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좀 어려운 얘기를 해야겠다.
1. 왜 니가 살아야 되냐고
바로 1년 전 이맘때즘이었나? 한국영화로서는 엄청난 흥행과 함께 온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스릴러 <추격자>를 보았다. 영화를 볼 당시에는 잔혹한 살해장면과 추격, 폭력의 장면이 인상깊었지만,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니까 그런 장면보다도 기억에 남는 딱 한장면이 있었다. 이것은 영화 추격자의 대본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영민 : 그렇지. (잠시) 미진아. (대답 없자) 대답해.
미진 : 예, 예...
영민 : 집에 가고 싶어?
미진 : (흐느끼며) 예...
영민 : 왜 집에 가야되는데?
미진 : .......
영민 : 왜 니가 살아야 되냐고... 말해봐.
미진 : (당황하더니 입을 열려하는데 할 말이 없다)
영민 : 없어?
미진 : (여전히 머뭇거리더니)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영민 : 없는 거야. 그지?
미진 : (재갈을 씌우려 하자) 자, 잠깐만요. 따, 딸이 있어요. 일곱 살짜리 딸이 있어요.
잠시 보더니 발악하는 미진에게 다시 재갈을 물리는 영민.
영민 : 사람들은 니가 없어진 줄도 모를꺼야. 당연히 찾는 사람도 없을 꺼고.
영화속의 잔혹한 살인범은 어째서 그녀를 죽이기 전에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물었을까? 정말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죽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일까? 보통의 사람들은 이런 극한의 상황을 겪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나 역시도 그런 상황이 없었고... 하지만 만약에 당신에게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누구에게든 그 질문은 할 수 있다.
"도대체 넌 왜 사는데?"
"네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해봐!"
그는 당신의 죽음의 직전에 삶을 물어왔다. 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그녀처럼 아이가 있다고 말할 것인가? 몸 아프신 노모가 계시다고 할 것인가? 그런데 어째서 자기 삶의 이유를 타인으로부터 찾는 것일까? 자기 삶의 이유는 자기로 부터 찾아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변명에 지나지 않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질문의 꼭대기로 올라가보면, 결국 "왜 사는가?" 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나는 왜 사는가?" 이것을 대답하기 위하여 오랜시간 철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나름의 이론을 만들었을 것이다. 종교가들은 그 이유를 신에서 찾으려했고, 과학자들은 원자나 세포에서 그 답을 찾으려고 했다.
사실 그것은 철학자, 과학자, 종교인들의 문제일 뿐이고, 정작 아무나 붙잡고 "너는 왜 사는데?" 라고 묻는다면 "나는 말야..."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정작 얼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스스로 행복해지려고 한다면 그 질문데 답을 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 행복해지고자 한다면 그 질문에 답을 하는 수 밖에 없다.
2. 김훈의 답
몇 개월 전에 정독도서관에서 소설가 김훈의 강연이 있었다. 김훈은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 등의 소설을 썼고, 그 중 <칼의 노래>는 100만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이자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원작이 된 소설이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꽤 유명한 소설가다. 보는 사람의 인상을 찌푸리게 할 정도의 생생한 묘사력은 정말로 부러울 정도다.
어쨌든, 정독도서관 시청각 실에 100 여명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기위해 모였다. 하지만 그는 강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았다. 초반에 약 15분 가량을 그가 최근 읽고있다는 <근사록>에 관하여 이야기 하였고, 나머지는 관객과의 질문과 답변의 시간으로 삼았다. 작가 김훈의 말에 따르면 <근사록>은 죽국 송나라 때 좋은 글귀를 모아서 만든 책으로, 조선시대에 선비들의 성리학의 입문서로서 필히 보아야 했던 책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책을 읽기 전과 책을 읽은 후의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일컷는 말이라고 부연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모순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마이크를 전해받아 그에게 이렇게 질문 하였다.
"독자입장에서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차이가 없으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작가 입장에서도 책을 쓰기 전과 후가 차이가 없다면 책을 쓸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작가님은 작가가 되기 전과 후의 차이가 있습니까? 책을 쓰기 전과 후의 차이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 차이가 없다면, 질문의 범위를 확장하여 왜 사는가? 라는 질문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훈 작가는 나의 질문에 자신은 작가가 되기 전과 후, 책을 쓰기 전과 후에 변화가 없으며, 책을 쓰는 이유는 먹고 살려고 쓰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봄이 되면 얼음이 녹고, 꽃이 피어나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 질문에 관하여 이렇게 답 하였다.
