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 교육론 과학기술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이모양 이꼴인 것은 철학의 낙후 때문이다. 온갖 주의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전 방위로 교착되어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과 같다. 20세기에 철학은 실패했다. 70억 숫자를 감당하기에는 허약하다. 그리고 이제 21세기다. 마땅히 역사의 새로운 도전과 응전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철학가의 견해라는 것들이 한낱 단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단어 하나 가지고 어쩌려고? 인류의 언어체계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깨우침이 필자가 구조론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문제의 답을 찾으려고 하지만 진정한 답은 어떤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을 전달하는 도구인 언어의 개혁에 있다. 좋은 것을 봤더라도 그것을 주워담을 자루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우리는 무엇에 진리를 담아 전달할 것인가? 언어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수학을 예로 들 수 있다. 인류의 진보는 거의 수학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류의 한계는 수학의 한계와 맞물려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수학의 자궁은 무엇인가? 그것이 구조다. 구조는 대상이 아닌 관계를 본다. 수학은 자로 길이를 재서 사물의 크기를 계측한다. 관측자와 관측대상이 나누어져 있다. 구조는 관측자와 관측대상 사이의 관계를 본다. 구조론의 세계에서 관측자와 관측대상은 에너지를 타고 가는 하나의 사건으로 통합된다. 우리는 이것과 저것에 대하여 말하지만 답은 이것과 저것 사이에 있다. 이것과 저것에 대하면 대칭되고 대칭되면 틀렸다. 답은 이곳에 없고 저곳에도 없다. 진보에 없고 보수에 없다. 일원에 없고 이원에 없다. 합리에 없고 경험에 없다. 진화에 없고 창조에 없다. 원인에 없고 결과에 없다. 인간에 의해 지목되어 가리켜지는 것에는 답이 없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풍선효과와 같다. 이쪽에서 사라진 것은 저쪽으로 옮겨가 있다. 답은 이것과 저것 사이의 관계다. 그것이 구조다.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에너지 과정을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소금이 짜고 설탕이 달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분자의 화학적 성질은 원자와 전자의 간격에 있는 것이다. 성질을 결정하는 간격은 대상에 없고 사이에 있다. 돌멩이의 성질을 결정하는 무게는 지구와 돌멩이 사이에 있다. 그것이 중력이다. 사건 안에서 에너지가 작동하고 있으므로 관계는 변한다. 답은 그 변화의 방향과 순서에 있다. 그것을 지시하는 언어가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어떤 대상 내부에 고착되어 있는 답을 찾으려고 하면 양파껍질을 까는 실패를 저지르게 된다. 양파껍질을 계속 까면 남는 것이 없다. 틀렸다. 껍질들의 방향과 순서가 있다. 구조는 대칭된 둘 사이의 방향과 순서다. 여기서 상대성의 순환논리는 절대성의 일방향성으로 도약하고 진정한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둘이 맞서는 상대성에서 셋이 엮이는 절대성으로 올라서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 세계를 바라보는 올바른 눈과 그 내막을 전달할 언어가 필요하다. 깨달아야 한다. 인간에게 관측되는 대상 내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측하는 주체인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이 비뚤어져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인간의 언어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비뚤어진 관점을 바로잡는 것이 깨달음이라면 높은 수준의 언어로 도약하는 것이 구조론이다. 철학자들은 아는척 하며 본질과 현상, 형식과 내용, 원인과 결과, 가능과 현실, 진보와 보수에 대해서 한 마디씩 던지고 있지만 바보다. 왜 사이를 보지 않는가? 이들은 대칭되어 있다. 왜 대칭을 이루지? 왜 이 부분을 탐색하지 않을까? 왜 본질과 현상 사이, 형식과 내용 사이, 원인과 결과 사이, 가능과 현실 사이, 진보와 보수 사이를 말하지 않는가? 왜 그것이 하나의 사건에 속한 머리와 꼬리임을 깨닫지 못하는가? 사건 안에서 둘은 한 몸이고 에너지의 차이가 방향성을 결정한다는 진실 말이다. 에너지를 통제할 때 문제는 진정으로 해결되는 법이다. 어떤 대칭되어 상대성을 이루는 둘에는 반드시 둘을 통일하는 사건 하나가 엮여서 절대성을 이루고 있다. 그 사건의 존재를 포착하는가이다. 어떤 것이 움직이면 외부의 관측자에게는 둘로 보인다. 그러므로 어떤 둘이 대칭되어 있다면 반드시 둘을 통일하는 것이 있다. 둘이 하나를 공유하고 있다. 그 하나를 찾았을 때 그것은 통제된다. 그것이 우리가 찾고자 하는 답이다. 하나의 사건을 끌고 가는 에너지의 방향과 순서가 답이다. 방향과 순서를 적절히 바꿔주면 문제는 해결된다. 철학자들은 대립되는 둘 중에서 하나를 지지하고 다른 것을 배척하면서 열을 올리지만 어리석다. 둘은 하나이므로 교통정리가 중요하다. 빛과 그림자는 하나다. 빛 입자는 있어도 그림자 입자는 없다. 흑과 백의 대칭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빛이 스크린에 투영되면서 밝기차이를 가지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근본을 반영하는 언어가 없다는 점이다. 모든 것은 언어에서 시작되었다. 인류가 언어를 얻으면서 동물의 한계를 벗어났고 수학언어를 얻어 근대문명을 일으켰다면 이제 사건을 해명하고 에너지를 디자인하는 구조언어로 갈아타야 한다. 사물의 한계에서 사건의 지평으로 도약해야 한다. 이항대립적 사고의 교착상태에 따른 난맥상을 극복하고 사건과 에너지와 관계의 일원성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그대가 여기까지 납득했다면 다음 페이지로 초대한다. 납득하지 못했다면 얼른 꺼지기 바란다. |
