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흰색과 검은색은 같은 색이다.
세계적인 영화감독 김기덕은 아르헨티나의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마르타 쿠를랏이 쓴 <나쁜감독, 김기덕 바이오그라피 1996-2009>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제 생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검은색과 흰색은 실제로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검은색을 설명하려면 반드시 흰색을 지적해야 하고 반대로 검은 부분을 지적하는 식으로 흰부분을 설명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 긴 얘기도 아니었고, 그저 단 두 줄의 문장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두 줄의 문장이 나의 시선을 삼켜먹어버렸다. 벌써 몇개월 전의 일이다. 한참을 생각했다. 그는 어쩌면 색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색 이전의 것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던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캔바스를 흰 색이라고 보이지만, 그 위에 흰 색의 물감을 칠하면 그것이 흰 물감을 칠한 것인지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의 말은 그런 느낌이었다.
색 이전의 것들. 사실 색이라는 것도 결국 태양의 가시광선이 사물에 반사되어 우리 눈에 들어왔을 때에 그것을 색으로 인지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에 태양이 없다면, 물감이 붉은 색이던, 푸른 색이던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색은 단지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세상엔 흰 색과 검은 색의 관계처럼 상호적인, 그렇게 맞물려있는 것들로 가득했다. 빛과 어둠, 천사와 악마, 선과 악,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 여자와 남자...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그 존재가 무의미해지는 관계. 김기덕 감독은 색을 말하지만, 또한 세계를 그렇게 바라본 것이 아닌가 싶었다.
2.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그렇게 상대적인 개념으로 분류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했다. 문제는 현실 속에서 그런 상대적인 개념의 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보이지 않는 강요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렸을 적에 처음으로 접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이란 대체로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다.
이것은 자라면서 점점 확대되어 비슷비슷한 다른 질문들을 마구 쏟아내게 하는데, "너는 진보냐? 보수냐?", "예수를 믿냐? 안 믿냐?"와 같을 종류로 수십 수만개의 질문으로 응용이 가능하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멍청한 질문을 하는 이유는 딱 하나 "아군이냐? 적군이냐?" 이것을 가리기 위한 목적에 있는 것이다.
하여,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면, 불특정 다수의 타인으로부터 일관성을 요구받게 된다. 사람들은 일관성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것이 공익에 부합하던, 공익을 해치던, 그런것 따윈 상관없이 하나의 방향을 고수하는 사람에게 신뢰를 부여한다. 그렇지 않다면 히틀러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확실히 어떤 분야에서 대가가 되거나, 크게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바로 '일관성'이다. 그런 사람들에 관한 책을 읽거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고, 그런 모습에 감탄한다. 왠지 나에게는 없는 '일관성' 이라는 것을 가진 사람 같아서...
하지만 문제는 하나의 방향을 고수해서 낭패를 보는 경우도 수두룩 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흰 색만 사용해서는 그림이 되질 않는다. 상황에 맞게 유기적인 변화에 대처해야 하지만, 개인이 조직이 되고, 조직이 세력이 되어버리면, 아집으로 똘똘뭉쳐서 어느새 한 방향으로만 달려가 바위로 돌진해버리곤 한다.
소련도 그런식으로 무너졌고, 소니도 그런식으로 무너졌다. 절대적으로 옳은 방법은 없다.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문제라면 "이거 하나만 해결하면 다 되는거야!" 라는 생각이다. "서울대만 가면 돼!", "얼굴만 예쁘면 돼!", "아이디어만 좋으면 돼!", "기술력만 있으면 돼!"... 아사다 마오는 "트리플 악셀만 잘 하면 돼!"
참여정부시절의 어느 토론회에서 유시민 전 장관은 그런 말을 했다. "우리나라는 '개혁'과 '개방'을 모두 해야하는데, 한쪽에서는 '개혁'만 하자고하고, 또 한 편에서는 '개방'만 하자고 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개혁'이란 국내 정치, 사회 개혁이고, '개방'이란 FTA 등의 외국과의 통상확대인 것이다. 참여정부는 정치사회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한미FTA를 추진하여,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곤 했다.
정치에 대해서 말하려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일관성의 덫'에 빠져있다는 얘기다. 성공한 사람의 일관성과 실패한 사람의 일관성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 그것은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성공한 사람이 말하는 '일관성'이란 행동과 선택의 일관성이 아니라, 자기원칙의 일관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쪽에 올인하는 것은 가장 멍청한 짓이기 때문이다.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그거야 아빠가 좋을 때도 있고, 엄마가 좋을 때도 있는 것이지.
3. 빛과 어둠
사실 이렇게 나누어서 생각하는 방식은 서양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양은 쪼개고 나누는 것을 잘하고, 동양은 붙이고 합치는 것을 잘한다. 이렇게 개념을 나누고,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단순화하여 생각하는 방식은 논리학과 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그것으로 인류의 문명이 진보하였다.
