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정명으로 돌아가자. 말을 똑바로 하자.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한국인은 말을 똑바로 하기는커녕 아예 말을 할 줄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말을 반박할 줄도 모른다. 토론회는 서로 동문서답을 주고받으며 교착된다. 박빠들은 신기하게도 박근혜의 엉터리 말을 잘도 알아들으니 더욱 처참하다. 안희정은 자유한국당도 반성한다면 대연정에 받아주겠단다. 반성은 개인이 하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개인이 아니다. 이 문장의 주어가 될 수 없다. 안희정은 한국말을 모르니 반론해 줄 수 없다. 어차피 못 알아듣는 거다. 더욱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근간을 흔든다. 찬성과 반대가 있어야 나중 잘잘못을 평가할 수 있다. 여야가 한덩어리로 대연정이 되면 공산당 일당독재가 되어 나중 문제가 있을 때 책임소재를 물을 수 없다. 더욱 정치인끼리 야합으로 국민이 소외된다. 여야가 50 대 50 균형이라야 가운데서 심판을 보는 국민이 갑 된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구조론의 질과 입자다. 반성은 입자가 하는 것이다. 질은 반성하지 않는다. 논쟁을 하더라도 그렇다. 적을 칠 때는 입자를 건드려야 한다.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말할 때는 질을 건드려야 한다. ‘뭐뭐 때문이야.’ 하는 말은 적을 칠 때 써먹는 모진 말이다. ‘고학력 고스펙이 출산의 장애물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다 짤린 공직자 있다.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지목하면 안 된다. 그건 박근혜정권을 칠 때 하는 말이다. 적을 공격할 때는 트럼프 수법대로 ‘이게 다 무슬림 때문이야.’ 하고 한 넘에게 독박을 씌워 매우 조지는 것이다. 지식인과 무식인이 갈리는 지점이 여기다. 아군을 휘몰아 적을 칠 때는 구체적인 물리적 대상을 지목해주는게 맞다. 아군이 공격할 대상을 명백히 해서 집단의 방향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다수를 용이하게 통제할 수 있다. 답을 콕 찍어 준다. 그러나 이는 전술적 책략이다. 아이싸움이 어른싸움 되는게 보통이지만 ‘아이 때문이다.’ 하고 대상을 지목하면 안 된다. 설사 팩트가 그러하더라도 그 팩트에 넘어가면 안 된다. 반드시 상부구조가 있으며 윗선을 건드려야 한다. 에너지를 통제하는 시스템 때문이다. 원인은 언제라도 통제가능성에 있다. 질의 형태를 가지는 상부구조에서만 에너지를 통제할 수 있다. 입자형태의 물리적 대상은 통제되지 않는다. 아이싸움이 어른싸움 되기 전에 어른들 사이에 어색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 긴장감을 통제할 수 있다. 아이는 통제될 수 없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인간은 사회와의 긴밀한 관계를 원한다. 고학력 고스펙 여성은 이미 사회와 긴밀한 상태에 도달해 있으므로 출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상부구조로 올라가서 문제의 답은 국민 개개인이 과연 사회와 긴밀한가에서 찾을 것이며 자본주의는 긴밀하지가 않다. 저출산 현상은 자본주의 병폐다. 사회주의적 대안이 답이다. 적어도 출산문제 만큼은 자본주의 경쟁만능 시각으로는 해법을 찾을 수 없다. 경쟁하면 이겨야 한다. 아이를 출산하면 진다. 누가 자원해서 지는 게임을 하겠는가? 초등학교 교실에서 자본주의를 쓰면 곤란하다. 성적순으로 급식을 한다든가 하면 팀플레이를 배울 수 없다. 망하는 거다. 짤린 공무원은 상부구조를 건드리지 않았고, 안희정 역시 상부구조를 건드리지 않았다. 이는 멍청해서다. 국어시간에 국어공부 하지 않은 거다. 문제는 이 지식을 교과서에서 안가르친다는 거다. 그래도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은 저절로 알게 된다. 트럼프처럼 특정 대상을 지목하여 덤터기 씌우는 마녀사냥 수법은 못배운 사람이 하는 짓이다. 안희정과 짤린 공직자는 독서부족을 들킨 것이다. 구조론을 공부하든가 독서를 많이 해서 말하기 기술을 익혀두어야 한다. 필자의 음모론 비판이나 종교비판, 유기농 비판도 마찬가지다. 공자의 정명에 입각해서 말을 바로 하자는 것이다. 편가르기식 2분법 정치술 구사는 좋지 않다. 그것은 정명이 아니다. 비겁하다. 유기농 선전은 소인배의 수법이며 글 배운 군자라면 최적농을 지향해야 한다. 