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성이란 무엇인가? 존재가 작동하는 방향은 기본적으로 마이너스다. 하부구조에서 부분적으로 플러스가 일어나지만, 이는 인간이 개입한바 관측의 오류에 해당하는 것이고 닫힌계를 걸고 사건 전체로 보면 자연은 언제나 마이너스다. 이는 우주의 절대원리다. 사건은 언제나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완전한 것에서 불완전한 것으로 움직인다. 어떤 일이든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일의 첫 시작은 완전한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세상은 불완전한 조각들이 우연히 맞춰져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완전한 것에 에너지를 태워 구조를 복제하는 것이다. 그 복제과정에 에너지 공급의 부족으로 구조가 깨져서 불완전한 부스러기들이 발생한다. 애초에 완전한 씨앗이 자라다가 에너지 공급의 부족으로 불완전한 쭉정이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을 본받아 구조를 복제하여 일을 성사시키려면 먼저 완전성에 대한 개념을 닦아야 한다. 우리는 예술에서 그것을 조달할 수 있다. 완전한 음악, 완전한 그림, 완전한 소설, 완전한 디자인, 완전한 건축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오해한다. 우리는 완전한 것이 안정된 것으로 생각한다. 고대 음양론으로 보면 변화가 없는 양의 점괘는 안정되니 길하며 변화하는 음의 점괘는 불안정하니 불길한 것이다. 틀렸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은 변화하는 음에서 나온다. 변화는 음이다. 음은 여자다. 암컷이 새끼를 낳는다. 음은 길하다. 이것이 당연한 상식이라야 한다. 그러나 고대인의 점괘는 전쟁의 승패예측을 목적하므로 반대로 해석한다. 변화는 전쟁에서 부상을 당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해롭다고 보았다. 이는 상나라가 약탈집단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라면 모든 변화가 길하다. 기업의 번영, 생물의 진화, 동물의 생육, 곡식의 성장이 모두 길한 변화다. 고대인은 변화를 전쟁이나 기근, 천재지변, 전염병으로만 여겼기에 불길하게 본 것이다. 우리는 또 완전한 것은 좌우대칭이라고 생각한다. 솔로는 불길하고 커플은 완전하다는 식이다. 이는 역시 태양과 달이 짝짓듯이 음양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삼위일체나 혹은 천지인 삼부사상과 같이 삼각형을 안정된 구조로 보기도 한다. 원불교는 시작과 끝이 연결된 둥근 원을 완전한 것으로 여긴다. 이는 변화를 반영한 것이므로 약간의 진보성이 있다. 그러나 조악하다. 예술이나 문학이라면 아름다운 것과 재미있는 것을 완전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 말라는 자기소개다. 자신이 어떻게 느꼈다는 것이 어떤 판단의 근거가 된다면 유치하다. 아기는 달콤한 것을 완전하게 여긴다. 치아 썩는다. 꼬마는 알록달록한 것을 아름답게 여긴다. 때때옷이다. 유아틱한 수준을 극복해야 한다. 진짜라면 사람을 긴장시킨다. 그것은 반응을 끌어내는 것이며 그러므로 에너지가 있는 것이다. 가속도가 걸린 것이다. 각운동량이 조직된 것이다. 완전한 것은 움직이는 것이나 등속도운동은 아니다. 등속도로 나란히 가면 상대적인 정지상태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가만히 안정된 것은 고착된 것이며 그것은 다른 것에 붙잡힌 것이니 외부에 에너지를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고착되어 안정된 것은 사실 불완전한 것이다. 세상이 맹렬하게 움직이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상대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세상은 타오르는 불과 같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연료가 되어 소모될 뿐이다. 불보다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안정된 바위는 지구중력에 잡혀 있으니 지진에 망한다. 위태롭다. 안정된 상태는 계에 가속도가 실린 동적균형 상태다. 