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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관리자*
read 3658 vote 0 2012.10.21 (21:59:44)

싸이가 미국에서 뜨자 바로 이어진 네티즌 반응은 박진영 조롱이었다. 싸이는 이렇게 미국에 가지 않고도 한 방에 떴는데, 박진영은 원더걸스를 미국까지 보내서 고생시키고도 기대만큼의 성과를 못 이뤘다는 비아냥이다.

그러더니 요즘엔 싸이를 내세워서 다른 한류스타들을 비난하는 것이 유행이다. 일본에 진출한 한류스타들이 싸이처럼 싹싹하지 않고 건방지다는 기사가 뜨더니, 한류스타들은 싸이를 본받아야 한다는 기사들도 떴다.

  
 
한편, 김기덕이 해외에서 대상을 받은 후 네티즌은 과거에 김기덕을 비판했던 평론가들을 조롱했다. 김기덕을 알아보지 못한 한국의 영화계도 비난의 대상이 됐고, 최근에 김기덕의 작품세계를 비판한 사람도 비난의 대상이 됐다.

입시교육 때문이다. 하도 정답 맞추기를 하다보니 모든 일에 정답이 있다는 사고방식이 아주 굳어져버렸다. 1,2,3,4 중에 4번이라는 정답이 제시되면 1,2,3번은 틀린 답이 되고 빨간 줄이 쳐진다. 싸이가 정답이 되자 박진영에게 빨간 줄이 쳐졌고, 김기덕이 정답이 되자 비판자들에게 빨간 줄이 쳐졌다.

이런 빨간펜식 사고방식은 위험하다. 특히 문화의 영역에선 더욱 그렇다.

애초에 김기덕이 한국에서 버려진 원인은 주류(정답) 이외엔 모두 쓰레기통에 버려버리는 우리 사회의 획일적 사고방식에 있었다.

김기덕이 외국에서 대상을 받고 난 후 우리 사회가 그를 절대적으로 떠받드는 것은, 겉으로만 보면 과거 김기덕에게 냉대를 가했을 때와 달라진 것 같지만 본질적으론 같다. 틀린 답인 줄 알았던 김기덕이 해외영화제에서 답을 맞춰보니 정답으로 밝혀진 것일 뿐이지, 정답만 절대시하고 그 외의 것들을 틀린 답 취급하는 사고방식 자체엔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이니까, 싸이가 정답이 되자 다른 사람들은 조롱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문화는 정답과 틀린 답으로 구성된 영역이 아니다. 싸이는 싸이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고 박진영의 도전은 또 그것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 싸이에겐 싸이만의 털털한 스타일이 있고, 보아나 동방신기에게는 그들만의 신비주의 스타일이 있다. 이것들을 옳음과 그름으로 분리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잘 나가고 성공한 사람들만 정답으로 떠받들고, 거기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루저 취급하면서 조롱하는 것은 비문화적일 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이기도 하다. 그런 편협한 사회에선 문화도 발전할 수 없고, 사회자체도 발전할 수 없다.

싸이는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는 하나의 모델을 제시한 것이지, 결코 정답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김기덕도 그렇다.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이 영화예술의 절대적 심판자일 순 없다.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어도 우리 내부에서 얼마든지 비판받을 수 있다.

문제는 내가 싫은 것, 내가 찬성하지 않는 것의 존재도 인정할 수 있는 관용성에 있다. 이런 관용성이 있는 사회에선 제2의 싸이, 제3의 김기덕이 잇따라 발생할 것이다. 반대로 지금처럼 잘 나가는 것 이외의 것들을 모두 조롱하는 분위기에선 새로운 싹이 자랄 수 없다.

김기덕에게 그렇게 냉담하던 우리 네티즌이 하루아침에 김기덕 찬양자가 되고, 강남스타일에 별 반응도 없던 우리 사회가 갑자기 열광하는 것도 비문화적인 일이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느낀 것이 아니라 해외의 평가를 그대로 추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사람이 뭐라던, 유럽 영화평론가들이 뭐라고 하던, 내가 주체적으로 느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신과 다른 느낌이나 판단을 갖는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도전이나 작품세계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 한국에서 문화가 꽃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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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들 꼭 있소. 

정답이 없다고 믿는(믿고 싶은) 사람들.

다양성이라는 말 뒤로 숨어 정답을 내놓지 못하는데 따른 스트레스를 회피하는 사람들. 


괜히 애꿎은 입시교육 탓을 하고 관용성 얘기를 꺼내는데, 이건 전형적인 물타기 수법. 

자신의 안목없음, 무엇이 진짜 예술인지 판별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감추려 드는 것. 


친절하게도 김기덕에 열광하는 네티즌들, 찬양자들을 두고 무려 비문화적이라는 딱지같이 붙여주시는 저 꼼꼼함. 그리고 모두에 대한 존중이라는 키워드로 마무리짓는 저 훈훈함. 

그런데 왠지 낯익다. 저 꼼꼼함과 훈훈함, 그리고 그 속에 깃든 저열함이 낯익다. 


그래!


노무현에 열광하던 사람들, 그리고 이젠 문재인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두고 노빠니, 문빠니 하면서 조롱하고 훈계하는 그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렇게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이 멀어있음을 셀프인증하던 지식인들이 생각난다. 


뭐? 관용성이 제 2의 싸이, 제 3의 김기덕을 길러낸다고?


예술은 마이너스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게 예술이다. 관용이 예술을 낳는 경우는 없다. 전무하다. 

예술사 공부 한 번도 안해봤나? 

철저한 불관용이 예술의 본질이다. 


그건 답이 아니지! 

진정 예술가는 일단 기존의 답을 부정하고 출발한다.  


그리고 예술가는 기존의 답을 부정하는데서 멈추지 않는다. 

자기 생을 걸고 답을 내놓는다. 

그것도 무려, 정답을 내놓는다. 

그런데 정답이 없다고?


김기덕 영화를 보고도, 고흐의 그림을 보고도,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도 정답이 없다는 말이 주둥이에서 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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