그 작물이 과연 그 토양에 맞는지, 그 종자에 맞는지, 그 일조량에 맞는지, 그 강수량에 맞는지 등을 모두 판단하여 최적농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비료와 농약도 쳐야하면 치는 것이 맞다. 어느 선이 적당한지를 명확하게 판단해야 한다. 이거 아니면 저거 식은 곤란하다. ‘뭐만 하면 된다.’는 식의 도그마 앞세우기는 고약한 것이다. 종북놀음 좋아하는 꼴통들이 쓰는 수법이다. 안희정이 질이 아닌 입자를 건드려 망하듯이, 어떤 공직자가 고학력 고스펙타령하다 망하듯이 질이 아닌 비료와 농약 입자를 건드리므로 그것은 떳떳하지 않은 거다. 과연 정명인가? 과연 떳떳한 언어인가? 우리는 곧 죽어도 진짜를 추구해야 한다. 김어준 음모론 마냥 이것저것 집적거려서 한 건 성공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이면 곤란하다. 종북이냐 아니냐는 입자다. 우리가 꼴통들을 친일로 공격하는 것도 입자를 건드리는 수법이다. 한북중일러미간 외교전략이라는 질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공자의 사상은 정명에서 시작된다. 노자의 명가명 비상명은 공자의 정명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런데 공자가 위다. 보통은 귀납적으로 접근한다. 공자의 정명보다 노자 비상명이 한 차원 위에 있다는 식이다. 공자의 명은 작위나 도량형이나 신분제에 적용되는 낮은 레벨의 명이라는 거다. 틀렸다. 굳이 말한다면 순자의 정명사상이 이에 해당된다. 순자는 도량형이라든가 신분계급이라든가 따위 구체적인 명을 거론한다. 명실론으로 가서 보다 실질적인 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명이 포지션이면 실은 역할이다. 왕의 이름은 포지션이고 역할은 외교다. 제후의 이름은 포지션이고 역할은 내치다. 사의 이름은 포지션이고 역할은 심부름이다. 순자의 명실론은 포지션과 역할로 접근하니 노자의 상명보다 낮되 구체적이다. 이는 법가로 발전하게 된다. 노자의 비상명은 보다 높은 진리와 자연법칙으로서의 명이다. 노자가 순자보다 높은 레벨에 있다. 그러나 공자의 정명은 보다 높은 차원이다. 사실이지 공자의 정명 개념에는 구체적인 컨텐츠가 없다. 대개 포괄한다. 정명 컨텐츠는 순자 제안이다. 노자는 순자를 쳐야 한다. 공자의 정명 속에 노자의 비상명이 있다. 공자의 명은 사물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소통이다. 공자는 신하가 임금을 사칭한다든가 하는 거짓 이름을 비판한다. 그러나 공자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사물의 이름이 아니라 소통의 원리다. 공과 사의 구분을 말하고 있는 거다. 구조론으로 보면 공은 질이고 사는 입자다. 질 다음에 입자다. 공 다음에 사가 온다. 안희정은 공사구분이 안 되어 사사로운 반성을 정당이라는 질에 끌어대는 오류를 범한다. 반성과 참회는 개인이 하고 집단은 견제와 균형이라는 시소원리를 따라 물리적으로 작동한다. 공자의 명은 공사구분을 통해 소통에 이르는 것이며 최순실로 협잡하는 사적루트의 활용은 그러한 소통을 가로막는다. 광해군이 잡채정승 딤채정승으로 북인위주 사적루트를 쓰다가 말아먹은 것과 같다. 정조가 홍국영 최순실과 짜고 사적루트 애용하다 조선을 망쳤다. 대개 나라가 망하는 것은 공적 시스템의 붕괴 때문이다. 김씨나 이씨로 불리는 이름이 중요한게 아니다. 공자가 그것을 말하려 했겠는가? 너와 나 사이에 윙크로도 의사소통이 일어나면 이름은 이미 그 가운데 있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이미 서로 소통하여 있는 것이다. 입자의 코어는 내부에 있지만 외부에 있을 때도 있다. 외력이 가해지면 순간적으로 코어가 유도된다. 명이라는 것은 대상을 통제하려는 것이며 코어를 건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미 의사소통이 활발한 상황이며 자연상태는 먼저 없는 그 코어를 유도해내야만 한다. 코어는 원래 없는 것이다. 이름이 원래 없다는 말이다. 비상명이다. 그러므로 소통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자는 소통할 수 있다. 인지의신예가 그것이다. 인지의신예를 갖출 때 말하지 않아도 이미 말해져 있고 이름부르지 않아도 이미 그대 내앞에 다가와 있다. 군자는 인지신의신예로 정명에 이른다. 여성이 노출이 심한 옷을 입어서 성범죄가 일어난다든가 하는 개소리는 소통개념이 없어 즉 정명을 찾지 못한 것이다. 평소 독서를 게을리 해서 한국어가 안 된 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여성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하는 것이다. 