조직이 커가는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 예술을 통해서 우리는 그 감각을 키울 수 있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건축이든 에너지를 태우고 있어야 한다. 그냥 예쁜 것은 관객에게 아부하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와 관객의 게임에서 작가의 패배다. 천만관객을 자랑하는 영화라도 관객이 승리하면 작품성은 0이다. 관객을 이끌고 전진하여 나아가야 한다. 세상은 복제된 것이다. 복제의 원본이 있다. 원본은 에너지다. 에너지를 소립자 단위로 쪼개고 들어가면 안에 작은 물레방아가 있다. 물레방아는 돌아가면서 여러 개의 방향을 한 방향으로 몰아준다. 확산에서 수렴으로 튼다. 척력을 인력으로 바꾼다. 위치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꾼다. 짝수에서 홀수로 튼다. 그림이든 음악이든 건축이든 그런 생장구조가 보여야 한다. 조직이 커나가는 족보가 보여야 한다. 계통이 연결되어 맥락이 드러나 보여야 한다. 어떤 하나가 완전하다는 것은 없으며 항상 사건의 기승전결에서 다음 단계로 뻗어가는 촉수가 있느냐로 판단한다. 소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 그런 공간이 확보되고 있는가, 배후지가 있는가, 예비자원이 있는가로 판단하기다. 족보에 의존하는 것이 원죄이니 원초적인 결함이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족보에 의존한다. 외부 에너지 공급원에 의존하므로 원초적 불완전성을 가진다. 그 족보의 진행이 완전하다. 그러므로 동적균형이 완전하다. 고착된 완전은 없으며 진보나 보수 중의 한쪽으로 치우쳐 완전한 것은 없으며 진보와 보수가 두 다리가 되어 왼발과 오른발의 교대 중에 왼발이 먼저 나가는 것이 완전한 것이다. 인생은 게임이다. 정지한 것은 게임의 파트너가 없으므로 완전할 수 없다. 다이아몬드가 빛나더라도 미인의 목에 걸리지 않으면 광채가 없다. 짝을 맞춰주는 파트너를 얻어야 한다. 미인과 다이아몬드가 합체해도 전혀 완전하지가 않다. 미인은 객석을 채운 관객의 눈동자가 모이는 소실점에서 프리마돈나의 열창으로 있어야 하며 그 자리에 모인 관객이 앵콜을 외치는 것은 다음번 공연을 예상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게임을 다음 단계로 연결해 가는 것만이 완전하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미인에 다이아몬드는 파멸이다. 다음 단계가 없기 때문이다. 씨앗이 완전한 것은 파종되어 빛과 물과 만나 싹을 틔우기 때문인데 미인에 다이아몬드라면 추수되어 조리된 음식처럼 마침내 소모되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 시작은 소박해야 한다. 심플해야 한다. 화려하면 안 된다. 화려하다는 것은 끝났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사건의 종결이 아닌 사건의 촉발이어야 한다. 그 그림, 그 건축, 그 음악이 사건의 종결인가 사건의 촉발인가다. 인생은 게임이므로 족보를 연결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완전한 것이며 그다음 단계가 예상되어야 하고 그것이 방향성이며 작품에는 방향성이 보여야 한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다. 인공지능시대를 예고한 것이다. 다음 단계가 보인다. 예술은 사기라는 게 그것이다. 어떤 작품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건 성립하지 않는다. 다음 단계를 조직하기에 달려있다. 즉 어떤 작품의 가치는 그 작품 자체에 내재하는 게 아니라 그 문명이 다음 단계를 어떻게 가꾸느냐에 달려있다. 우리는 작품을 소비하지만, 사실은 그 작품이 예고하는 사건의 맥락을 소비하는 것이며 그것은 다음 단계를 두고 게임을 벌이는 것이다. 의도가 있다는 거다. 의도는 집단의 의지에서 나온다. 어떤 작품의 가치는 그 작품에 고유하지가 않다. 작품이 예고하는 다음 단계의 게임을 어떻게 조직하는지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즉 그 작품의 가치는 나중에 결정되는 것이다. 주식투자와 비슷하다. 그 작품에 베팅하여 키워가는 것이다. 그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가면 걸작이다. 인상주의 그림이 승리한 것은 그 그림이 좋은 작품이라서가 아니라 그 작품이 예고한 사건의 맥락이 현실에서 싸워 이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쟁이다. 