"왜 사냐는 질문은 의미를 무한 확장한 것이며, 그것은 질문으로서 성립되지가 않는다."
3. 왜 사는가?
당시 내가 그에게 "왜 사는가?" 라고 물어본 이유는 그가 작가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소설속에 등장하는 수 많은 삶과 죽음을 보았지만, 정작 그것을 창조하는 작가는 어떻게 대답할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무례일 수도 있다. 출판사에서 마련한 작가와의 대화시간이었고, 연예인으로 따지자면 팬미팅과 같은 시간과 공간에 꽤나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저 그런 가벼운 농담같은 질문과 대답이 오고가는것이 진정 작가와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싶어서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답을 얻어 다시금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왜 사냐는 질문은 성립이 안되는가?" 한참후에 내가 내린 결론은 "왜 사냐는 질문은 성립한다"였다. 원래 질문과 답은 하나의 짝이다. 답은 있는데 질문이 없거나, 질문이 있는데 답이 없거나 했을 경우에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고, 왜 사냐는 질문에는 분명히 답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두가지다. 하나는 그 질문에 답을 하는 형식, 틀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또 하나는 진짜 자기 삶의 이유를 말하는 순간 자기의 수준이 남에게 고스란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태어났으니까 살지!", "내 몸이 있으니까 살지!" 라는 대답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이 그사람의 수준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차마 그 말은 할 수 없는 것이다. 뭔가 근사한 답을 찾아야 한다.
4. 왜 질문이 필요한가?
혹자는 왜 그런 어려운 질문을 하고, 답을 찾으려고 머리를 굴려야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영화 추격자의 한 장면처럼, 왜 사냐는 살인자의 질문에, 죽음을 면하기 위한 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질문 자체가 우리의 삶을 살게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할 수 없다면, 자신의 삶이 죽은 삶인지, 무의미한 삶이 아닌가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에 관심이 많다. "어떻게 하면 성적이 오를까요?",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까요?", "어떻게 하면 취직이 될까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요?" 등등... 어떤 방법론을 바란다. 하지만 방법론이 알면 문제가 해결이 되던가? 성적이 마구 오르는 공부법을 몰라서 성적이 안오르던가? 방법론으로 해결이 안된다면, 그 이전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하수는 '어떻게'를 생각하고, 중수는 '무엇을 위하여'를 생각하고, 고수는 '왜'를 생각한다. 능숙한 화가는 "어떻게 그릴까"보다는 "무엇을 그릴까?", "왜 그러야만 하나?"를 생각하고, 그것이 결과물의 차이로 나타난다. 반대로 말하자면, '왜?'를 생각할 수 있다면, '어떻게'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는 것이다. 역설이지만, 상위에 있는 질문을 생각하면, 그것이 곧, 하위 질문에의 답이 된다는 것이다. 이열치열이라는 말처럼, 문제로 문제를 풀어보자. 문제해결능력이라는 말은 문제설정능력이라는 말과 같다.
5. 왜 사냐는 질문에 답하는 방법에 관하여
사실 내가 김훈 작가에게 "왜 사는가?" 라는 질문을 했을 때, 생각했던 대답은 "무엇을 위하여 산다." 혹은 "무엇에 의하여 산다" 이 두가지였다. 무엇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미래의 어느 지향점을 말하는 것이고, 무엇에 의하여 산다는 것은 과거에 얻은 삶의 에너지에 관한 것이다.
이런 방식의 사고체계를 구조론이라고 하는데, 세상의 모든 관계와 과정을 인과율, 밸런스, 에너지가 포함된 다섯가지 포지션으로 나누어서 바라보면, 문제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누가 그런 이론을 발명했다기보다는 자연의 변화에서 그 모든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보편의 진리를 발견하여 이론화 한 것이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원인은 외부의 에너지로부터 시작되고, 그것이 내부의 밸런스를 거쳐서 결과물이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휘발유를 넣어야 자동차가 작동하고, 사람이 밥을 먹어야 활동한다. 구조론에서는 이것을 다섯가지 포지션으로 이름지어 표현했다.