이는 인이 아니다. 남으로 보는 시선을 들킨다. 남성 대 여성의 이분법을 가동하니 이미 틀려먹었다. 이미 소통이 망한 것이며 정명에서 심하게 벗어나 있다. ‘니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응수한다.’는 대응논리로 바라보고 있다. 이는 소인배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다. 여자가 이렇게 하면 남자가 이렇게 한다. 틀렸다. 입자의 시선이 아니라 질의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질은 결합한다. 너와 나로 구분하면 틀렸다. 여자와 남자로 구분하면 틀렸다. 농사라도 유기와 무기로 구분하면 틀렸다. 그것은 소인배 책략이다. 인지의신예가 아니다. 여성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남성이 거기에 따라 대응하지 않도록 사회관계가 긴밀해지는 것이 공자의 인이다. 니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는 논리를 자기 자식에게 쓰는 부모는 없다. 나쁜 부모는 100점 맞으면 빵사준다고 유혹하지만 그게 타자화다. 아이 망친다. 은밀히 상처를 주는 행동이다. ‘네가 어떻게 해도 나는 너를 보호한다.’는 게 올바른 부모의 태도다. 상대의 행동여하에 따라 나의 대응이 바뀌면 안 된다. 그게 소인배인 것이다. 사회관계가 긴밀해져 여자남자가 서로 타자가 아니게 될 때 그런 문제들은 자연히 극복된다. 정명으로 돌아가자.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국민이 주인된다는건 개소리다. 그것은 공자의 정명이 아니다. 막연한 말을 하면 안 된다. 권력 자체를 각자의 실질권력에 따른 분수에 맞게 분배해야 한다. 국민들이 합의하면 민주주의다? 거짓말이다. 합의당하기가 다반사다. 국민이 각자 자기 위치에서 가진 물리적 힘만큼 권력을 가져야 한다. 그 힘에는 방해할 권리도 포함된다. 노조는 회사를 방해할 힘이 있다. 그만큼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권력자의 힘은 국민이 위임해둔 것이다. 권력자의 자기 소유가 아니다. 그 힘은 사가 아니라 공이다. 그것을 슬그머니 자기 소유로 돌려놓는게 박근혜 짓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모두가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합의하는 것도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것은 쇼에 불과하다. 회의나 투표가 곧장 민주주의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회의는 요식행위고 투표는 눈가림이다. 개개인이 가진 권력을 명백하게 드러내는게 민주주의다. 노조의 방해할 수 있는 힘, 학부모의 대항할 수 있는 힘, 교회 신도의 목회자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을 드러내야 한다. 각자 자신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 바로 알아야 한다. 의하여가 정명이고 위하여는 허명이다. 참여하고 합의하고 회의하는 것은 정명이 아니다. 인지의신예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와 부모가 노상 대화하고 토론하고 회의하고 합의해도 아이가 부모에게 전혀 대항을 못한다면 민주주의 아니다. 아이가 어떻게 대항해? 한국의 주권자들은 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가? 무기를 손에 쥐고 있는가? 과연 국민이 언론을 장악하고 패권세력을 이루고 있는가? 국민이 언론을 통해 공론을 형성하여 대항방법을 찾아내고 패권을 통해 대오를 이루었는가? 그게 없다면 무슨 짓을 해도 가짜 민주주의다. 나는 정명을 주장한다. 가짜를 고발하고 진짜를 주장한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다. 국민이 구체적인 권력의 대항방법과 대항수단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공론을 도출해낼 방법이 없고 패권을 형성해낼 물적 수단이 없다면 그것은 절대로 민주주의 아니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엄격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대충 어버버 하면서 적을 제압할 수는 없습니다. 정명이 아닌 것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머리속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