그렇게 선과 악으로 나누고, 천사와 악마로 나누고, 이성과 감성으로 나누어서, "선이 옳고, 악은 그르다", "천사는 착하고, 악마는 나쁘다", "이성은 좋고, 감성은 어리석다" 라고 결론짓는 순간 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초딩 수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어떤 개념을 두 개로, 혹은 그 이상으로 나누어, 그 중에 하나에게만 절대성을 부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빛이 있기 때문에 그림자가 있는 것이고, 빛이 없는 어둠은 어둠이라 불리워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원칙과 전략'이 한 팀이 될 때에, '완전' 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4. 사진을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기는 쉽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현미경이 생기기 이전에도 세균은 존재했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진정 가치가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이비 종교처럼 이용되기도 한다. 나는 사진을 말하고자 한다.
사진은 카메라로 찍는다. 요즘은 DSLR(디지털 일안 반사식 카메라)이 발달되어 쉽게 사진을 찍고, 출력할 수 있지만, 카메라의 시작은 '바늘구멍사진기' 였다. 바늘구멍사진기는 빛이 작은 구멍을 통과할 때에 상이 거꾸로 맺힌다는 원리로 만든 것이다. 렌즈도 필름도 없이, 그 자체가 하나의 조리개였다. 카메라는 렌즈나 필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조리개로부터 시작 된 것이다. 조리개는 빛의 량을 제어한다.
태초에 빛이라는 에너지가 있고, 렌즈는 빛을 모으고, 조리개는 빛을 제어하고, 셔터는 빛을 차단하고, 필름에 상이 맺힌다. 내부에 렌즈와 조리개와 셔터가 있고, 빛과 필름은 외부의 입력과 출력물이다. 사진이라는 결과물은 눈에 보이지만, 빛과 어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빛에 민감하다. 뷰파인더로 보았을 때 눈에 보이는 밝기로 느낄 수 있으니까.
카메라 내부에 어둠상자가 있는데, 이것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조리개로 빛을 제어하고, 셔터속도로 어둠을 제어한다. 사진이 나오려면 빛도 필요하지만 어둠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재의 디지털 카메라는 필름 대신에 빛을 3원색으로 분해하여(RGB) 픽셀단위로 기억하는 센서를 넣은 것이다. 필름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암실이 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젠 어두컴컴한 암실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인화의 마법이 사라졌다. 메모리와 LCD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아날로그 시절에는 필름을 넣었기 때문에 카메라 내부를 열어보게 되었는데, 디지털 카메라 등장 이후에는 필름이 들어가질 않다보니, 카메라의 어둠을 잊어버리곤 한다. 마치 처음부터 어둠이 없었던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어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광원인 태양과 피사체를 '빛의 영역'이고 카메라와 암실을 '어둠의 영역'이라고 부른다.
사진 한 장이 나오기 까지에는 빛과 어둠이 필요하다. 그것을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로 나누어 부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가치'와 '기능'이라고 부른다. 빛과 피사체(모델)의 몸짓과 표정에서 가치가 생겨난 것이고, 카메라와 암실은 그것을 사진으로 출력하기 위하여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뛰어난 카메라와 암실이 있어도, 빛과 피사체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고, 빛과 피사체가 있어도 카메라와 암실이 없으면 순간을 담아낼 수가 없다. 분명한 사실은 언제나 가치가 기능에 우선한다는 것이다. 카메라의 구조는 생물체의 눈에서 온 것이다. 자연을 본따서 만든 카메라의 구조가 그렇다면, 인간의 삶 또한 같은 구조다. 인간의 삶 역시 자연의 한조각 아니겠는가?
5. 가치와 기능
가치와 기능이 있다. 원칙과 전략이 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라는 질문에 아이는 나름의 자기 원칙이 있어서 그 원칙에 부합하는 쪽을 더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다. 자기 원칙이 있으면, 진보정책이던, 보수정책이던 상황에 따라서 전략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원칙에 가치가 있고, 전략에 기능이 있다.
사람들이 방법론에 올인하는 이유는 하나는 그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자기원칙이 없어 불안하기 때문이다. 원칙이 있으면 서울대를 나오건 초등학교를 나오건 제 할일 제가 알아서 한다. 그 자체에 완전성이 있기 때문에 삶에 후회가 없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고, 생각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양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이 자기 행동에 우선 하기 때문이다.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 빠삐용의 일관성은 끊임없이 탈옥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한 것에 있다. 그것이 빠삐용의 원칙이자 가치인 것이다. 우리 이제 제 몸뚱이를 남에게 맡기지 좀 말자.