접촉 > 인지 > 판단 > 행동 > 결과
회사라면 업무 프로세스를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Energy > Infra > System > Action > Solution
어쨌거나 이런 형태로 존재의 이유를 구하는 틀을 만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무엇에 의하여 살아가는가? >
2. 그로인하여 심장이 뛰었는가? >
3.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가? >
4. 어떤 관성으로 행동했는가? >
5. 당신의 삶
성공하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에 몰입하여 결과물을 내는 사람이 많다. 뮤지션, 작가, 등산가와 같은 사람중에 특히 많다. 그들이 그렇게 하나에 몰입을 하는 것은 최초에 그것으로부터 에너지를 얻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삶에 지향점을 설정하고, 그것을 쫓아 살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만족한다.
어린시절 감동깊게 보았던 영화나 연극을 보고 훗날 연기자나 감독이 되는 사람이 많다. 말하자면 그와 같은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에너지를 얻고, 어느곳에 삶의 지향점을 설정하였는가? 그리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살아온 그 관성에 의하여 또한 하루를 살고 있는 것이다.
에너지 + 방향 + 관성 = 삶
살아가는 것은 망망대해에 각자의 배를타고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가는게 아니던가? 사람마다 각자 다른 배를 가지고 있다. 어떤이는 뗏목을 타고, 어떤이는 큰 유람선을 타고, 또 어떤이는 돗단배를 타고 간다. 그 출발점도 다르고, 도착점도 다르다. 그리고 큰 배가 옆에 지나가면 그 물살에 배가 흔들리고, 방향이 바뀌기도 하고, 내 배에 다른 배가 영향을 받가도 한다. 그리고 큰 폭풍우가 지나가면 알 수 없는 곳으로 밀려가서 영 다른 곳에서 방황하게 되기도 한다.
사는것은 그렇다. 나만 열심히 나아간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생각지도 못한 외부의 힘에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한다. 세상을 오래 살았다고 이런 노인네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것이 그러한 것이라고 정의를 해두고 보면 그 자체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 망망대해에 나는 어떤 동력으로 나아갈 것이며, 어디를 목표로 하고 있고, 그것을 위하여 어떤 관성으로 온 것인가? 당신의 과거 > 미래 > 현재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동력이 있고, 목표가 있고, 관성이 있어야 한다. 이 세가지가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고, 그것을 자신에게 묻고, 스스로 답을 구할 수 있다면, 그 신념으로 삶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문제를 대처할 수 있다.
그것이 누구에 강요와 기대에 의한것이 아닌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다.
... 완전성이라는 개념 없이는 풀릴 수 없는 해답.
어렴풋이나마 그런 생각이 듭니다.
참으로 공감하오.
내가 이곳에 자주 들락거리는 이유는 이때문이요.
공감하면 view on 좀 쿡 눌러주시구려. ㅋㅋㅋ
ㅎㅎ 쿠욱~ 눌렀소. (맞어. 그런 기능이 있었구랴~ㅋㅋ)
어떤면이 충격이었소?
일의 단위로 계를 닫아서 생각하는 구조론적 사고방식이 결여되면 딱 저렇게되오.
무한확장되는게 아니라 일의 단위로 끊어지고, 다시 질과 량으로 모두 연결된다는 사실을 모르오.
인과의 바다에 빠져죽은 전형적인 지식인상이오.
삶도 일의 한 단위이므로 '왜 사냐'는 질문은 성립하오.
왜사냐고 물었을때
일단 떠오르는 대답은
내일이 궁금해서라는 것이오.
내일의 나는 뭐에 빠져있을까
내년의 나는 이것저것 예정하던 것들을 하고있을까
가고 싶었던 곳을 갈수있을까
지금 작업하려던 일은 어떻게 완결될까
하여간 궁금한게 계속되는한
계속 내일을 맞지않겠소?
김동렬님 답글 내용이
농악대 상쇠처럼 절정의 지경에서 지휘를 참 잘하십니다.
한올 한올 문맥의 토막 토막마다, 아까워 조금씩 떼어다 읽었습니다.
꾹꾹 눌러서... 소통의 진동수를 많이 높여 주시는구려~ 오늘도 감사합니다. ^^
당연히 양을 쫒는 모험님의 기지 번뜩이는 치밀한 말씀도 공감입니다.^^
감사합니다.
살아가면서 흔히 부딛히는 문제들, 개인, 관계, 사회에서 오는 문제들의 원인과 그 해결에 관한 책을 써보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방법론이 아닌, 구조론의 새로운 사고체계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자는 내용이고, 구조론의 원리는 일상생활에 적용하여 이해를 쉽게 하고자 합니다.
