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의 극중개그 우리 언주가 일등공신이닷! 천정배에 따르면 국민의당 의원 40명 중에 한 명이 안철수를 지지한다는데 그 한 명은 보나마나 이언주 아니겠는가? 안철수의 극중개그는 한마디로 왼다리 오른다리 놔두고 복판다리로 서보겠다는 건데 무리다. 물리법칙과 안 맞다. 구조론과도 안 맞다. 동적균형의 원리 때문이다. 달리는 자동차는 무게중심이 약간 앞에 있어야 한다. 무게중심이 뒤로 치우치면 전복될 위험이 있다. 움직이는 물체의 무게중심은 부피의 중심보다 전진해 있어야 한다. 삼륜차가 잘 넘어지는 게 이유가 있다. 이는 백 미터 달리기 선수가 상체를 약간 숙이는 것과 같다. 상체가 젖혀지면 통제불능이 된다. 자세가 제어되지 않는다. 운동의 중심은 현재의 중심이 아니라 미래를 포함한 중심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는 손을 대는 순간 이미 과거가 되어 있다. 정치는 결과적으로 어떤 결정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절차를 밟는 과정에 집단 내부에서 어떤 의사결정 구조를 만들어 내느냐이며 이는 곧 누가 권력을 잡느냐다. 권력주체세력이 누구냐다. 정치인이 어떤 결정을 하는 게 아니라 권력주체를 창출하는 것이다. 박근혜가 노인에게 20만 원 주는 것은 정치적 결정이며 그 과정에서 노인들이 어깨에 힘을 주고 으스대는 것은 권력주체의 창출이다. 박근혜는 나이순으로 줄 세운 것이다. 진보는 실력순으로 국민을 줄 세운다. 진보냐 보수냐는 실력순으로 집단의 서열을 정할 것인가 아니면 나이순으로 혹은 재산순으로 서열을 정할 것이냐다. 정권이 바뀌면 서열이 올라가는 자가 그만큼 위세를 떨치게 되고 그게 이익이다. 중간에는 그 권력을 잡을 주체가 없다. 짝짓기 놀이를 해보면 알 수 있다. 중간에 낀 아이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다가 짝을 정하지 못해 왕따가 된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치우쳐 있어야 두리번거리지 않고 쉽게 짝짓기를 할 수 있다. 왜? 구조론의 대칭원리 때문이다. 축을 틀어 이동시키는 게 의사결정인데 축은 왼쪽이나 오른쪽에 있어야 축을 틀어서 의사결정할 수 있다. 의사결정을 위해서는 배후지가 있어야 한다. 한쪽을 비워놓아야 한다. 빈공간으로 축을 이동한다. 중간노선은 축을 고정시키겠다는 즉 의사결정을 하지 않겠다는 거다. 쉽게 말하면 왼쪽 깜빡이 넣고 오른쪽으로 핸들 꺾는 게 의사결정이다. 가운데는 깜빡이가 없다. 안철수는 마크롱식 실용주의로 가겠다며 자기 계획을 죄다 밝혀버렸다. 이렇게 자기 카드를 죄다 까버리면 권력이 생성되지 않는다. 권력의 힘은 사람들이 모르고 오직 나만 아는 데서 얻어지는 거다. 그러므로 의사결정은 반드시 틀어야 한다. 지도자는 반드시 대중의 뜻을 꺾어야 한다. 그게 리더십이라는 거다. 정치는 반드시 손해 보는 집단이 있어야 하며 지지자들이 손해를 보는 구조가 민주주의 시스템이다. 노동자의 지지를 받으면 노동자가 손해를 보는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노동자가 지도자를 믿고 단기적인 손해를 감수하려 들기 때문이다. 극중으로 가면 나중에 챙겨줄 테니까 당장은 참으라고 말할 대상이 없으니 흥정이 안 되고, 타협이 안 되고, 리더십이 죽는다. 모든 세력집단이 현찰장사를 하려고 하면 정치적 조정이 안 된다. 언제나 그렇듯 지지자가 참아야 일이 풀린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참을 수 있는 지지자가 있느냐다. 그런 충성파 집단을 만들려면 교환조건으로 대신 챙겨줄 게 있어야 한다. 지지자들에게는 대신 줄 수 있는 게 있다. 그게 권력주체다. 권력주체에 들어 서열이 상승하면 곧 신분상승이다. 지지자는 신분상승해서 문재인이 청와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보상받았고 기분이 좋으니 단기적으로 참을 수 있다. 결국, 정치는 미래와 현재의 교환이며 현재 손해 보고 미래 이익 본다. 현재와 미래를 교환하면 장기전으로 가게 된다. 장기적인 카드를 제시해야 하며 그러려면 진보든 보수든 치우칠 수밖에 없다. 강경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장기적으로 쟁취하겠다는 말이다. 우리가 통일을 외친다고 내일 당장 통일이 되겠는가? 장기전을 하겠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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