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언어 구조론
다윈 - 인간은 사실 원숭이에 불과하다. 구조론 – 자연과 인간은 에너지, 곧 통제가능성이 결정한다. 역사 이래 진실을 말한 사람은 이 넷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대중이 원하는 거짓말을 서비스했을 뿐이다. '니들이 원하는 게 이거 아냐?' 하는 식이다. 구조론이 여기에 다섯 번째 언어를 보탠다. 구조로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다. 진정한 답은 종교가 말하는 영혼도 아니고, 칸트가 말하는 이성도 아니고, 도덕가들이 말하는 선의도 아니고, 진정성이니 성찰이니 하는 탈근대 바보들의 공허한 메아리도 아니다. 답은 의사결정구조에 있다. 구조는 에너지가 치고 나가는 결을 조직한다. 의사결정구조를 조직하는 방법으로 에너지의 진행방향을 통제할 수 있다. 그것은 도덕도 아니고, 선도 아니고, 이성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며,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며,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며 보다 근본적이다. 자연의 에너지 지배든 인간의 권력지배든 의사결정구조의 지배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 별거 아니다. 까불지 말라는 말이다. 구조는 의사결정구조다. ‘무지의 지’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 우리는 자연과 인간의 의사결정이 어떤 원리로 일어나는지 모른다. 무지하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 사람은 역사이래 없다. 이는 필자의 문제제기다. 무엇보다 이 문제의 중요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진도를 나갈 수 있다. 여기서 막히면 대화가 안 되는 거다. 이해했는가? 이 지점에서 당신은 전율했는가? ‘그래서 어쩌라고?’ 하며 멀뚱한 표정을 짓고 앉아있지는 않았는가? 이 문제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당신은 인정하는가? 그렇다면 계속 읽어도 좋다. 아니라면 나가주는 게 맞다. 통해야 통한다. 통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의사결정은 효율성을 따른다. 그래서? 결 따라간다. 의사결정에는 비용이 든다.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질을 양으로 바꿀 수 있고 양을 질로 바꿀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비용이 든다. 양질전환은 가능하나 비용이 지불되어야 한다. 인위적으로는 되나 저절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자연의 법칙에는 질서가 있다. 갈 수 있는 길이 있고 갈 수 없는 길이 있다.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마찬가지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마찬가지다. 그 어떤 것도 이 절대법칙을 피해갈 수 없다. 의사결정비용의 제한을 받는다. 자연의 모든 의사결정은 효율적인 방향으로 일어난다. 의사결정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의사결정비용을 내부에서 자체조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일어난다. 방향성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생물의 진화가 우연에 의해 일어난다고 믿는다. 틀렸다. 방향성이 있다. 의사결정 비용문제 때문이다. 우리는 자본의 팽창이, 정치의 발달이, 문명의 진보가 집단의 도덕적 신념이나 선한 의지 때문에 혹은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 때문에 일어난다고 믿는다. 틀렸다. 비용청구 때문에 일어난다. 진화는 비용을 줄인다. 개체로 보면 근육을 많이 쓰는 게 효율적이지만, 집단으로 보면 뇌를 많이 쓰는 게 효율적이다. 인간의 뇌는 에너지를 많이 쓰는 점에서 비효율적이지만, 집단으로 보면 효율적이다. 뇌를 사용하여 분업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헷갈릴 수 있다. 비축해둔 비용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는 비효율이지만, 부분적으로는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도중에 방향이 바뀐다. 게가 허물을 벗듯 외형을 키울 때와 내실을 다질 때가 있다. 세상 모든 논쟁이 여기서 일어난다. 먼저 내실을 다지자는 파와 먼저 외형을 키우자는 파다. 답은 나와 있다. 선외형 후내실이다. 게도 먼저 외형을 키우고 그다음에 내실을 다진다. 그러나 위태롭다. 외형을 키울 때가 취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 때문에 정답은 없고 결국 확률을 따른다. 내실을 다진 다음에 외형을 키울 수 없다. 구조적 모순이다. 내실을 다지면 예비자원이 고갈되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남의 돈을 빌려서 먼저 외형을 키우고 이때 초래되는 위기는 확률적 대응 곧 보험으로 넘기고 다음 내실을 다지는 것이다. 이는 자력으로 불가능하며 반드시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정답은 없으며 확률을 믿고 모험을 해야 한다. 이때의 조건은 외부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 전부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행동은 개인의 욕망이 아니라 집단의 욕망을 따른다. 생물의 행동은 개체의 욕망이 아니라 생태계의 밸런스를 따른다. 그러나 우리는 집단보다 개인을 관찰하고 생태계의 밸런스보다 개체의 우열을 비교했다. 완전히 헛짚은 것이다. 그렇다면? 패러다임을 다시 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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