위의 글 <존재의 이유>도 원고의 부분이 될텐데요. 구조론연구소의 0.0001%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려고 합니다. 제가 구조론을 잘 알아서 뭘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구조론 칼럼과 동영상을 보면서 적용 가능한 아이디어와 오프모임때 다루었던 지나가는 대화에서 힌트를 얻어 정리하였습니다. (일전에 담님의 강연에서 힌트를 얻기도 하였지요.)
좋은 글이구료.
어렸을 때 생각한
‘내가 사는 이유’는 ‘이미 게임은 시작되었다'였소.
방아쇠는 이미 당겨졌고 나는 타겟을 향하여 날아가는 탄환!
활은 이미 쏘아졌고 나는 과녁을 향하여 날아가는 화살!
날아가는 화살이 중간에 멈추는 것은 뜻대로 되지 않는 일.
그러므로 ‘왜 사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어디서 끝낼 것인가’가 문제였소.
버스를 타고 야외로 나가는데 이 벌판에서 내리나 저 벌판에서 내리나
큰 차이는 없지만 여하튼 어디서 내릴 지는 내가 결정해야 했소.
비록 날아가는 화살 신세라도 마지막 순간 과녁 앞에서 뭔가 재주를 피워
궁수에게 10점을 줄지, 9점을 줄지는 내가 결정할 요량이었소.
어쨌든 버스는 종점에서 멈추오.
각설하고
'완전한 인격'이라는 것에 도전하고 싶었소.
인생이라는 연극무대에서 삐에로가 되고 싶지는 않았소.
내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것.
삶의 한도가 80세라면 80호짜리 그림이 되는 것이며
‘왜 사는가’는 그 그림의 주제가 되오.
그러나 그것이 곧 '사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소.
그것은 '위하여'고
주제보다 스타일이 중요하오.
인생에서 추구할 수 있는 가치는 하나 밖에 없소.
그것은 ‘자기완성’.
그 자기의 바운더리 한계선을 어디까지로 그을지는
생각을 좀 해봐야 하오.
어쨌든 인생이라는 작품이 진부한 모방작이 되지 않으려면
제법 독창적인 작품이 되려면
자기완성, 나 다움의 극한, 내 스타일의 완성을 꾀하는 수 밖에 없소.
그래서 자신을 “새로운 삶의 형태를 창출하는 사람”으로 규정하였소.
인생을 두고
출세니 명성이니 돈이니 권세니 하는건 바보들이나 하는 소리고
독창적인 삶이냐
진부한 모방작이냐
이거 아니겠소?
왜 사는가?
‘국가와 민족 위하여 운운’.. ≪- ‘웃긴 넘들. 밥은 먹고 다니냐.’
‘웃지요, 허무, doing 운운’.. ≪- ‘그렇게 살다 죽어라. 나한테 말걸지 마라.’
‘하느님 천국 운운’.. ≪- ‘네. 됐거든요.’
‘돈, 출세, 명성, 권세 운운’ ≪- ‘안 꺼져? 확!’
'행복, 사랑, 쾌락, 운운‘ ≪- ‘쫌!’
요즘 생각한 것은
인간의 뇌라는 것은 사용하면 길이 나는데
길이 날수록 길이 들어서 길에 갇혀 버리오.
처음에는 용도가 지정되지 않았다가 차츰 길이 들어서
어떤 칼은 꼬마의 책칼이 되고, 어떤 칼은 소년의 장도가 되고
어떤 칼은 엄마 부엌칼이 되고, 어떤 칼은 병사의 총검이 되고
점점 편벽되어져서 영 쓸모없게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오.
진정으로 쓸모있는 것은 꿈 많은 어린이처럼 미처 용도가 지정되지 않은 것.
쓸모있는 것이야말로 통 쓸모가 없는 것 아니겠소.
이미 쓰여졌으니 이제 쓸모가 없게 된 것.
그래서 정기적으로 뇌세척을 하는데 하드를 싹 밀어서 완전 포맷이오.
‘나’라는 것은 내 조상이 수천 수만번째 뇌를 포맷해서
새로 OS를 깔아서 최신기능을 다수 장착한 수천만번째 버전인 것이오.
그러므로 인간은 태어나지 않고 죽지도 않으며
어데서 오지도 않고 어데로 가지도 않으며
거기 그대로 있으며 다만 자기 자신을, 그 이야기를 완성시켜 가는 것이오.
태어나고 죽는 것은 이름 뿐이오.
이름이 태어나고 이름이 죽는 것 뿐
의미는 본질은 인간은
처음부터 여여하게 그 자리에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