할한가? 피드백이 넉넉하고 에너지가 넘치는가?


    방향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집단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면 에너지가 태워져 있다는 증거다. 언어에서 출발해야 한다. 문맥의 자연스러움과 어색함으로 1초 만에 판단한다. 의하여면 맞고 위하여면 틀렸다. 환경과의 긴밀한 상호작용과 피드백 관계에서 찾으면 맞고 내부적인 심리에서 찾으면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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