구조론 제자의 의미 구조론의 교육법은 다르다. 진정한 교육은 지식을 익히는 것이 아니다. 구조론의 방법은 커다란 사건에 올라타는 것이다. 거센 에너지의 흐름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새는 바람을 타고 가고, 물고기는 물결을 타고 가고, 인간은 문명을 타고 간다. 자신을 흐르는 강물 속으로 빠뜨려야 한다. 그리고 물살의 흐름에 적응해야 한다.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 우주가 격발된 것이다. 37억 년 전에 처음으로 생명체가 탄생했다. 지구에서 일어난 일이다. 1만5천 년 전에 인류문명의 격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21세기에 이르러 또 다른 시작된다. 위대한 도약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70억 인류가 지식을 공유하며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호흡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배가 항구를 떠나면 돌이킬 수 없다. 부둣가에서 술 먹다가 선원으로 잡혀가는 일은 대항해시대에 흔했다. 필름이 끊겼는데 깨어나보면 몸은 갑판 위에 널브러져 있고 항구는 저 멀리 있다. 별수 없이 그 항해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일대사건을 일으켜야 하고 그 사건의 에너지 흐름에 풍덩 빠져야 한다. 누구의 편에 서느냐가 중요하다. 신의 편, 진리의 편, 역사의 편, 문명의 편, 사회의 편에 서야 한다. 지식은 공유되는 것이다. 문제는 언어다. 언어가 다르면 지식을 공유할 수 없다. 가는 방향이 다르면 소통할 수 없다. 한 방향으로 나란히 가면서 언어를 일치시켜야 한다. 진정한 교육은 사건 속에서 나란히 가며 동료가 되어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함께 하지 못하는 이유는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고, 에너지가 없는 이유는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고,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외부의 방해자 때문이다. 지리산 정상에 올라야 덕유산 정상이 보인다. 뾰족한 위치에 올라야 방해자가 제거된다. 어딘가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방해받는다. 많은 사건이 있다. 큰 길과 작은 길이 있다. 작은 길에 속해 있으므로 큰길로 빠져나오지 못한다. 자력으로 탈출해야 한다.
합리냐, 실용이냐? 실용주의자는 그 실용의 이익에 의해 방해받는다. 이들은 모두 연동되어 있으므로 하나를 잘 찍으면 나머지는 줄줄이 사탕으로 따라온다. 핵심은 방해받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딱 보면 안다. 전자는 방해자가 없고 후자는 방해자가 많다. 절대는 대를 끊으니 방해자가 없고 상대는 일일이 상대하려니 해결해야 할 상대가 너무 많다. 지식을 공유함에 있어서 방해자가 없는 길을 선택하라. 집단과의 의리를 지켜 자신을 희생하는 지사는 거침없이 의사결정할 수 있고 내 몫부터 챙기는 얌체는 그 몫을 셈하느라 방해받는다. 물의 흐름이 방해받으면 그 물은 흐를 수 없으니 고인 물이 되어 썩어 간다. 옳은 길과 그른 길이 있다. 옳은 길은 방해받지 않으므로 만날 사람을 만나게 되고 만나면 호르몬이 바뀐다. 호르몬이 바뀌면 에너지가 끓어오르고 그 에너지의 흐름에 풍덩 빠지면 인생이 바뀐다. 그른 길은 작은 길이며 남의 뒤를 따라가는 길이며 그러므로 앞에 가는 사람에 의해 방해받는다. 의사결정할 수 없다. 방해받지 않는 길로 나와야 큰일을 벌이고 동료와 함께 할 수 있다. 지식의 주입은 나중의 일이고 의사결정구조의 건설이 먼저다. 지식은 공유하면 된다. 언어를 통일하고 각자가 알고 있는 지식을 테이블 위로 꺼내놓으면 된다. 본능으로부터, 관습으로부터, 괴력난신으로부터, 부족으로부터, 탐욕으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신과 일대일로 만날 때 구조론의 제자가 될 수 있고 동료와 의리를 지킬 수 있다. 좋은 평판을 받을 필요는 없다. 인류의 중심과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류문명의 큰길로 나와서 방해받지 않고 거침없이 질주할 때 그것은 가능하다. |
구조주의 교육 시스템의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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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발전이유 세가지(저작권,논문제도,학회)가
디지탈경제에서는 취약점,CVS,Opensource라고 보여집니다.
동양계 어떤 아저씨(해커출신, 현재 미대학 교수) 얼마전에 이쁜 도구하나 CISCO에 1.5조 현찰 받고 팔았던 기사 있습니다.
절대적인 일원의 합리성, 즉 진리에 의하여
이성적 진보로 대승을 지향해, 즉 이성을 따라
공자의 문명을 재발화 ,즉 문명을 수호할 제자의 길을 열어주신것에 대하여 감사 드립니다.
20년을 더 기다리는것도 의미가 있겠으나
세계시민의 길을 가기전 아시아적 잠룡의 용트림으로서
하나의 책으로 묶는 작업도 의미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이야기 꾼을 섭외해서 "꽃들에게 희망을" 정도의 간단한 우화로 만드는작업)
특히 마음의 구조론은 언어의 장막을 제거하는게 가장 시급해 보입니다.
언어에 사로잡혀 현재에 복무하는 많은 제자들이 있다고 봅니다.
구조론에 의하여
구조론에 의하여
구조론세 의하여 웃는 세상을 기원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꾸우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