여기에 명백히 의도가 있다. 앤디 워홀이 팝아트를 들고나온 것은 시비를 건 것이다. 인류문명이 이 방향으로 간다는 예고를 하고 판돈을 올려 승부를 걸었다. 앞으로 이 산업이 발전할 거라는 예측이 맞으면 그 종목 주가는 오른다. 그런 게임이다. 여기에는 의도가 있고 작전이 있고 투쟁이 있으므로 사기다. 모르면 당한다. 디자인이 어떻고 뭐가 어떻고 하지만 사실은 인류의 방향성을 논하는 것이다. 회사후소라 했다. 그 방향성을 아는 사람이라야 대화가 된다 할 것이다. 덩케르크가 어떻고 군함도가 어떻고 하지만 이게 과연 맞는 방향이냐를 논하는 것이다. ### 검색해보니 죄다 반대로 설명해놨던데 회사후소는 흰색이 나중에 온다는 해석이 정설입니다. 예술은 장식이고, 장식은 맨 마지막에 가는 것이며, 그림을 다 그려놓고 마지막에 흰색으로 눈동자를 그려서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 예술은 권력투쟁이다. 단순히 어떤 목표 곧 시각적 아름다움이나 혹은 미각의 맛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목표에 도달하면 곧 진부해지고 식상해지고 권태로워진다. 예술은 끝없이 뇌에 긴장을 불러일으켜야 하며 사회에 풍파를 일으켜야 하며 나른해지면 안 된다. 사건의 기승전결에서 기에 서서 이어지는 승과 전과 결을 지배하는 권력의 창출이 진정한 미다. 그러므로 예술은 오만한 것이며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의도를 감춘 것이며 그래서 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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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가속도의 의미는 속도에 속도가 얹힌 것. 달리는 버스에서 사람도 움직이는 것. 그러므로 중력가속도라는 말이 성립하는 이유는 지구의 움직임에 사물도 반응하기 때문.
달리는 자동차의 엑셀을 밟으면 가속도라고 하는 것은 한장받고 한장더인것. 인간이 상대의 액션에 반응한다는 것도 가속도와 같은 개념. 너의 액션과 나의 액션이 동시성립하는것. 이때 먼저 시작한 놈이 주도권을 가지는데 이를 상대적인 바탕이라고 할 수 있음.
다시말해 뒤따른 반응은 상대에게 종속되는 것. 상대가 유아틱하므로 상대의 수에 말리기 싫다면 상대의 개지랄에 반응하지 말고 나의 일관성, 즉 나의 룰대로 혹은 전략 혹은 사건대로 전체 사건을 조직하면 되는거. 대표적인게 무시전략.
사건이나 언어에도 전제와 진술이 있으면 두개의 속도가 중첩되어 있는것. 질병의 치료라는 것도 사건을 보는 관점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사건의 주도권을 질병의 원인체가 아닌 의사가 가져오는 것. 의사가 통제가능한 상황으로 사건을 다시 구성한다는 말.
가령 기존의 치료법들은 병원체를 몸 밖으로 들어내는데 집중했는데, 이를 사건의 관점으로 보면 질병을 관리하는 개념으로 바뀌는것. 반드시 들어낼 필요는 없고 의사의 관리 범위 안에 질병을 가두는 것.
공자는 진리에 관심이 있는데 그 진리를 전파하니 인간들이 도무지 말을 안들어먹어서 예로 조졌으니 배우는 제자들은 본질인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공자가 제자를 조지는 수단인 예에만 관심이 있어서 주객전도를 일으키니 예를 가장 앞세워서 인의예지가 아니라 예인의지가 될 판이라 지를 맨 끝에 놓음은 하라는 공부를 안해서 무식한 넘들이 면피하려는 것이요 그래도 인을 앞세움은 예를 인 앞에 두는 반역은 차마 못하겠어서인지라 비루한 짓이라 할 것입니다. 예라는 것은 두 사건을 연결시키는 것이니 포장하여 전달하는 것이지 예가 목적이 될 수는 없음이오.
가속도라는 것은 다음 단계이니 어떤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곧 다음 단계를 아는 것이라 기승전결에서 기에 서면 승을 알고 승에 서면 전을 알고 전에 서면 결을 알 것이니 다음 단계를 모르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라 진보를 안다면 진보해서 끝나는게 아니라 그 다음 단계를 알아야 하는 것이라 그 다음 단계는 가봐야 아는 거고 현단계에 모습을 들키지 않으니 곧 미래를 아는 것이 현재를 아는 것이라 미래를 모른다면 현재도 모르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흰색은 반짝거리는 것이니 장식이라고 봐야한다는 거군요. 인지의신예라야 순서가 맞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