딴소리오만,
흰 빛과 검은 색은 같소. 자리가 같소.
색은 섞으면 검어 지고, 빛은 모으면 희어 지오.
흰 빛은 모든 색을 결대로 드러내고, 검은 색은 모든 빛을 그대로 담아내오.
검은 색과 흰 빛은 빛과 색의, 같은 자리에 있소.
가산혼합과 감산혼합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구려.
빛의 3원색인 Red, Green, Blue 를 혼합하면 흰 색의 빛이 되고(가산혼합),
색료의 3원색인 Cyan, Magenta, Yellow 를 혼합하면 검정 색 물감이 된다는 원리인데(감산혼합),
혼합한 자리가 흰 빛과 검정 물감이 같다는 것은 옳지만,
태초에 빛이 있어야 물감도 인지할 수 있으므로, 가산혼합이 상부구조이고, 감산혼합이 하부구조라고 볼 수 있겠소. 즉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
(색상을 영어로 표기한 것은, Cyan과 Blue를 한국어로 차이를 두기가 애매하다고 생각해서 였소.)
본 글을 읽으며 연상하였으나, 본문과는 무관하오.
가산혼합과 감산혼합에 대한 말은 물론, 아니오.
김기덕 님의 職이 영화감독이라 색과 빛을 함께 다룬다는 면에서 색과 빛의 실마리 한자락 남겼소.
가산혼합과 감산혼합을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로 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소.
빛이 있어야 색을 인지하는 것은 색체지각이 발달된 생명체의 사정일 뿐 아니겠소.
딴 이야기오만, 색과 빛으로 산 것과 죽은 것에 대해 사유하오.
산 것은 모일 수록 밝아지오.
겪을 수록 환해지는 것이 제대로 살아내는 경험.
빛의 상부구조는 발광체요.
발광체의 상부구조는 스위치.
스위치가 켜지면, 가장 까맣던 곳에서 가장 밝은 빛이 날 수도 있다오.
어둠에도 희망은 있다오.
상부구조들은 분발해야 하오.
오 대단합니다-2
일관성으로 망한 경우의 대표가 기틀러(노어발음은 모두 H발음이 G로 나옴니다: 홍콩=강콩, 하이티=가이티, 히틀러=기틀러: 본디 인간에게 [h]발음이 어려워서라나요...??^^)라고 볼수 있겠군요... 구조론 왕초보가 눈이 좀 뜨이는 것 같아요...
빛과 색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소.
그저 색은 빛의 반사에 의해 인식할 수 있다거나
가산혼합과 감산혼합을 동등한 대칭의 개념으로 그러려니 하던 것에 대해서.
이들 원인과 결과의 대칭성을 표현하는 그림이 필요한것 같소.
가산혼합 RGB
감산혼합 CMY+ (K)
이 그림을 다시한번 들여다보게 됩니다.
구조론 공부 좀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동기가 생기는걸요.
즉 양자가 물체에 부딪칠 때 우리의 시각인식 안에서 색감각을 자극한 것
시간적으로 짧게인가 길게인가, 양적으로 많게인가 적게인가 차이지 원인자는 같다.
현명함과 우매함이나 美와 醜, 너나 나나
"제 생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채움과 비움은 실제로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채움을 설명하려면 반드시 비움을 지적해야 하고 반대로 채운부분을 지적하는 식으로 빈부분을 설명해야 합니다."
엉뚱한 이야기지만
어원으로 봐도 흰 것이 검은 것이고 검은 것이 흰 것이오.
백두산은 눈이 쌓여 머리가 희기 때문에 '개마산'으로 불리워 왔소.
개마>검뫼 (백두산은 검뫼를 의역하여 한자로 옮긴 것)
영어로도 '블랙'의 어원은 '빛이 바래다'는 뜻이오.
빛이 바랜(희미한) 것은 창문의 블라인드(blind) , 블라인드는 장님, 장님은 눈앞이 깜깜해, 깜깜한 것은 검어.
그런데 바래다는 밝다(bright)에서 왔기 때문에
밝다>바래다>어둡다>깜깜하다>까맣다로 뜻이 변화되었소.
박쥐(박쥐는 장님. 박쥐는 눈이 어두운 쥐)나 밤의 어원도 같소.
그럼 화이트는?
화이트는 원래 '까다'에서 온 말인데
K>H 패턴에 따라
밀을 까다>밀가루가 희다.
깐 것은 흰것.
이렇게 된 것이오.
이와 비슷하게 같은 말에서 상반되는 뜻으로 갈라진 단어는 매우 많소.
매매(사는 것도 매, 파는 것도 매)
빌다와 빌리다(원래는 빌려주다의 의미).
더하다와 덜다(덜어내다.)
붙다와 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