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여러 매체에서 명성황후 사진에 대한 보도를 접했습니다. 저는 다음을 통해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김동렬 선생의 홈페이지에 왔다가 올리신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올초에 박력의 정치란 컬럼을 통해 평소에 감명을 하면서 김선생님의 글을 애독해온 터라 김선생님도 주의깊게 읽어 주시리라 생각되서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을 풀어 보겠습니다.
1) 보도에 소개된 테리 베넷은 영국에 거주하는 유태인 금융 컨설턴트로 주로 동아시아 사진콜렉션만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으로 일본 근대사진 콜렉션 전문가입니다. 일본 근대에 관련된 책을 여려 권 내기도 했습니다. Japan Caught in Time, 1995/ 아마존에 검색하시면 다 나옵니다.
2) 일본사진을 콜렉션 하다가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사진들이 줄줄이 수집되게 되었습니다. Korea Caught in Time, 1998을 보시면 알겁니다. 그의 방대한 한국사진 수집은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아무튼 그는 1998년에 1871년 신미양요 전투를 기록한 펠리스 비토(우리에게는 이 사진가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기사에 실린 서울대 이태진 교수가 자기가 펠리스 비토의 사진들을 우리 나라 최초의 사진이라고 조선일보에 1999년인가 대대적으로 떠들었지만, 물론 이 사진이 최초의 사진이라는 고증이 아직 완벽한 것은 아니며, 비토의 사진은 이미 1980년대 우리나라에 소개되었습니다.)의 신미양요 사진첩(약 50여점)을 사진영상의 해에 기념으로 열린 <한국사진역사전>에 고액의 사용료와 보험에 들고나서야 선심쓰듯 내놓게 됩니다.
3) 시간이 흘러 테리 베넷은 자기가 콜렉션한 사진들을 통째로 한국의 여러 루트를 통해 판매하고 싶어 합니다. 돈이 된다고 생각했겠죠. 물론 가격도 많이 올랐습니다. 2000년 초반에 들었던 가격이 토탈 3억원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대구의 정성일이라분이 평생 수집한 한국근대사 사진들을 사업하듯이 말이죠. 테리 베넷은 한국에 살짝 와서 이 양반을 만났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서로 가진것을 재보고 빅딜하겠다는 생각이겠죠. 가격이 안 맞아서 베넷이 포기한거라 생각됩니다.
4) 이번 명성황후 사진은 저는 테리 베넷의 한국에 대한 언론 플레이라고 생각합니다. 몇년전부터 조금씩 이슈가 될만한 거리들을 내놓고 있는게 미심쩍 싶습니다. 미끼 던지듯이 말이죠.그는 여론의 관심을 끌어 사진을 팔아 보려고 하는 속셈이 있습니다. 1998년에도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사진일거라는 추측성 사진들을 우리나라의 최초의 사진일거라는 사진들을 일부 공개한바 있으나 학계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려면서 자기는 수집가일 뿐이며, 한국사진에 공헌하고 싶으며, 이 사진들을 꼭 한국에 뜻깊은 곳에 아주 적당한 가격에 내놓고
싶다고 했답니다. 몇몇 기관에 몰론 의사타진을 했겠겠지요. 금융업하는 분이니 오죽 하겠나요.
5) 사진에 찍힌 고종과 순종 사진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진이며 흥선대원군 사진은 관복사진은 알려져 있고, 다른 하나는 처음 공개된 사진이라고 봅니다. 청나라에 끌려가서 찍은 1883년 당시의 사진은 알려져 있지만 말입니다. 처음 공개된 사진은 흥미롭군요.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명성황후 사진인데, 이 논쟁은 예전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던 문제입니다. 서울대 이태진 교수가 많이 제기하는 편이죠. 이 분 정말 줄기차게 명성황후 사진이라고 생각되면 무조건 달립니다. 그 정열이 무섭습니다.
6) 명성황후는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고 봅니다. 조선왕조 법도에 한나라의 국왕과 국모의 사진을 촬영한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모르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말하지만, 고종도 개항이후 8년이나 지난 1884년 3월에 퍼시벌 로웰과 지운영에게 사진을 찍었을 정도였습니다. 하물며 조선의 국모였던 명성황후가 조선인들도 아닌 서양인들에게 쉽게 "그래 나 이렇게 생겼는데 어디 찍어봐" 했을까요? 황후는 1874년 대원군 실각후 얼마 안있어서 오빠 민승호가 폭탄에 비명횡사한후 극도로 사람 만나기를 꺼려 했다고 합니다. 물론 황후도 새로운 신문물에 관심을 가졌겠으나, 제한적이며 남의 눈에 띄는 것을 싫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계속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소용돌이에 놓인 그녀의 운명을 통해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명성황후가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찍었다는 것은 어딘가 사실에 맞이 않는다고 보는거죠. 역대 조선 왕들의 모습을 어진을 통해 기록해온 조선에서 국모의 모습은 없었죠. 물론 고종비였던 엄비나 순종의 두번째 비였던 윤황후 사진은 많이 남아 있으나 어딘가, 그런 사진들은 후대에 일제에 의해 강요되거나 억지스러움이 배어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궁안에서 윤황후와 동격으로 기모노를 입은 일본여인들이 같이 촬영된 경우도 있습니다.
7) 흥선대원군과 함께 조선을 호령했던 여걸 명성황후의 사진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어제 본 사진에서 사진속에 그녀는(복식사나 인물 유형학적 면을 떼어 놓고라도) 웬지 조선의 국모라는 아우라가 없습니다. 인상쓰고 있는 얼굴에서 그녀 삶의 피곤함이 엿보이며(원래 명성황후는 신문물에 호기심이 많은 분이었다는 선교사 부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보면, 이 새로운 신문물 앞에서 호기심이 어린 표정없이 짜증섞인 얼굴은 들이댔다는 것은 다른 지위나 위상을 말해준다고 본다.) 만에 하나 신문물이 싫더라도 내가 그녀였다면 찡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한나라의 국모를 대표할 만한 사진의 표상이 하나도 이 사진에는 없다. 달랑 부채하나만 들고 임시 천막같은 곳에서 찍힌 그녀가 대원군과 조선의 운명을 놓고 격돌했던 명성황후라고 보고 싶지 않다. 최소한 위엄있고 호피가죽이 죽 깔린 그럼 의자와 화려한 복식에 궁중 시녀 몇명 정도는 거느려야 하지 않을까. 고종이 처음 찍힌 사진만 보더라도 아무렇게나 찍지 않았다는 흔적들이 엿보인다. 국왕의 위엄과 궁궐이라는 소재배치를 통해 자연스럽게 국왕
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사진에 찍힌 그녀가 지체 높은 분인것 만은 확실하지만 혹 어느 학자의 말처럼 대원군의 첩인 초선일거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이제 논란의 종지부를 찍어야 된다고 본다. 명성황후의 사진은 없다. 그녀를 둘러싼 상업적 논란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